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기억
기억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법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처음 본 날, 나는 한참을 극장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가고, 조명이 환하게 켜진 뒤에도 일어날 수 없었다. 치매에 걸린 노부부의 이야기는 단순한 영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미래의 모습이었고, 동시에 사랑이 무엇인지 다시 묻게 만드는 거울이었다. 사실 나는 치매에 대한 두려움을 꽤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이 영화가 내 인생에서 가장 인상적인 영화로 남은 이유도, 그저 아름다운 영화였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했기 때문이다.
살아오면서 나는 때때로 내 기억의 서랍이 성기다는 것을 발견한다. 고통스러웠던 시절의 기억들이 드문드문 빈 칸으로 남아 있고, 불안하고 감정이 과잉되는 순간엔 방금 전 대화했던 사람의 얼굴조차 흐릿해질 때가 있다. 마치 물에 번진 수채화처럼, 그 순간 함께했던 대화도 상대의 표정도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치매란 무엇일까. 미화해서 바라보면 모든 고통을 잊고 해맑게 살아가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인간의 존재 이유를 잊는 것이고, 내가 누구인지, 내 곁의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존재의 뿌리가 뽑히는 것이고, 관계의 실이 끊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상실이 혼자일 때 가장 비참해지고 슬퍼질 것이라는 예감이 나를 짓눌렀다.
그래서 나는 정말 나를 잘 챙기려고 한다. 내 삶에 대한 애착이나 정신 건강, 회복, 쉼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것도 결국 이런 이유에서다. 오늘의 나를 돌보는 것이 미래의 나를 지키는 일이라는 걸 알기에, 충분히 쉬고, 마음을 돌보고, 내 삶에 애착을 갖는 것은 단순한 자기관리가 아니라 기억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혹시나 하는 혼자 살아가게 될 미래를 대비해, 치매에 걸려도 안전하게 살 수 있을 만큼의 경제적 안전망을 위해 더 내 삶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려고 한다. 누군가는 이것을 지나치게 실용적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안다, 준비한다는 것이 두려움에 굴복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두려움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것을.
그리고 사랑을 할 때도 나는, 그리고 이 사람에게 그런 상황이 와도 책임감을 가지고 돌볼 수 있는 사람인가 먼저 생각하게 된다. 일단 내가 그런 마음이 든다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한다. 대신 아파줄 수는 없다. 하지만 곁에서 손을 잡아줄 수는 있다. 기억이 흐려질 때 함께 기억해줄 수는 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내가 단단해야 한다는 것을, 정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이런 마음가짐은 삶이나 관계에서 주체성을 가지게 해주니까, 막연한 의존이나 낭만적 환상이 아니라 현실을 딛고 서서 진짜로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사랑은 삶에서 중요하고 가장 성스럽고 신비한 것이다. 하지만 사랑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사랑하는 나 그리고 사람이 아플 때 대신 아파줄 수 없기에 돌보고 보살필 수 있을 정도의 정신적 경제적 안전망은 기본이니까, 그것이 사랑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구체적인 힘이니까. 사랑의 신비로움과 사랑을 지키는 현실적 능력은 서로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치매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하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이제 나를 움츠러들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선명하게 살아가게 만든다. 오늘을 기억할 만한 날로 만들고, 사랑하는 사람과 의미 있는 시간을 쌓고, 미래의 내가 기댈 수 있는 안전망을 만든다. 그런 이유가 내가 열심히 잘 살아가려는 이유이다. 언젠가 내 기억의 서랍이 모두 비워지는 날이 온다 해도, 나는 적어도 이렇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억을 지키기 위해, 사랑을 지키기 위해, 있는 힘껏 살았노라고.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미래의 나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