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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확행 Feb 01. 2024

나는 선량한 척하는 차별주의자였다

'모름지기'라는 편견에 똘똘 싸여있는

지난주 금요일 . 이웃의 초대를 받아 와인 한잔하고 남편과 함께 집까지 걸어서 왔다. 꽤 추웠지만 5km 정도는 걸어가도 될 것 같은 용기가 샘솟는 기온이었다. 늘 다이어트 중인 남편을 앞세워 집까지 걸어가자 했다. 겨울 날씨가 정 없이 매섭기만 한 건 아니었다. 미세먼지 없는 겨울밤 공기가 폐부 깊숙한 곳에 닿자 쾌감이 느껴졌다.




큰길을 건너 쇼핑몰 쪽으로 걸어가니 맞은편에 고등학생 커플들이 삼삼오오 걸어왔다. 젊은이들의 사랑은 뜨겁고 애달프다. 서로 맞닿은 어깨와 고개 사이로 차가운 바람 한 줄기 들어갈 틈이 없다.
“우리 아들들이 여자친구랑 이 시간에 저렇게 돌아다닌다면 난 어떻게 받아 들어야 할까?”
혼자서 갑자기 심각해진 남편이다.
“받아들이긴 뭘 어떻게 받아들여! 아이가 여자친구 생겼다고 당신한테 말해 주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야. 여자 친구 사귀게 되면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당신 카드 준다며?”

“아니, 점심 맛있는 거 먹 내가 좀 도와줄 수 있지”
아들의 미래 데이트를 ‘주간 모드’로 만 상상해 본 남편임이 틀림없다.



열정적인 사랑을 숨길 수 없는 다른 고등학생 커플이 우리 부부 곁을 지나갔다. 남편이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며 혼잣말로 한 소리 할 것 같아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딱 봐도 이제 학원 마치고 나와서 한숨 돌리며 서로 만난 것 같은데. 거 좀 따뜻하게 봐 줍시다. 날도 추운데.”
사실 나도 그 젊은 커플의 뜨거운 스킨십에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순간 당황했지만 말없이 지나가는 행인 역할에 재빨리 몰입했다.


나는 왜 누가 봐도 고등학생인 그 젊은 커플의 스킨십에 당황해했을까?
사랑하는 사이이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그런 눈빛과 몸짓이었는데 말이다.



그들의 나이와 사회적 지위가 ‘연애’와는 적합하지 않아서?
여기는 대한민국이니까?
자유로운 외국이 아니라서?
대한민국 열아홉 고3은 가급적 연애를 안 해야 하는가?
모든 열아홉 고3은 대입을 준비하는 것인가?

그럼 스무 살 재수생은 학원 갔다 오는 길에 여자친구랑 길거리에서 뽀뽀해도 괜찮은가?
학교에 안 다니는 열아홉의 연애는 자유로워도 괜찮은 것인가?

건전의 기준은 무엇인가?

손만 잡으면 괜찮은가?

가벼운 뽀뽀 까지는 괜찮은가?

뜨거운 키스는 안 되는 것인가?

@Unspalsh

여자친구 손을 호호 불어주던 남학생을 보면서 나는 순수하게 그를 멋있다고 생각했나?

아니다. 저녁 간식 챙기면서 하루 종일 공부하느라 고생하는 아들을 기다리는 그 학생의 엄마가 떠올랐다.

남자 친구 팔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그 여학생을 나는 순수하게 귀엽다고 느꼈나?

아니다. 이 추운 날씨에 바지라도 따뜻하게 입고 다니지 하며 매끈하게 드러난 여학생의 다리에 시선이 멈추었다.



모름지기 학생이라면 단정하게 옷을 입고 다녀야 하고

모름지기 학생이라면 건전하게 이성 교제를 해야 하고

모름지기 고3 수험생이라면 하던 연애도 그만두고 학업에 매진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풀어내기도 힘들 만큼 꽁꽁 싸인 나의 편견과 고정관념들.



나는 왜 그들의 사랑 앞에서 나 혼자 민망해하며 고개를 돌렸을까? ‘모름지기 학생이라면’이라는 나의 편견이 그 짧은 그 십몇 초 동안 적나라게 드러났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들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지극히 왜곡되고 나아가 폭력적이었음을 깨닫자, 걷잡을 수 없는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그 순간 내가 할 일은 그저 그들을 지나치는 것뿐이었데. 



부끄럽지 않은 어른, 나아가 조금은 괜찮은 어른이 되고 싶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고민하고 생각했던 시간들. 그 순간 그것들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다만 깨달았을 뿐. 남의 집 귀한 자식들을 괜히 내 머릿속에서 싸잡아 나쁜 사람 만들어버린, 나는 선량한 척하는 차별주의자였다.  '모름지기 학생이라면'이라는 편견에 똘똘 여있는.

쇼핑몰 앞 여성 조형물 치마밑을 힐끗 쳐다보는 것보다 더 민망한 내 지금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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