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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홉수 Nov 04. 2019

목 늘어난 반팔티, 지난했던 올여름

'바쁘다'는 핑계로 변화를 미뤄왔던 건 아닐까

 주말 근무를 마치고 새로운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보통의 직장인들이 출근하는 날, 반대로 나의 짤막한 휴일이 시작됐다.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싶다가도 일주일 내내 노동으로 달궈진 몸은 핸드폰 알람 소리에 곧바로 반응했다. '조금 더 자고 싶은데'라는 혼잣말을 내뱉다가 애써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 멍하니 앉아있으니 출근 준비를 할 때 시야에 들어오지 않던 것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회사 선배가 생일 선물로 사준 화분에 물을 안 준 게 벌써 3주나 지났다. 사놓고서 손도 대지 않은 책들도 수북이 쌓여있었다. 새삼스럽게 '정신없이 살아왔구나'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가까운 것들에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가족이나 나를 돌볼 여유마저 없었던 것이 괜스레 억울했다.


 목표 없이 방황하던 내 시선은 옷들이 걸려있는 행거로 향했다. 추석이 되기 전 옷장 서랍에서 꺼내 걸어두었던 긴팔과 여름에 입었던 반팔들이 뒤섞여있었다. 행거 위에는 겨울 점퍼가 있었다. 이쯤 되면 방 정리에 소질이 없는 내 게으름을 탓하는 게 더 마땅해 보였다.


 어색하게 4계절 옷들이 모인 곳에서 가장 눈에 띈 옷은 올여름 앞두고 산 네이비색 반팔티였다. '오버핏 라벨 포켓 레이어드 반팔 티셔츠'라는 복잡한 설명의 이 반팔티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대강 보고 산 옷이었다. 폴리에스테르 95%, 폴리우레탄 5%. 재질 때문인지 편하고, 구김도 적어서 야외 일정이 있을 때 자주 입었다.


 여름을 치열하게 보낸 전우와 같은 마음으로 반팔티를 천천히 살펴봤다. 둥그런 목 주변은 탄력을 잃고 조금 늘어나 있었다. 옷이 없는 편도 아니지만, 입는 옷에만 손이 가는 내 취향이 그대로 드러났다. 한편으로 지난여름에는 출근 전 옷을 고를 새도 없었다는 것을 뜻했다.


 올여름은 그동안의 여름과 달랐다. 이직 1년이 지난 회사에서는 여러 일들이 쏟아졌다. 팀에서는 후배들이 퇴사했고, 새로운 선배들이 왔다. 흔히 말하는 인력 공백기를 가까스로 몸으로 때우면서 새로 오신 분들을 챙겼다. 안의 사정은 봐줄 새 없이 여러 프로젝트들이 시작과 끝을 반복했다. 반팔티 목이 이만큼밖에 늘어나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다.


 처음의 팽팽한 새 옷의 느낌이 사라진 반팔티를 보니 나도 모르게 힘이 빠졌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달려온 것일까'라고 자문해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답은 없었다. 사회 생활을 시작하면서 항상 순간에 몰입하며 살아왔고, 그것들은 언제나 추억이 돼왔다. 하지만 직장생활 8년 차가 되다 보니 이제는 나아가는 방향을 잃은 것 같다.


 "뭘 그렇게 열심히 하냐. 적당히 눈치 봐가면서 해야 오래 한다"라고 충고해준 친구들의 말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웃어넘겼지만 월요일 오전에 멀뚱히 늘어난 반팔티를 보고 있자니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바라보는 목 늘어난 반팔티가 사실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바쁘다"라는 핑계를 달고 살면서 다시 삶의 새로운 변화를 준비해야 하는 시기를 미뤄왔을지 모른다. 나는 진작에 그 시기가 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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