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만 잠드는 뇌
인간은 잠들면 세상과 단절된다.
눈을 감고, 의식을 놓고, 무방비 상태로 어둠 속에 누워 있다. 몇 시간 동안 우리는 완전히 무력하다. 포식자가 다가와도, 불이 나도, 천둥이 쳐도, 뇌가 깨어나기 전까지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안전한 곳을 찾았다. 동굴을 파고, 집을 짓고, 문을 잠갔다. 잠이란 그만큼 위험한 것이었다.
그런데 돌고래는 바다 한가운데서 잠을 잔다.
숨을 쉬려면 수면 위로 올라가야 하고, 체온을 유지하려면 계속 움직여야 하고, 상어는 언제든 나타날 수 있다. 안전한 동굴도, 잠글 수 있는 문도 없다.
그들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돌고래의 수면은 인간의 것과 완전히 다르다.
그들은 뇌의 절반만 잠든다. 왼쪽 뇌가 잠들면 오른쪽 눈이 감기고, 오른쪽 뇌가 잠들면 왼쪽 눈이 감긴다. 나머지 절반의 뇌는 깨어 있다. 한쪽 눈은 열린 채로.
과학자들은 이것을 '단일반구수면(unihemispheric slow-wave sleep)'이라고 부른다.
돌고래는 보통 우반구에서 두 시간, 좌반구에서 두 시간씩 번갈아 잠을 잔다. 이 과정을 반복해서 하루에 약 8시간의 수면을 얻는다. 깨어 있는 반쪽 뇌는 그 시간 동안 숨을 쉬고, 체온을 유지하고, 주변을 경계한다.
잠들어 있으면서 동시에 깨어 있는 것.
미국 해군의 해양포유동물 연구팀은 돌고래의 경계 능력을 테스트했다. 닷새 연속으로 불규칙한 경고음을 들려주며 반응을 관찰했다. 인간이라면 수면 부족으로 감각이 무뎌졌을 것이다. 하지만 돌고래들은 120시간이 지난 후에도 처음과 똑같이 날카롭게 반응했다.
연구진이 혈액 샘플을 채취해 수면 부족의 흔적을 찾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 능력은 돌고래만의 것이 아니다.
물개도 바다에 있을 때는 반구수면을 한다. 하지만 육지에 올라오면 우리처럼 양쪽 뇌를 모두 잠재운다. 철새들은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가면서 반구수면으로 휴식을 취한다. 오리들은 무리의 가장자리에 있을 때 바깥쪽을 향한 눈만 뜬 채로 잠을 잔다.
흥미로운 점이 있다.
반구수면을 하는 동물들에게서는 렘수면(REM sleep)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렘수면은 꿈을 꾸는 단계다. 눈이 빠르게 움직이고, 뇌파가 깨어 있을 때와 비슷해지고, 온몸의 근육이 마비된다.
돌고래는 꿈을 꾸지 않는 걸까?
아니면, 그들의 꿈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전혀 다른 형태일까?
고대인들은 '깨어 있으면서 잠드는 것'을 신성한 상태로 여겼다.
힌두교에서 시바 신은 세 개의 눈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두 개의 눈은 물질 세계를 보고, 세 번째 눈은 영적 세계를 본다. 시바의 세 번째 눈은 이마 한가운데, 두 눈썹 사이에 위치한다. 이 눈이 열리면 무지가 타오르고, 진실이 드러나고, 더 높은 의식의 차원으로 나아간다.
'아즈나 차크라(Ajna chakra)'라고 불리는 이 지점은 요가 전통에서 직관, 통찰, 영적 각성의 자리로 여겨진다.
불교에서도 비슷한 개념이 있다. 이집트의 호루스의 눈, 그리스 신화의 외눈박이 키클롭스, 성경의 "네 눈이 하나이면 온 몸이 빛으로 가득하리라"라는 구절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는 '보통의 두 눈'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시각을 상상해왔다.
잠들지 않는 눈. 물질 너머를 보는 눈. 늘 깨어 있는 의식.
현대 과학은 이 신비로운 '세 번째 눈'을 송과체(pineal gland)와 연결짓는다.
송과체는 뇌의 중앙, 두 반구 사이에 위치한 작은 내분비선이다. 솔방울(pine cone) 모양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이 기관은 멜라토닌을 분비해서 수면과 각성의 리듬을 조절한다.
흥미로운 것은, 송과체가 빛에 반응한다는 점이다.
눈을 통해 들어오는 빛의 정보가 송과체에 전달되고, 송과체는 그에 따라 멜라토닌 분비량을 조절한다. 어둠이 오면 멜라토닌이 증가하고, 우리는 졸려진다. 빛이 오면 멜라토닌이 감소하고, 우리는 깨어난다.
어떤 연구자들은 송과체가 미량의 DMT(디메틸트립타민)를 생성한다고 주장한다. DMT는 강력한 환각 물질로, 신비로운 비전과 초월적 경험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어날 때, 죽을 때, 임사체험 때 대량으로 분비된다는 가설도 있다.
과학은 아직 이것을 완전히 증명하지 못했다. 하지만 고대인들이 직관적으로 알았던 것―이마 한가운데에 있는 무언가가 의식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사실인 것 같다.
다시 돌고래로 돌아오자.
돌고래는 한쪽 뇌가 잠들어 있을 때도 완전히 무의식 상태가 아니다. 깨어 있는 반쪽 뇌는 단순히 호흡과 경계만 담당하는 것이 아니다. 연구에 따르면, 잠든 반쪽에서 처리한 정보가 깨어 있는 반쪽으로 전달되기도 한다.
어느 실험에서 연구진은 돌고래의 오른쪽 눈만 훈련시켜 특정 도형을 인식하게 했다. 그런데 나중에 왼쪽 눈(훈련받지 않은 눈)으로도 그 도형을 인식할 수 있었다. 뇌의 두 반구 사이에서 정보가 공유된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번갈아 자기'가 아니다.
잠든 상태에서도 배움이 일어나고, 의식이 흐르고, 양쪽이 연결되어 있다.
어쩌면 돌고래의 뇌는 우리가 생각하는 '잠'과 '깨어남'의 경계를 넘어서 작동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대의 수행자들이 추구했던 것도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명상, 요가,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 중 하나는 '늘 깨어 있는 의식'이다. 잠들어도 의식이 유지되는 상태, 꿈속에서도 자신이 꿈꾸고 있음을 아는 상태. 루시드 드리밍(lucid dreaming)이라 불리는 자각몽도 이 전통의 일부다.
인도의 요기들은 '투리야(turiya)'라는 상태를 말한다. 깨어남, 꿈, 깊은 수면을 넘어서는 네 번째 상태. 모든 것을 관찰하는 순수 의식. 결코 잠들지 않는 목격자.
돌고래가 그것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들에게 철학이나 영적 추구가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의 몸은 그것을 실현하고 있다.
절반은 쉬고, 절반은 깨어 있다. 무방비가 되지 않으면서도 회복한다. 완전히 잠들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쉰다.
경계와 휴식의 완벽한 균형.
현대인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수면이다.
우리는 잠을 자도 개운하지 않고, 깨어 있어도 집중하지 못한다. 불면증과 피로가 만성이 되었다. 우리의 뇌는 완전히 쉬지도, 완전히 깨어 있지도 못한 상태를 오간다.
돌고래는 이 문제를 해결한 존재다.
물론 우리가 반구수면을 할 수는 없다. 인간의 뇌는 그렇게 진화하지 않았다. 하지만 돌고래가 가르쳐주는 원리는 있다.
휴식과 경계는 배타적이지 않다는 것. 한쪽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도 다른 쪽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진정한 평화는 '완전한 무의식'이 아니라 '깨어 있으면서 쉬는 것'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고대인들은 돌고래를 보며 무언가를 느꼈을 것이다.
이 존재는 다르다. 이 존재는 잠들어도 깨어 있다. 이 존재는 우리가 수행을 통해 닿으려는 그 상태에 이미 있다.
그래서 그들은 돌고래를 신성하게 여겼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더 놀라운 것에 대해 말하려 한다.
죽어가는 존재를 구하는 본능. 같은 종족뿐 아니라 전혀 다른 생명까지.
왜 돌고래는 익사하는 인간을 구할까?
3화. 죽음의 바다에서 건져올린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