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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홉수 Oct 25. 2019

사랑받지 않을 사람을 사랑하지 않겠습니다

높디높은 마음의 장벽들

 '사랑'이라는 단어보다 가슴 뛰는 단어는 찾기 힘들다. 상대를 무조건적으로 아끼는 마음은 자신을 먼저 챙길 수밖에 없는 생존의 본능에 반한다. 상대에게 무엇을 바라기보단 설명할 수 없이 그 대상에게 끌리는 것이다.


 그 상대는 나 안에서부터 출발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함께하는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 어쩌면 우리 모두가 하루를 버티는 힘이 된다. 시야를 밖으로 뻗으면 사랑할 상대는 차고 넘친다. 살을 맞대며 생활하는 가족부터 학창 시절 추억을 함께한 친구, 고단한 사회생활을 함께하는 동료들까지…. 종교적인 사랑을 빗대지 않아도 나 자신이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마다 사랑할 수 있는 기회는 생긴다.


 이성을 사랑할 때는 눈이 멀기도 한다. 흔히들 '콩깍지가 씌었다'라고 말한다. 연인들이 길 한복판에서 싸우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얼굴이 상기되고, 큰 소리가 오가기도 한다. 달리 보면 두 사람은 주변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온전히 둘만의 관계에 몰입하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은 풍경일 뿐이고, 그들은 세상의 주인공이 된다. 

 

 사랑을 하면 상처는 뒤따라오기 마련이다. 사랑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이다. 상대가 나 자신이든, 이성이든, 가족, 친구, 동료든 자신이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마음속에는 역설적이게도 자신도 사랑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자리한다. 상대를 뜨겁게 사랑하는 순간, 상대가 나를 사랑해주길 원하는 마음이 생기는 건 동물적인 본능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곧잘 관심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 관심은 선을 넘을 때가 있고, 상처를 준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내 주변에 벽을 둘러쌓는다. 사랑이라는 핑계의 과도한 관심을 피하기 위해서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의도적으로 바깥과 자신을 단절하는 이들을 만난다. 혹은 내 스스로 담을 쌓기도 한다. 이러한 것은 '타인을 향한 무관심'으로 변질되거나 더 심해지면 '사회적인 혐오'를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것일까. '내가 상처 받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지레 벽을 쌓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는 건 아닐까. 내 상처에만 집중하는 것은 아닐까. 요즘 세상이 살기 팍팍하다고, 낭만이 사라졌다고들 한다. '사랑받지 않을 사람을 사랑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자신은 물론 내 가족, 친구, 동료들을 향해서도 파고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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