다섯. 맞벌이 가족

by In l ll

늦은 저녁, 장 본 물건을 나눠 들고 엘리베이터도 없던 오래된 빌라 계단을 낑낑대며 올라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면, 장판에 녹아든 진한 코튼향이 따듯하게 퍼져 나와 차가운 바깥공기를 쓸어주던 기억이 있다.

다섯 살, 특히 할머니 할아버지가 인천으로 오기 전 네 식구의 생활은 대부분 흐릿한 기억이다. 그저 모든 게 새롭고 낯설어서, 매번 익숙한 누군가 뒤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요리조리 주변을 살피던 기억뿐이다. 대신 이때 기억은 주로 누나에게 선명했다. 돌봄만 받던 상황에서, 갑자기 온전히 자기가 신경 써야 하는 어린 동생이 생긴 것이니까. 네 살 터울의 누나는 이제 막 아홉 살. 그는 학교가 끝나면 점심도 먹지 못한 채 미술학원으로 달려가, 그곳에 가방만 두고 아래층 어린이집에서 누나를 기다리던 나와 함께 밥을 먹었다.

그 쪼그만 애들 사이에서 나 혼자 이따만 한데. 내가 거의 하루 종일 옆에 있었다니까. 진짜 너는, 나한테 평생 잘해야 돼.

원래도 그리 좋은 성격은 아니긴 했지만, 괜한 심술이라기보다 북적이는 공간에서 느낀 두려움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한적한 시골 마을, 바닷바람과 함께 고요히 해가 올라서고 넘어가는 그 느긋함을 온종일 따분해하면서도, 유유히 시골을 거닐던 그 잔잔한 속도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넓은 도로를 가득 메운 빵빵거리는 차들 사이로, 서두르던 엄마의 손을 꼭 붙잡고 북적이던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비슷한 또래 아이들이 시끌벅적하게 뛰어놀던 어린이집이었으니까.

엄마가 가고 나면, 선생님의 노력에도 나는 구석에 앉아 하루 종일 눈물을 쏟으며 밥도 제대로 먹지 않았고, 어떤 날은 신경 써준 다른 아이를 밀치기도 했다. 스무 명 남짓 있던 어린이집에, 선생님들이 온전히 나에게만 신경을 쏟을 순 없었고, 그렇다고 나를 데리고 출근할 수도 없었던 엄마는, 아직 어린 누나에게 나를 맡겼다. 밤늦게 들어와 새벽에 집을 나서던 아빠를 제외하고 나면, 누나에게 맡기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을 테니까. 누나는 한 번 어린이집에 오면, 학원도 가지 못한 채 동생에게 붙잡혀 오후 시간 대부분을 어린이집에서 보내야 했다. 다행히도, 내 적응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금방 또래 친구들이 생기며 곧 누나는 전처럼 학교에서 점심을 먹고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다 미술학원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저녁때가 되면 우리는 누나의 미술 학원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유독 그 버스 안에서의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다. 나는 매번 누나가 사준 불량 과자를 양손에 들고 버스에 올랐고, 누나는 아홉 살은커녕 유치원에 다닌다고 해도 믿을 정도의 작은 몸집으로, 등에 멘 자기 가방에 더해 내 어린이집 가방을 들고 앞서가는 나를 챙겼다. 우리는 꼭 맨 뒷자리에 앉았다. 내가 좌석에 무릎을 대고 뒤쪽 창문으로 뻗어 나오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누나는 옆에서 내가 떨어질까 내 등을 한 손으로 받치곤 했다.

집에 도착하면 비슷하게 도착한 엄마와 저녁을 먹었는데, 가끔 엄마가 늦어질 때면, 배고픔에 엄마를 기다리지 못하고 냉장고를 샅샅이 뒤지기도 했다. 어느 날은 매운 김치를 식탁도 피지 않은 채 헐떡이며 나눠 먹고 있는 우리를 보면서, 엄마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고 했다. 더 악착같이 돈을 모아야겠다고. 그때는 그 심정을 온전히 이해하진 못했다. 아이들 둘이 엄마 없이 김치를 꺼내먹고 있는 걸 봤다면, 독하게 사는 것보다 좀 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낼 방법을 궁리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초에 엄마에게 그런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당장에 살고자 몸부림치던 엄마에게, 맞벌이는 선택사항이 아니었으니까. 더군다나 그를 더 가슴 아프게 만든 건,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현실보단, 그 아이들이 바라보는 텅 빈 냉장고 속이었다. 부족함 없이 자랐던 나는 엄마의 손길이 아쉬웠고, 가난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엄마는, 우리가 먹을 것이 없어 잘 먹지도 않던 김치를 밥도 없이 꾸역꾸역 씹어대고 있었던 것이 서러웠다.

할머니가 오고 난 후, 엄마는 정말로 더 오래 일하기 시작했다. 점점 늦어지는 귀가 시간에, 나는 이불을 깔고 누워서도 귀를 쫑긋 세우고 엄마의 발걸음을 기다렸다. 그러다 터덜터덜 힘없는 발걸음에, 계단을 오르며 힘에 부친 익숙한 신음이 더해지면, 크게 엄마를 부르며 현관을 나섰다. 그러면 그 지친 발걸음이 조금씩 생기를 찾는 듯 빨라졌고, 곧 내 앞에 당도한 차가운 품 안에 누나와 같이 얼굴을 묻었다. 그러면 코끝이 찡하도록 싸한 차가운 바람 냄새가 오래된 스웨터에서 흘러나왔다. 엄마는 그 어중간한 자세에서 매달린 두 자식의 뒷머리를 한참, 오래도록 쓰다듬었다. 다녀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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