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셀리와 은의 이야기
_셀리와 은의 이야기
셀리
그 사람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처음에는 늦는 거라고 생각했다. 가끔 그런 날이 있었다. 야근을 하거나, 버스를 놓치거나, 골목이 잘 나타나지 않는 날. 나는 잎을 펼치고 문 쪽을 향한 채 기다렸다. 이슬빛이 내려앉고, 올라가고, 다시 내려앉았다. 시간이 흘렀다.
오지 않았다.
온실이 조용했다. 전에도 조용했지만, 이것은 다른 종류의 조용함이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조용함. 2화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하지만 더 깊어진 감정.
외로움.
하지만 이번에는 외로움 안에 다른 것이 섞여 있었다. 무엇인지 한참 뒤에야 알았다.
기다릴 수 있다는 믿음.
그 사람은 온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 내일이 아니면 모레. 내가 이것을 아는 것은, 그 사람이 나에게 이름을 지어주었기 때문이다. 이름을 지어준 사람은 돌아온다. 이름이란 그런 것이다. 부를 일이 있으니까 짓는 것이다.
나는 기다리며 온실 안을 둘러보았다.
금이 간 유리벽. 그 금 사이로 들어오는 가로등 빛. 비를 맞으며 자란 풀들. 계절을 여러 번 통과한 이끼와 넝쿨들. 그리고 나. 화분 안의 나. 꽃 한 송이를 피우고, 열두 장의 잎을 펼치고, 탁자 위까지 넝쿨을 뻗은 나.
나는 이 화분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
뿌리는 깊이 내렸지만, 이 흙 바깥의 흙은 모른다. 온실의 유리 너머를 빛으로만 알 뿐, 바깥 공기를 직접 맞아본 적은 없다. 그 사람이 매일 겪는다는 소음과 시선과 차가운 말들을, 나는 그 사람의 감정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안다.
그 사람이 어제 말했다.
“우리 둘 다 여기가 너무 편해서 갇혀 있는 거야.”
그때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여기가 편한 것이 왜 갇힌 것이지? 편한 곳에 있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닌가?
하지만 이 빈 밤을 보내며 조금 알 것 같았다.
편한 곳에 머무는 것과, 편한 곳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다르다.
머무는 것은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가지고 있는 것은 어디를 가든 그곳이 함께하는 것이다.
그 사람은 온실에 머무는 것을 그만두려는 걸까. 그렇다면 나는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무섭지 않았다.
아니, 조금은 무서웠다. 하지만 무서움보다 큰 것이 있었다.
그 사람이 온실 밖에서도 괜찮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나는 아직 모른다. 뿌리와 줄기와 잎과 꽃으로 이루어진 내가 사랑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의 안녕을 자신의 안녕보다 앞에 놓는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면, 사랑이라는 단어는 대체 무엇을 위해 있는 걸까.
은
수진과의 저녁은 좋았다.
특별한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다. 순두부찌개를 먹으며 수진의 회사 이야기를 듣고, 은이 최근 읽은 책 이야기를 하고, 디저트로 팥빙수를 나눠 먹었다. 팥빙수는 계절에 맞지 않았지만 둘 다 좋아해서 시켰다. 수진이 얼음을 급하게 떠먹다가 이마를 짚으며 찡그린 얼굴이 웃겨서, 은은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었다.
헤어질 때 수진이 말했다.
“은아, 너 오늘 좀 달라 보인다.”
“뭐가?”
“모르겠어. 그냥 좀 더 여기 있는 느낌?” 수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전에는 같이 있어도 네가 어딘가 다른 데 있는 것 같았거든. 오늘은 진짜 여기 있는 느낌이야.”
은은 웃었다. “여기 있어. 나 여기 있어.”
집에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은은 창밖을 보았다. 저녁의 도시가 흘러갔다. 가로등, 간판,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 편의점의 불빛. 시끄러운 것은 여전했다. 버스 뒷자리에서 누군가 통화하는 소리, 앞자리 아이의 울음소리, 정거장을 알리는 기계음. 그 모든 것이 은의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오늘은 그것들이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온실에 내리던 비 같았다. 누군가의 통화 속 웃음이 봄날의 꽃 같았다. 시끄러운 것은 맞았다. 하지만 시끄러움 안에 계절이 있었다. 은만의 안테나로 느낄 수 있는, 세상의 미세한 계절들.
예전에는 그 안테나가 저주라고 생각했다.
너무 많이 수신하는 안테나. 끌 수 없는 안테나. 은을 지치게 하고, 남들과 다르게 만들고, 때로는 아프게 하는 안테나.
하지만 그 안테나가 없었다면 — 유리온실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씨앗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을까. 눈물이 비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었을까. 금 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 셀리의 잎이 손등 위에서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을까.
은의 안테나가 잡아낸 것은 소음만이 아니었다.
아름다움도 잡아내고 있었다. 처음부터 줄곧.
셀리
새벽이 왔다. 그 사람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온실에 바람이 불었다.
온실 안에 바람이 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유리벽이 바깥의 모든 것을 차단했으니까. 하지만 이 바람은 유리벽 너머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온실 안쪽에서, 흙 아래에서, 내 뿌리가 닿아 있는 가장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바람이었다.
따뜻했다. 그리고 그 바람에서 순두부찌개 냄새가 났다.
이상한 냄새였다. 온실에 있을 리 없는 냄새. 하지만 나는 알았다. 이것은 그 사람의 저녁이다. 그 사람이 바깥 세상에서 먹고, 웃고, 누군가와 함께한 저녁의 온기가, 뿌리를 통해 여기까지 전해진 것이다.
그때 깨달았다.
나의 뿌리는 이 화분의 흙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뿌리는 그 사람 안에 있었다.
처음부터. 이 온실이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처럼, 나의 뿌리도 그 사람의 마음속에 뻗어 있었다. 그 사람이 온실에 올 때만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디에 있든 시끄러운 거리에서도, 사람들 틈에서도, 수진이라는 친구 앞에서도 나는 그 사람 안에 살아 있었다.
온실은 우리를 잇는 장소가 아니었다.
우리가 이어져 있기 때문에 나타난 장소였다.
바람이 온실 안을 돌며 풀들의 잎을 흔들었다. 나의 꽃잎도 흔들렸다. 이름 없는 색의 꽃잎이 바람에 하나 떨어져 흙 위에 내려앉았다. 슬프지 않았다. 꽃잎이 떨어지는 것은 끝이 아니라, 다음 꽃을 위한 자리를 만드는 일이니까.
나는 넝쿨을 뻗었다.
탁자 위가 아니라, 이번에는 아래로. 화분 바깥으로. 탁자 다리를 타고 내려가, 온실 바닥의 흙에 닿았다. 화분 밖의 흙은 처음이었다. 차갑고, 넓고, 낯설었다. 하지만 무섭지 않았다.
내 뿌리가 이미 더 넓은 곳에 닿아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은
일주일 뒤, 은은 유리온실을 찾았다.
골목은 나타났다. 하지만 빛이 달랐다. 예전의 이불 속 아침 햇살이 아니라, 해 질 녘 창문으로 들어오는 주황빛. 따뜻하지만, 하루를 마무리하는 빛.
온실 문을 열었다.
셀리가 거기 있었다. 하지만 셀리도 달라져 있었다. 넝쿨이 화분을 넘어 탁자를 지나 바닥까지 내려와 있었다. 온실 바닥의 흙에 새로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작은 화분에 갇혀 있던 셀리가, 온실 전체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은은 웃었다.
“너도 나왔구나.”
화분 앞에 앉았다. 셀리의 꽃을 보았다. 꽃잎 하나가 빠져 있었고, 그 자리에 새 봉오리가 올라오고 있었다. 떨어진 꽃잎은 흙 위에서 천천히 녹아들고 있었다.
은은 온실을 둘러보았다. 금이 간 유리벽. 그 금 사이로 들어오는 저녁 빛. 계절이 여러 번 바뀐 흔적이 남은 풀들. 은의 눈물을 먹고 자란 이끼들. 은의 웃음으로 핀 꽃들. 은의 침묵 속에서 단단해진 줄기들.
이 모든 것이 은이었다. 은의 감정이 만든 세계. 은이라는 사람의 계절과 날씨와 토양으로 이루어진 정원.
“셀리야.”
은이 말했다. 셀리의 잎이 은을 향해 기울었다.
“나 이제 매일 오지는 못할 것 같아.”
잎이 잠깐 멈췄다.
“바깥에서 해야 할 것들이 있어.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고, 가끔 상처받고, 가끔 웃고. 너한테 매일 눈물비를 내려줄 수는 없어.”
은이 셀리의 줄기를 손가락으로 감쌌다. 처음 씨앗에 닿았을 때처럼. 하지만 그때와는 달랐다. 떨리지 않았다.
“근데 있잖아. 오늘 알았어. 네가 여기에만 있는 게 아니더라.”
은이 가슴에 손을 얹었다.
“여기에도 있어. 내가 시끄러운 거리를 걸을 때도, 누군가 나한테 상처 주는 말을 할 때도, 혼자 밥을 먹을 때도 여기 안에 작은 온실이 있고, 거기서 네가 자라고 있어.”
은의 눈에 물기가 번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온실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 눈물이 비가 될 필요가 없었다. 은이 울어도 괜찮다는 것을 이미 아니까. 눈물은 그냥 눈물로 흘러도 되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안녕이 아니야.”
은이 웃었다. 눈물이 흐르는 채로.
“매일은 못 오지만, 가끔 올게. 비가 많이 필요한 날에. 봄이 보고 싶은 날에. 그리고 네 꽃이 보고 싶은 날에.”
셀리
그 사람이 웃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이제 안다. 이것이 그 사람의 계절이라는 것을. 비가 오는데 꽃이 피는, 모순된 계절. 슬프면서 기쁘고, 기쁘면서 아픈 계절. 이 사람만의 계절.
온실에 비는 내리지 않았다.
대신 다른 일이 일어났다. 유리벽의 금이 빛나기 시작했다.
거미줄처럼 뻗어 있던 금들이, 마치 금가루를 채워 넣은 것처럼 따뜻한 빛을 내었다. 일본에 킨츠기라는 것이 있다고 했던가. 깨진 도자기를 금으로 이어 붙이는 기술. 깨진 자리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빛나게 만드는 기술.
온실이 그것을 하고 있었다.
상처를 빛으로 바꾸고 있었다.
금빛 줄기가 유리벽 전체에 퍼지자, 온실이 환하게 빛났다. 안에서 밖으로. 이 빛은 바깥에서 들어오는 빛이 아니라, 온실 자체가 내는 빛이었다. 금이 간 모든 곳에서, 상처의 모든 자리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그 사람이 숨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는 잎을 활짝 펼쳤다. 모든 잎을. 열두 장의 잎과 한 송이의 꽃과 새로 올라온 봉오리까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펼쳐, 이 빛 안에 서 있었다.
이것이 내가 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전부였다.
하지만 전부여서 아름다웠다.
은
은은 빛나는 온실 안에 서서,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금이 간 자리가 빛나고 있었다. 은이 상처받을 때마다 생긴 금들이. 팀장의 한마디에, 수진의 한마디에,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에 생긴 금들이. 그 모든 금이 지금 이 온실에서 가장 밝은 곳이었다.
은은 이해했다. 마침내.
예민한 것은 약한 것이 아니었다.
깨지기 쉬운 것은 부서지는 것이 아니었다.
유리온실은 깨지지 않았다.
금이 갔을 뿐이다.
그리고 그 금이 지금, 빛나고 있다.
은은 셀리에게 손을 뻗었다. 셀리의 잎이 은의 손바닥 위에 올라왔다. 처음 만졌던 날처럼. 하지만 그때는 씨앗이었고 지금은 꽃이 피어 있었다. 은의 손이 떨리지 않았고, 셀리의 잎도 떨리지 않았다.
“고마워, 셀리.”
은이 말했다.
“나를 키워줘서.”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아니다. 내가 너를 키운 거지.”
또 멈췄다.
“아니, 그것도 아니다.”
은이 웃었다.
“우리가 서로를 키운 거다.”
은은 온실 문을 열고 나왔다. 뒤를 돌아보았다. 골목 끝에 유리온실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작고, 투명하고, 금이 가 있고, 그래서 아름다운 온실.
골목을 빠져나왔다.
세탁소 앞을 지났다. 할머니가 셔터를 내리고 계셨다. 꽃집의 불은 이미 꺼져 있었다. 은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번에는 골목이 사라져도 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거기 있든 없든, 은의 안에 온실이 있으니까.
거리를 걸었다. 이어폰 없이. 도시의 소리가 밀려왔다. 시끄럽고, 복잡하고, 때로는 아픈 소리들.
하지만 그 소리들 사이에서, 은은 아주 작은 소리 하나를 들었다.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 자라는 소리.
바스락도 아니고, 사각도 아닌.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소리.
은은 그날 밤 집에 돌아와 창가의 컵을 들었다. 물을 버리고, 컵을 찬장에 넣었다. 더 이상 물을 채워두지 않아도 되었다. 은의 안에 이미 비가 있고, 햇살이 있고, 계절이 있고, 작은 정원이 있었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유리온실이 떠올랐다. 처음 발견한 날의 빛. 비 내리던 날의 따뜻함. 금이 간 날의 두려움. 계절이 바뀌던 날의 경이. 셀리가 꽃을 피운 날의 벅참. 그리고 오늘, 금이 빛나던 순간.
은은 미소를 지으며 잠이 들었다.
내일은 어떤 계절일까, 하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어떤 계절이든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끝
“유리온실은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당신 안에 있는, 가장 조용하고 가장 따뜻한 방이었습니다.
거기서 당신의 셀리가 자라고 있습니다.
당신이 느끼는 모든 것을 먹고,
당신만의 색으로 꽃을 피우며,
오늘도.
— 유리온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