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의 본보기
저녁 11시, 도쿄역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 안이었다.
겨우 한 자리가 나있어서 나는 서있었고 졸린 오빠는 앉아서 졸고 있었다.
앉을자리가 없는 만원 전철 안, 한 손엔 맥주를 쥔 술 취한 아저씨와 아기를 안고 계신 아저씨 두 분께서 갑자기 엄청 큰소리로 “비켜!! 아기가 있다!! 길을 터라!!!” 라며 조용한 전철의 정적을 깼다.
흔한 일본 셀러리맨의 정장 복장에 와이셔츠는 가슴팍까지 풀어헤쳐져 있는, 위협을 주는듯한 일본에서는 흔하지 않은 큰 문신이 한쪽 가슴에 새겨져 있었다.
아무래도 어떤 동네의 야쿠자나 깡패인 게 분명하다. 무섭고 이상해서 다들 한번 쓱 째려보다가 잘못 시비 걸릴 것 같아서 바로 바짝 붙어 피했다.
한국과 일본의 차이일수도 있는 부분이겠지만, 일본은 괜히 이상한 사람이 있으면 그냥 모른 척한다. 개인주의가 철저한 이 나라에선 그게 마음이 편하고, 그렇게 하면 적어도 나에겐 피해가 없는 걸 알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은 ‘저, 아저씨 조용히 하세요’라는 분들도 분명히 계실 거다.
우리 줄 끝에 앉은 한 학생이 대뜸 “여기요!”라고 했고, 귀띔으로만 보며 모른 척하고 있던 모든 승객의 이목이 집중됐다. 대놓고 다들 쳐다보는 게 아닌 최대한 눈이 가질 수 있는 시야각을 이용하며 모른 척 지켜봤고, 학생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비켜줬다.
그 야쿠자 같은 분은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냥 지나간다고 비키라는 거였는데, 어떻게 그런 뜻으로 이해한 걸까?
“오! 그게 바로 일본인의 본보기다!”라고 하며 비켜준 학생에게 천 엔을 쥐어줬지만, 학생은 아이가 있다길래 자리를 내어준 거라며 돈을 거부했다.
나랑 오빠는 서로 쳐다보며 ’아~ 아쉽다 ‘라는 생각을 했다
돈이 아까운 게 아닌, “일본인”의 본보기라고 했을 때, ‘아, 저희는 한국인입니다’라고 말했었어야 하는데~! 였다. 그랬으면 그 야쿠자는 뭐라고 했을까. 한국인의 본보기라며 칭찬해 줬을까? 어떤 반응을 했었을까,라고 생각하며 있었다.
일본 답게 다들 신기하게 쳐다보다가도 바로 조용히 개인의 시간들을 가졌고, 우리는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계속 이야기를 엿들을 수 있었다.
“아니에요, 아이가 있어서 자리를 비켜준 거뿐이지 돈을 바란 건 아닙니다”라고 학생이 말했고,
“왜, 천 엔은 부족한가? 지갑 꺼내줘 봐 나 돈 많아~”라고 했다.
학생은 거부하면서도 지갑을 꺼내드렸고 아저씨는 지갑 안에 몇 장씩 들어있는 만 엔(십만 원짜리 지폐) 둘 중 한 장을 꺼내서 학생에게 줬다. 학생도 놀랐지만, 주변에서 뒤통수, 또는 곁눈질로 보고 있던 모든 승객분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고, 학생 또한 놀랐지만, 만 엔(십만 원)은 거부하지 않았다. 무슨 양보하는데 값으로 메기는 게 어딨 어’하긴, 꽁돈 십만 원이 생기는 건데 거부하기가 쉽진 않겠다‘ 싶었다.
얼큰하게 술에 취하신 아저씨는 야쿠자 같으면서도 자리를 비켜준 학생에게 아이 사진을 계속 보여주며 한동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술에 취한, 살짝 공격적이면서도 ‘우리 아이 귀엽지’ ‘넌 매우 착해!’ 라며 말을 이어갔다.
비록 한국인의 본보기를 보여주진 못했지만, 그 당당한 학생 덕분에 아기를 안은 그 아저씨는 편하게 오실 수 있었다.
우리는 집에 내려서 돌아가면서 ‘너 같았으면 받았을 거야?’라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게, 천 엔이었으면 내가 베풀려고 생각했던 선의가 가치가 메겨지는 것 같아 거부했을 것 같지만, 만 엔이면.. 학생인 아닌 나도 망설여졌을 것 같다.
0이 하나 추가된 것뿐인데.
그 상황에 놓였을 때의 나는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정답이었을까.
독자분들은 어떤가요?
처음 소개 드립니다.
브런치와 똑같이, 일본의 삶을 영상으로도 같이 공유하 있어요.
업로드 속도는 느리지만, 저의 일본의 삶이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링크를 타고 놀러 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