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홉수 Nov 19. 2019

"다녀올게요" 인사가 아픈 아침

엄마는 자식들이 돌아올 공간을 쓸고 닦았다

 우리는 아침이 되면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아간다. 어느 곳에 갔다가 돌아오는 '다녀오다'라는 말은 누군가에게는 부모님의 품과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바깥세상이 교차하는 말이다. '다녀오다'가 인사말이 되면 아늑한 집과 잠시 이별하는 때다.


 "다녀올게요." 오늘 아침 출근하면서 어머니에게 인사했다. "응. 그래. 조심히 다녀와." 언제나 그렇듯 가게 출근 전 집안일을 하시던 어머니가 대답했다. 다른 날이었으면 지하철역으로 가는 마을버스를 놓칠까봐 곧바로 문고리를 틀어돌렸을 텐데, 오늘은 무심코 어머니의 인사에 뒤를 돌아봤다. 


 어머니는 설거지를 끝내시고 잠시 소파에 앉아계셨다. 조금씩 늘어나던 주름이 아침 햇살에 비쳐 더욱 깊게 패여보였다. 바깥으로 향하던 발걸음이 멈췄다. '엄마가 이렇게 늙어셨었나.' 속으로 가만히 내 나이를 세어봤다. 서른넷. 다른 자식이면 벌써 독립하고, 사랑하는 이와 가정을 꾸릴 나이에 나는 아직도 부모님의 품에 있는 자식이었다.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난 어머니는 스물다섯에 아버지에게 시집왔다. 사과 농장을 하던 둘째 딸은 결혼 후 가릴 것 없이 일했다. 어머니는 젊을 때부터 부업으로 청사초롱을 만들며 나를 키웠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던 1998년에는 IMF 사태가 불어닥쳤다. 어머니는 퇴직한 아버지와 간판 가게를 하시면서 지금까지 자식들 뒷바라지를 하셨다. 우리 집은 언제나 경제적으로 모자라지 않았으나 넉넉하지도 않은 편이었다.


 "부모가 해준 게 많이 없으니 결혼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거 해라." 나와 동생 모두 서른을 넘겼을 때 어머니는 저녁 술자리에서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이제 시집, 장가가야지"라고 말한 뒤였다. 어머니는 고단했단 자신의 삶보다 자식들에게 충분하게 지원을 해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리신 듯했다. 나와 동생은 고등학교 때 입시 학원을 다니거나 과외를 하지 않았다. 대학교 등록금도 장학금을 타거나 대출을 받아 마련했다. 어머니는 이런 두 자식이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시며 미안해하셨던 것 같다. 


 지친 표정으로 TV를 지켜보던 어머니를 보고 와락 눈물을 쏟아질 뻔했다. 평소 표현을 잘하지 못한 못난 아들은 다시 고개를 돌려 문을 열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서른넷, 34년.' 어머니는 첫아들을 낳고 그렇게 34년 동안 자식이 돌아올 공간을 쓸고 닦고 있었다. 남들보다 더 잘해주고 싶은 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자책을 안고서.


 '나도 자식들이 다녀올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만들 수 있을까.'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마을버스에 몸을 싣고 문뜩 창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를 챙기기도 정신없는데… 아득히 먼 이야기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조건 없는 애정을 몇 년이나 쏟아야만 어머니처럼 할 수 있을까.' 그 마음은 너무나 커서 단순히 머릿속으로도 그려지지 않을 만큼의 크기였다. 


 "다녀올게요." 험난한 세상 속에서 지친 몸을 쉴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 그리고 다녀와서 다시 볼 수 있는 부모님이 계신다는 것. 더 늦기 전에 감사한 마음으로, 부모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두려워하지 않고, 부모님이 나에게 베푼 사랑보다 더 사랑하겠다고 다짐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목 늘어난 반팔티, 지난했던 올여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