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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박탄호 Oct 30. 2022

일본의 작은 마을, 오이타현 분고타카다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던 날, 분고 타카다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던 날, 오이타현 분고타케다(豊後竹田)


남의 돈 벌어 먹고 살고자 나를 지우고, 매일같이 고개를 조아리고, 내가 맞는  상황에도 스스로를 다그치고. 이처럼 수 없이 나를 태워 받은 월급으로 입고 먹고 사다 보면 배는 부른데 정작 마음이 허해질 때가 있다. 다 함께 사는 세상 모나지 말고 둥글둥글하게 살자며 세상에 나를 맞추는 사이 내가 누구인지 헷갈리게 되는 순간도 온다. 지난 주가 그러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연가 포함 총 4일의 휴가를 얻었다. 그런 다음 이 세상 모든 불행 소스를 다 때려 넣은 듯한 일상을 피해 오이타(大分) 행 전차에 탑승했다. 

'오이타현 ,,,' 

2012년 4월, 오이타 대학 교환학생으로 일본 생활에 발 디딘 이래, 오이타 현은 마음의 안식처와 같았다. 행복한 추억이 남은 그곳에는 내가 언제 어디서 무얼 하든 지지해 주는 지인들이 있었다. 그러니 마음 둘 곳 없어 버거운 날에는 으레 오이타를 그렸다. 따라서 더 이상 도망칠 곳 없는 지금 순간 꿈에 그리던 안식처에 가기로 했다. 다만, 지인들에게 나의 힘듦을 전가하고 싶지 않아 그 누구에게도 연락은 하지 않았다. 밤이슬 피해 초가 아래에 몸을 숨긴 나그네 마냥 오이타 역 근처 허름한 호텔에서 하룻 밤 묵은 후 인근 마을로 이동하기로 했다. 

‘이번 정거장은 이 차의 종점, 오이타, 오이타입니다. 내리실 문은…’

안내 방송과 함께 2시간가량 달리던 전차가 멈췄다. 차에서 내려 시내 방면 역전 광장으로 나오자 그리운 풍경이 등장했다. 파란 시내버스와 큼직한 야자수, 시내 중심가 대로 양쪽으로 우뚝 선 높은 빌딩 숲. 변함없는 익숙함에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마음이 가벼워지니 허기가 졌다. 학창 시절에 종종 들른 우동 집에서 배가 터질 때까지 면발을 빨아들였고, 늦은 밤까지 낯 익은 거리를 누볐다. 옛 시절을 추억하는 게 좋은 건지, 추억이 남은 거리를 걷는 게 좋은 건지 이 내 마음 알 길 없으나 오래간만에 근심을 던 것 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다음 날, 호텔을 나와 오이타 역 5번 승강장으로 이동했다. 교환학생 시절, 학교로 가던 2량짜리 전차에 탑승했다. 한결같은 객차 안에서 중국인 친구 옷상, 토노, 라 레이시와 수다를 떨고, 룸메이트 조던, 마리오와 장난치던 시절을 추억했다. 


하나 둘, 빛 바랜 기억을 더듬는 동안 기차는 열심히 달렸다. 크고 작은 역사 11개를 지나 종점인 분고타케다(豊後竹田)역에 도착했다. 철 지난 봉제 인형과 대나무 장식이 줄지은 플랫폼에는 일본의 국민 가곡 ‘황성의 달’이 울러 퍼졌다. 구슬픈 선율을 뒤로한 채 관광 안내소가 있는 대합실에 들어갔다. 

낡은 의자 몇 개와 자판기, 관광 자료가 자리한 실내 한 쪽에서는 고양이 역장 ‘냐’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주변에서 ‘카와이이’(귀여워!!) 하고 함성을 지르든 말 듯 아랑곳 않고 잠만 자는 이 녀석은 올해로 13세가량의 암컷이다. 안내소 직원의 설명에 따르면 나이 탓에 최근에는 잠자는 시간이 늘었다고 한다. 

‘냐’가 고양이 역장으로 취임한 데는 구마모토 대지진과 관련한다. 2016년, 인근 구마모토에서 대지진이 발생하면서 구마모토와 분고타케다를 잇는 철길이 유실됐다. 그 결과 전년 대비 관광객이 80%가량 감소했다. 


이에 관광 부흥 차원에서 역 주변에서 생활하던 고양이 ‘냐’를 관광 안내 소장으로 임명, 고양이가 관광 안내 소장으로 취임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이를 구경하기 위해 여행객이 마을에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이듬해 2018년 4월, JR 서일본은 ‘냐’를 고양이 역장으로 정식 임명했다. 

곤히 자는 녀석을 뒤로하고 역사를 나섰다. 역 맞은편으로는 긴 강이 흘렀고 그 사이로 마을을 잇는 다리가 우뚝 섰다. 다리 뒤편으로는 옛 주택과 상가 등이 조밀하게 모인 마을이 보였다. 

‘우와, 반갑다. 5년 만에 다시 만나네.’ 

인구 2만이 사는 이 산악 동네는 넉넉한 시골 인심이 남은 성하 마을과 황성 옛 터를 상기하는 오카 산성(岡山城), 20세기, 일본의 국민 작곡가로 칭송받는 타키 렌타로(滝廉太郎)와 가톨릭 신자들의 아픔 등 여러 발자취가 남았다. 





마을 초입에 자리한 우체국 맞은편으로는 오늘 하루 신세 질 호스텔 CUE가 있었다. 100년 넘은 민가를 개조한 호스텔에 잠시 들러 짐을 맡긴 다음 거리로 나섰다. 

고무신을 신은 빡빡머리 사내아이가 함성을 지르며 뛰어다닐 법한 거리에는 고즈넉한 전통 상가 건물들이 길게 늘어섰다. 그리고 각 상점 진열대에는 흰 얼굴에 빨간 기모노를 입은 듯한 오뚝이 인형이 전시되어 있었다. 마을의 상징이자 명물인 히메다루마(姫ダルマ)다. 

태양을 상징하는 마름모꼴 머리에 얼굴 주변으로 송죽매(松竹梅) 그림이, 등 뒤로는 액막이 구술을 그려 넣은 이 인형은 17세기 중반에 등장했다. 


아야죠(綾女)라고 하는 하급무사 집안 여성을 모델로 한 인형은 액막이 역할은 물론이고 가게에는 번영을, 가정에는 평안을 가져다준다. 1920년까지 마을에는 이 인형과 관련한 전통 행사인 나게코미(投げ込み)가 존재했다. 새해 첫날, 청년들이 마을을 돌며, 공방에서 생산한 히메다루마를 각 가정에 전달하는데 이후 새 인형을 받은 주민들은 기존에 집에 뒀던 작년 자 인형을 태워 새해 대운과 평안을 기원했다. 그러나, 2차 세계 대전 이후 히메다루마를 생산하는 공방이 사라지면서 나게코미 행사도 중단됐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고토 쓰네토(後藤恒人)씨는 1952년, 마을 외각에 공방을 열어 히메 다루마를 생산. 이후 그의 며느리가 가업을 물려받으며 지금은 3대째 ‘마을 유일의 히메다루마 공방’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또한 공방이 생기면서 나게코미 행사도 부활했고 이후 많은 주민들이 인형과 함께 새해 행복을 기원 중이다. 

이렇듯 마을의 상징인 히메다루마. 하지만 생산까지 16개의 공정을 거쳐야 하는 탓에 완성까지 약 1년이 걸린다고 한다. 때문에 인형을 사려는 사람들은 1년 6개월 전부터 예약 주문을 한다. 

*20cm-50cm 까지 크기에 따라 5개 종류가 있으며 크기에 따라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오래된 목욕탕을 식당으로 

히메 다루마가 즐비한 거리 한 쪽으로는 하얀 색상의 전통 창고가 줄지어 섰다. 그 사이로 난 작은 골목 틈틈이 선 가게 앞을 히메 다루마가 지키는 가운데 골목 끄트머리에서 발길을 멈췄다. 아트 카페 오오구라 기요미즈유(アートカフェ大蔵清水)다.



에도 시대, 쌀 창고였던 건물을 1950년도부터 78년까지 목욕탕으로 쓴 이곳에는 오늘날 청과물 가게와 카페가 입점했다. 실내로 들어가자 한 쪽으로는 목욕탕 인테리어가 남은 한편, 그 주변으로 주인장의 개성이 묻은 잡화와 장식이 자리했다. 


첫 손님 오셨다며 반갑게 맞이하는 아주머니의 안내로 가게 구석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보 위로 주전자와 꽃병이 앉은 목재 테이블에서 메뉴판을 열어 季節の小鉢セット(키세쯔노 코바치 세트=계절 사발 세트、1500엔)라고 하는 정식을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는 동안, 가만히 앉아 있기가 지루해서 아주머니의 허락을 얻어 가게 곳곳을 살폈다. 1층에는 세월이 묻은 장식품과 책자, 개성 있는 미술품이 남았고 삐걱대는 계단을 타고 올라간 2층에는 여러 그림이 걸려 있었다. 

미술의 ‘미’자도 모르면서 감정사라도 된 것 마냥 상세히 살폈다. 이 그림은 색채가 진하네, 저 그림은 개성이 짙네. 감정사 놀이를 하는 사이 음식이 나왔다. 주인 내외가 카페 옆 청과물 가게를 운영하는 덕에 양질의 지역 식재료를 쓴 음식은 신선하면서도 담백했다. 

개성 있는 소스를 버무린 산나물을 씹으면서 ‘이 정도 신선함이라면 채식주의자도 가능하겠다.’ 라 생각하는 동시에, 두부를 비롯한 다른 음식들도 무서운 속도로 해치웠다. 1,500엔이 아깝지 않은 맛이었다. 

식사를 끝내자 아주머니가 오셔서 언제 어디서 왔는지, 얼마나 묵을 건지 등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데 큰 DSLR 카메라를 들고 있길래 취재 나온 카메라 맨인 줄 알아서 몹시 반가웠단다. 물론, 카메라 맨이 아니어도 여전히 반갑고 고맙다며 농담을 건내는 그녀와 이후로도 한참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눈 후 가게를 나섰다. 


 

일본의 국민 작곡가 타키 렌타로 

식당을 나와 오른쪽으로 몸을 틀어 10보 걸은 다음 또 한 차례 우측으로 몸을 돌리자 가파른 계단을 업은 언덕이 나왔다. 그곳에는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았다고 하는 십 육 나한의 동상이 우뚝 섰다. 

예로부터 분고타케다에는 불교 사원이 즐비했는데, 오늘날에도 편의점 보다 사찰 수가 많을 정도다. 때문에 이곳을 천년의 불교 고장이라고도 부른다. 


십육 나한 뒤로는 원통각이라고 하는 중국풍 문이 있다. 1784년에 건립한 건물은 아이젠도(愛染堂)라는 사원의 북문으로 오카성(岡城) 18대 영주 나카가와 히사사다(中川久貞)가 번교(영지 내 제후 가문 자제를 가르치던 교육 시설)의 유학자인 카라하시 쿤잔(唐橋君山)을 위해 지었다. 카라하시 쿤잔은 영주의 명령으로 『분고국사』(분고타케다의 지리, 역사, 문화, 특산물 등을 한문으로 기록한 서적) 편찬에 나섰으나 도중에 병사, 이후 그의 제자인 타노무라 치쿠덴(田能村竹田)이 편찬을 끝냈다. 

이색적인 양식을 입은 문을 구경하고자 경사진 계단을 밟았다. 종아리가 딱딱 해졌고 이마에는 송글 송글 구슬땀이 맺혔다. 숨을 가다듬고자 깊게 숨을 내쉰 후 나머지 계단을 밟아 문 앞에 섰다. 문을 둘러싼 언덕 곳곳으로 울긋불긋 낙엽이 낭만을 그린 가운데 평온한 풍경이 펼쳐졌다. 문 벽에 기댄 채 멍 하니 대자연을 감상했다. 




짧은 휴식 후 앞서 즈려 밟은 계단을 타고 내려가 마을로 들어갔다. 단풍이 내려앉은 보도를 따라 2분 정도 걷자 카페 하나가 등장했다. 200년의 역사를 품은 오캬쿠야시키(御客屋敷)를 개조한 게쇼로우(月鐘楼)다. 

오카성(岡城)영주의 영빈관(영주의 손님을 맞이하는 곳)으로 탄생한 이 건물은 마을이 자랑하는 유서 깊은 유적이다. 옛 관청을 상기하는 정문 뒤로 세월이 묻은 목조 건물이 우뚝 선 풍경이 마음에 들어서 실내에 들어가 정원과 마주한 창가 자리에 앉았다. 





인근 쿠주고원(久住高原・오이타 현에 소재한 고원)에서 로스팅(커피 원두를 볶음)한 원두커피 한 잔에 달달한 디저트, 잔잔한 음악과 고즈넉한 실내가 자아낸 분위기를 벗 삼아 30분가량 신선 놀음했다. 





이후 골목 몇 개를 더 돌아 100여 년 전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건축물 앞에 멈췄다. 일본의 국민 작곡가로 칭송받는 타키 렌타로(滝廉太郎)의 생가다. 23세,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 작곡가는 살아생전 여러 가곡을 남겼다. 그중 ‘황성의 달’은 일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가곡 중 하나다. 

1879년 도쿄에서 태어난 그는 4살 되던 해, 공무원인 아버지를 따라 분고타케다로 이주. 8년간 동네 곳곳을 쏘다니며 추억을 남겼다. 특히 마을 뒤편에 위치한 오카성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이후 성과 함께 한 유년 시절을 토대로 한 가곡이 ‘황성의 달’이었다. 


황성의 달은 당시 무분별한 서구 문화 수용으로 정체성을 잃은 일본 음악계에 반향을 일으켰다. 서양적 선율에 맞지 않는 일본적 가사를 붙여 부조화를 낳던 시기, 타키 렌타로는 독일 유학 때 익힌 서양적 가치에 일본 고유의 정서를 적절히 조화한 일본식 가곡을 작곡, 대중의 심금을 울렸다. 


한편 생가 근처로는 그가 살아생전 작곡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렌타로 터널이라고 해서 사람이 지나면 타키 렌타로가 만든 음악들이 흘러나오는 곳. 어두컴컴한 터널을 서 너 번 오가며 구슬픈 선율에 귀 기울였다. 


 성하 마을과 오카성 

터널을 지나 성하 마을로 향하는 길, 완만한 계단을 지나 새소리 지적이는 오솔길로 들어가자 낡은 가옥 한 채가 등장했다. 구 타케다장(旧竹田荘)이라 부르는 건물은 마을에 남은 무사 저택 중 유일하게 공개한 곳으로 앞서 언급한 『분고국서』를 편찬한 문인, 타노무라 치쿠덴(田能村竹田)의 거처다.


오카성(岡城)영주의 주치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살아생전 여러 글과 그림을 남겼다. 특히 세밀한 붓질이 자아낸 섬세한 화풍은 당대 여러 사람들에게 주목받았던 모양이다. 많은 이들이 그의 그림을 개인 소장했고 지금도 작품 300여 점이 도쿄 이데미쓰 미술관(出光美術館)을 비롯해 오이타 미술관, 다케다 역사 자료관 등 전국 각지에 전시되어 있다. 

이렇듯 한 시대를 풍미한 예술가의 발자취가 서린 구 다케다장을 지나 1분 정도 더 걷자 노란 색채가 묻은 흙담과 조화를 이룬 전통 가옥이 즐비한 거리가 등장했다. 에도 시대, 오카성의 무사들이 살던 성하 마을이다. 



1594년, 오카 성 초대 영주인 나카가와 히데시게(中川秀成)가 성 증축과 함께 조성한 마을 어귀에는 역사를 알리는 전시장이나 연회장으로 활용하는 다케다 창생관이 있다. 

그 뒤로는 마을 홍보 영상에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는 나가야몬(長屋門)이 우뚝 섰다. 1847년에 완공한 요시다 가문 저택의 정문 역할을 한 문 옆으로는 위로 올라갈수록 넓어지는 흙벽이 길게 늘어졌다. 일명 ‘촛불형 벽’(ろうそく型)이라 부르는 흙벽은 위아래가 같은 부피로 구성한 벽이 대다수인 일본 내에서 발견하기 힘든 매우 희소한 역사 자산이다. 




세월의 손때를 탄 벽 앞에서 셔터를 눌렀다. 그때, 앞에서 걸어오던 초등학생들이 환한 웃음으로 인사를 건넸다. 

‘곤니치와’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어 ‘곤니치와’하고 웃어줬더니 고사리 같은 손을 흔들어 나를 반겼다. 한때 규슈의 난공불락으로 이름 떨치며 지역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중심지 역할을 하던 마을은 오늘날,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주민들의 따듯한 인심으로 가득했다. 

짧은 마주침에서 얻은 기쁨이 추진력이 되었는지 발걸음에 힘이 실렸다. 근처 신사 계단에서 체력 운동 중인 고등학생 무리와 또 한차례 인사를 나눈 후 마을 뒤편으로 난 산길을 따라 15분 정도 걸었다. 온몸에서 땀이 나고 숨이 거칠어질 무렵, 오카 산성 안내소가 등장했다. 








주머니에 들어 있던 동전을 꺼내 입장료를 치르자 직원이 두루마리 서류 같은 걸 건넸다. 입장권이었다. 옛 사신들이 들고 다닐 법한 두루마기 서류를 받으니 성에 방문하는 사절단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설레는 감정을 안고 험준한 산성으로 향하는데 산 아래 502번 국도 상행 차선에서 구슬픈 선율이 울러 퍼졌다. 

이는 자동차 바퀴가 아스팔트에 닿으면 타키렌타로의 황성의 달이 흐르도록 한 장치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한 손에 두루마기 서신을 든 채 저 멀리서 흘러오는 아득한 음악을 귀에 담으며 성을 오르는 순간. 생애 처음 만난 미묘한 기분과 마주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난공불락 오카 산성 

동서 2.5km, 남북으로 길게 뻗은 오카성은 규슈 지역에서 보기 드문 산성 구조다. 1185년 오카다 고레요시가 지금 이곳에 요새를 지은 후 1331년, 시가 사다모토가 이를 확정해 오카 산성이라 이름 붙였다. 다만 이때까지만 해도 산지를 활용해 쌓은 대략의 성곽 수준이었다. 그러던 것이 1594년, 앞서 소개한 나카가와 히데시게가 3년간 큰 돌로 성벽을 쌓고 천수각을 세우는 등 대규모 공사에 착수한 끝에 난공불락으로 떠올랐다. 


 큼직한 성곽은 적이 쳐들어오다 지쳐서 ‘에라, 너네끼리 잘 먹고 잘 살아라.’ 라 푸념하며 돌아갈 정도로 산악지대에 꽁꽁 숨었다.. 실제로 축성 이후로 적의 침략을 받은 적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1771년, 천수각이 있던 혼마루와 니시마루, 사당 등 성을 구성하던 건축물 대부분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큰돈을 들여 혼마루와 여러 장치를 재건하는 데 성공했지만 1874년, ‘한 지역(현、県)에 성 하나만 남기고 다 없애도록 하라.’라고 하는 폐성령으로 천수각을 비롯한 성내 구조물이 철거되며 성벽만 남았다. 

그럼에도 성을 둘러싼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제주도 올레길을 벤치마킹 한 규슈 올레 코스로 화제를 모으며 많은 등산객이 들렀고, 이들이 즈려 밟은 단풍이 자아낸 가을 풍경이 크고 작은 성벽을 포옹했기 때문이었다. 






꿈과 희망을 실은 빵집 겸 게스트 하우스 CUE 

1시간 30분에 걸쳐 성을 둘러본 후 마을로 내려왔다. 7시에도 환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6시만 지나도 어두컴컴해지는 것이 가을을 직감하게 한다. 허기를 채울 겸, 마을 중앙에 자리한 조그만 정식 집에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이후 게스트 하우스 CUE에 들어가 체크인을 했다. 




하루 종일 마을 곳곳을 쏘다녔더니 적잖은 땀을 흘려서 대충 옷을 갈아입은 후 역 근처에 자리한 대중 온천 다케다 온천 하나미즈키(竹田温泉花水月)에 들렀다. 큼직한 외관을 자랑하는 이 온천은 일과를 끝낸 마을 사람들이 들러 피로를 씻어내는 대중목욕탕에 가깝다. 돈을 내고 탈의실에서 옷을 벗은 후 온천에 들어가 주민들 틈에서 피로를 풀었다. 그때,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들어왔다. 


강산이 한 번 바뀌고도 남을 정도로 일본에 살았으면 적응할 법도 한 데 다른 성별이 목욕탕에 들어와 청소를 하는 모습을 보면 여전히 당혹스럽다. 그렇다 해서 티를 내면 상대방에게 실례이니 최대한 침착한 척 몸을 씻고 우유를 마셨다. 

매끈한 온천수로 몸을 씻고 나오자 한결 가벼워졌다. 어두컴컴한 거리를 걸어 호스텔에 다다르자 실내에서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들렸다. 호스텔 주인장인 타카오씨가 다른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를 피해 슬며시 들어가려는데 타카오씨가 말을 걸었다. ‘파쿠상, 온천에 다녀오셨나 봐요. 타케다는 이번이 처음이세요?’

앞서 본인을 ‘타카’라 소개한 타카오씨는 정감 많은 사람이었다. 나긋나긋한 말투에 사람 좋은 얼굴을 한 그는 빵 하나를 건네더니 옆자리를 내줬다. 상대방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어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글 쓰는 일을 한다는 내 소개에 거리낌 없이 당신 이야기를 꺼냈다. 몇 해 전만 해도 그는 도쿄 근처 치바(千葉)에 살던 직장인이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부터 여행을 좋아해서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고, 그러던 어느 날 오키나와의 어느 작은 섬에서 아내 사쿠라 씨와 만나 결혼에 골인했다. 

한편 연애 시절부터 ‘게스트 하우스를 열고 싶다.’라는 꿈을 나눈 부부는 결혼 후 꿈을 실현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하나 둘 정보를 수집하던 중 지역 부흥 협력체(地域おこし協力隊)라고 하는 단체를 발견했다. 노령화와 산업화로 존폐 위기에 처한 지역 사회 부흥에 앞장서는 협력대는 지역 재생에 관심 있는 젊은이들을 모집, 이후 여러 교육을 거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지역에 3년간 파견하는 일을 진행했다. 

2014년, 부부는 협력대의 일원으로서 연고도 없는 분고 타케다에 이주했다. 이후 이들은 지역 이주 도우미 및 마을 재생 사업, 주민 평생 교육 사업 등에 종사하며 지역 활성화에 힘썼다. 그리고 지역 부흥 협력대 임기 만료를 앞둔 2016년, 주변 지인과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게스트하우스 오픈을 준비했다. 

이들은 역 근처 낡은 민가 건물(당시 화장품 가게)을 리뉴얼, 게스트 하우스뿐만 아니라 빵집, 카페, 잡화점 등 지역 주민들이 모여 소통할 수 있는 공간 창출을 도모했다. 

이를 위해 그간 모은 돈과 은행 융자를 한 데 모은 한편, 펀딩 프로젝트도 실시했다 여기에 여러 건축 봉사자들과 지인 200여 명의 협력을 더해 게스트하우스를 완공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80년 넘은 민가를 리노베이션 한 복합 시설 CUE였다. 



환한 미소로 담담히 지난 시절을 이야기하지만 그에게도 분명 힘든 일이 있었을 터. 그러나 직접 물어보는 게 송구스러워 살짝 질문을 틀었다. 

‘마을 재생과 지역 활성화의 꿈을 갖고 협력대에 지원한 분들이 많으셨겠죠. 한데 현지에서 접한 현실과 마음에 품었던 이상에 괴리가 있어 실망한 이도 적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보통 지원자 중 어느 정도의 비율로 임기 후에도 마을에 정착하나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멋쩍은 웃음을 짓던 그가 말했다. 

‘하하, 글쎄요. 비율은 잘 모르겠어요. 지원자들의 진로는 정말 제 각각이거든요. 임기 후에도 마을에 남아 지역 활성화와 관련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따분한 시골 생활에 지루함을 느끼거나, 파쿠상이 말씀하신 대로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실망해 돌아가는 분들도 계세요. 그중에서 저는 전자에 속하고요. 

지난 시간, 어려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분고 타케다에서 만난 좋은 분들 덕분에 무사히 오늘에 이르렀어요. 저는 이 마을이 참 좋아요. 그래서 앞으로도 지금 이 자리에서 일상을 보내려고 해요. 

앞으로도 주민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웃음 넘치는 마을 만들기에 참여하는 한편 게스트 하우스 방문자들에게는 소중한 추억과 행복을 제공하고 싶다는 타카오 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 방에 돌아와 하루를 마무리했다. 


둘째 날 


다음 날, 타카오 씨가 내준 아침 식사와 갓 구운 빵, 커피 한 잔으로 아침을 열었다. 식사 후 진귀한 잡화로 가득한 로비에 앉아 책 한 권 읽은 후 게스트 하우스를 나왔다. 

‘기회가 되면 다시 올게요. 행복하세요. 타카오씨.’ 

차분한 일상이 드리운 거리 위로 따사로운 바람이 불었다, 코 끝을 건드는 솔솔 부는 바람이 향하는 길목 한 쪽에는 타케다 크리스천 자료관 MISTERIO(竹田キリシタン資料館 – MISTERIO)가 있었다. 

천 년의 역사가 남은 유구한 불교 고장이라는 명성 한편으로, 가톨릭과 관련한 유적이 남은 마을 중앙에 자리한 자료관은 ‘가톨릭 박해’라는 미명 하에 순교한 교인을 기억하기 위해 세운 곳이다. 30평 될까 말까 하는 좁은 실내에는 일본 가톨릭의 역사와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 박해 속에서도 믿음을 이어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남았다. 

 묵직한 목소리를 가진 직원 아저씨와 인사를 나눈 후 그의 설명에 귀 기울였다. 오늘날 일본 가톨릭의 성지 순례지라 하면 ‘히라도’를 꼽지만 분고 타케다에도 가톨릭교도 처형장 터를 비롯해 여러 자료와 유적이 남았다는 이야기와 함께 오래전 마을에서 발생한 사건 하나를 소개했다. 


17세기 중반, 시마바라의 난 이후로 에도 막부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국외 추방과 동시에 가톨릭 교인을 억압했다. 막부는 전국 각지에 퍼진 교인 색출을 위해 각 지역 주민들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를 새긴 목판(혹은 그림)을 밟게 했는데 이를 후미에(踏み絵)라 불렀다. 



그리고 1738년, 마을 내 다루미야(垂水屋)라고 하는 상가에서 ‘후미에’를 실시하던 중, 주민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바닥이 무너졌다. 그런데 관청 관리들이 굴러떨어진 바닥 아래에는 조그만 지하가 있었고, 거기에는 성모 마리아 상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오카 영주의 신임을 받던 다루미야의 주인은 나가사키로 압송되었다. 

오늘날에도 몇몇 상가 건물에는 이러한 지하실이 남아 있는데 이를 통해 적지 않은 주민들이 가톨릭을 믿었음을 추측한다. 아저씨의 설명이 끝난 후, 몇몇 자료를 더 둘러본 다음 자료관을 나섰다. 

이후 다카오 씨가 소개한 Chanpi라고 하는 이탈리안 요리집에서 먹음직스러운 점심 식사를 했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사는 사장님을 보며 ‘나는 무엇을 잘 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면 더 행복해질지와 같은 과제를 얻었고, 사장님의 '따스한 격려'를 받아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행복해 질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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