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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박탄호 Oct 30. 2022

일본의 작은 마을, 사가현 아리타

조선인 도공의 발자취를 찾아서 


조선인 도공의 발자취를 따라, 사가현 아리타 

아침 저녁으로 발 디딜 틈 없는 하카타 역에서 기다란 전차에 탑승 후 한차례 환승, 시골 역 몇 개를 통과해 가미 아리타 역(上有田駅)에 도착했다. 승 하차객은 커녕 역무원도 없는 무인 역에는 적막함이 가득했다. 오랜 세월에 빛 바랜 시간표와 낡은 나무 의자 몇 개가 고작인 대합실을 빠져나오자 낯익은 선율이 정적을 깼다. 역사 별도 공간에서 한일 부부가 운영하는 카페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한국 음악이었다. 

한국 드라마와 아이돌, 먹음직스러운 우리네 한식이 열도를 휩쓸었다고는 하나 인구 1만 9천에 못 미치는 작은 마을에서 우리 음악을 접하는 건 생경한 일. 그러니 평소였다면 이질감이 드는 게 당연하건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그건 지금 서 있는 이곳이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온 조선인 도공들의 발자취가 남은 아리타(有田)이기 때문이다. 





임진왜란과 피로인, 그리고 조선인 도공 


한글을 실은 선율이 흐르는 역사를 뒤로하고 역전 내리막길을 따라 걸었다. 도자기 판매장 몇 곳을 지나 굴다리를 통과하자 또 다른 도자기 판매점이 등장했고 맞은편으로 갈림길이 펼쳐졌다. 마을 중심가로 향하는 왼쪽 길 대신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완만한 언덕을 밟았다. 한 블록 두 블록 지나 인적이 끊긴 거리에 이르자 노란 돌산이 보였다. 아리타 마을 역사의 출발점인 이즈미야마(泉山)이다.

1592년, 대륙 정복이라는 헛된 야욕을 품고 조선에 침략한 일본군에 한반도 전역은 쑥대밭이 되었다. 궁궐이 불타고 농지가 황폐화했으며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으며 많은 백성들이 일본에 끌려왔다. 이렇게 이역만리, 남의 땅에 납치된 이들을 피로인이라 부른다. 

이 시기 일본에 끌려온 피로인 중에는 남부 지방에서 도자기를 굽던 장인도 상당수 포함했다. 이들은 주로 규슈 각지에 배치되었는데 이 중에는 훗날 일본 도자기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삼평’이 있었다. 

일본군에 의해 사가현에 끌려온 그는 나베시마 영주에게 ‘도공’ 지위를 보장받은 후 도자기 생산에 나섰다. 그런데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도자기의 주원료인 백토가 안 보였다. 그리하여 영주의 관할 지역을 샅샅이 뒤지다 1616년에 이르러 아리타 이즈미야마에서 백토(자석장)를 발견했다. 

이에 식솔을 이끌고 이즈미야마에서 2KM 떨어진 가미 시라가와(上白川)에 덴구다니(天狗谷)라는 가마를 건설, 도자기 생산에 매진했다. ‘백토가 출토되었다.’라는 소식을 접한 다른 도공들도 하나 둘 아리타에 이주. 도자기를 굽기 시작했다. 아무도 오지 않는 산자락에 불과했던 마을은 10여 년 만에 150곳의 공방이 모인 '도자기 월드'로 성장했다. 

비슷한 시기 중국 대륙에서는 명청 교체기로 혼란을 거듭하면서 도자기를 생산하던 경덕진도 문을 닫았다. 중국산 도자기로 큰 이문을 얻던 서양 상인들은 차선책을 찾다 일본으로 눈을 돌렸다. 때마침 조선에서 납치해 온 도공들로 생산력을 확보한 일본은 이들의 조건을 충족했기 때문이다. 이후 사가현 아리타와 이마리 일대에서는 유럽 수출용 도자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생산 초기에는 조선의 손길 그대로 유약을 두텁게 바른 청화 백자가 대세였으나 17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화려한 채색화 무늬가 들어간 도자기가 주류로 자리했다.

도공들이 만든 도자기는 근처 항구 마을인 이마리 항에서 선적, 네덜란드 상인이 머물던 나가사키 데지마로 이동해 유럽으로 향했다. 이 때문에 서양에서는 아리타 산 도자기를 이마리야키(이마리 도자기)라 불렀다. 

이렇듯 마을 형성에 시발점이 된 백토 광산 이즈미야마. 한때는 광부와 도공이 드나들며 북적거렸을 곳이 지금은 을씨년스러움만 남았다. 거친 돌산이 우뚝 선 황량한 풍경은 경험한 바 없는 도공들의 삶과 닮아 있었다. 

‘남의 땅에 끌려와 얼마나 많은 눈물을 쏟아 냈을까?. 그리움으로 원망으로 평생을 도자기만 빚다 한 줌의 재가 되어서도 이국 땅에 묻힌 그들의 넋은 어디로 갔을까?’ 

감히 헤아리기 힘든 옛 도공들의 애환을 위로하며 고개를 숙였다. 눈을 뜨고 몸을 돌려 걸어온 언덕을 따라 몇 백 보 가량 걷자 이시바 신사 (石破神社)가 나왔다. 옛 도공들이 만든 조그만 신사에는 이삼평 조각상과 고려 신이 있다. 그 모습을 살필 겸 잠시 들러 경내를 돈 다음 본격적인 마을 산책에 나섰다.

 

이삼평의, 이삼평에 의한, 이삼평을 위한 마을. 아리타 


한참을 걸어 앞서 마주친 갈림길에 당도했다. 마을 중앙으로 이어지는 2차선 도로 양쪽으로는 도자기 판매처가 줄을 이었다. 실내외로 생활 자기를 비롯해 몇 박 만 엔을 호가하는 고급 자기가 사이좋게 자리했다. 

한편 마을 도자기 판매장 뒤편 골목으로는 폐기된 노보리가마(登り窯・도자기를 굽던 가마)의 흙으로 만든 담벼락 돈바이헤이(トンバイ塀)가 이어졌다. 일찍이 아리타에서는 기술 누출을 막는 차원에서 공방과 가마는 판매장 뒤편 눈에 안 띄는 곳에 세워왔다. 

그리고 이들 공방에 있던 가마 중 수명이 다한 것을 허물어 벽(돈바리 헤이)으로 쌓아 공정 과정을 숨겼다. 흙으로 태어나 불을 머금은 채 수많은 자기를 태우고 태우다 제 몸까지 태워 흙으로 돌아간 담벼락은 모든 걸 다 내어줘도 슬프지 않았던 ‘행복한 왕자 동상’과 닮아 있었다. 




도조 이삼평을 기리며 

노란 물결이 넘실대는 돌담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자 창고 모습을 한 건물이 등장했다. 1954년, 사가현 최초의 박물관으로 등록한 아리타 도자기 미술관(有田陶磁美術館)이다. 1874년에 도자기 보관 목적으로 지은 창고를 개조한 미술관은 개관 당시, 세계에서 세 곳 밖에 없는 ‘도자기 미술관’으로 이름을 떨치며 많은 관광객을 유치했다.

눈에 안 띄는 곳에 자리한 탓에 입장객이라고는 달랑 나 혼자인 가운데 입구에는 소메쓰케 아리타 사라야마 쇼쿠닌 즈쿠리 에즈 오사라(染付有田皿山職人尽し絵図大皿)라는 도자기 예술품이 있었다. 에도 시대, 아리타의 도자기 공방 풍경을 생생히 묘사한 이 작품은 그 가치를 높이 인정받으며 여러 매체에 소개되었고, 지금은 미술관을 대표하는 존재가 되었다. 

총 2층으로 구성된 미술관 1층에는 초기 이마리 도자기를 비롯해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나타내는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2층에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만든 작품을 비롯해 중국 경덕진과 독일의 마이센요에서 만든 예술품이 있다. 

지난번 방문 때 들른, 마을 외각에 자리한 사가 현립 규슈 도자기 문화관에 비하면 아주 작은 규모라 30분가량 가볍게 훑어본 후 밖으로 나왔다. 맞은편 골목을 따라 나가자, 후다노쓰지(札の辻)삼거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도자기 상점이 밀집한 삼거리에는 관광 안내소 역할을 하는 아리타관과 이삼평을 신으로 모시는 스에야마 신사, 19세기에 완공된 서양식 건물 타지로 서양관 등 마을 역사와 관련한 굵직굵직한 명소가 남아 있다. 

먼저 마을을 굽어보는 언덕에 자리한 스에야마 신사로 향했다. 신사 맞은편으로 길게 뻗은 철로를 지나 양쪽으로 도자기 작품이 있는 가파른 계단을 오르자 자기로 만든 토리이(신사 입구에 세우는 기둥)와 조각상이 등장했다. 이들 뒤편으로는 이삼평을 모시는 사당이 남았다. 

'사람을 신으로 모시는 신사....' 

열도에 자리한 여러 신사 중 역사적 인물을 신으로 추앙하는, 그것도 조선인 출신 도공을 모시는 신사는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다. 이를 통해 이삼평이 갖는 위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가늠 가능하다. 

이렇듯 주민들은 이삼평을 신으로 추앙하는 동시에 마을 형성과 발전에 이바지한 그의 공적을 기리며 매년 5월 4일마다 도조 축제라고 하는 도자기 행사를 연다. 이때 마을 전역 도자기 상점들은 대대적으로 도자기를 판매하는 한편 다채로운 행사를 열며 이를 보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에서 관광객이 몰려들어 문전성시를 이룬다. 






한편 신사 뒷산 꼭대기에는 이삼평 탄생 300 주년을 기념하며 세운 이삼평 기념비가 있다. 신사 왼편으로 보일 듯 말 듯 난 오솔길과 언덕을 따라 5분가량 힘겹게 오른 기념비 아래로는 도자기 상점과 빨간 굴뚝이 솟은 공방, 알록달록한 민가가 옹기종기 모인 풍경이 장관을 이뤘다. 

‘오밀조밀, 참 예쁘다.’ 

잔잔한 바람이 불어 콧잔등에 맺힌 땀을 닦아주는 동안, 기념비 앞에 서서 이 땅에서 살다 간 조상님들께 마음을 담아 기도했다. 동시에 앞으로도 마을이 한반도 얼과 정신을 이어 나가기를 기원했다. 

짧은 묵념 후 삼거리에 돌아왔다. 신사 입구 옆에 있는 도자기 판매장 겸 카페 들러 커피 한 잔 마신 다음 건너편에 선 아리타 관에 들어갔다. 관광 안내소가 있는 1층에 계신 상냥한 직원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녀들의 안내를 따라 다양한 전시품이 있는 2층에 올라갔다. 조그맣게 마련된 전시관에는 눈을 휘둥그레지게 하는 가격표가 붙은 도자기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앞으로는 휴게실이 있었다. 여기서 커피를 주문하면 손님이 원하는 잔에 커피를 담아준다고 한다. 


또한 휴게실과 마주하는 전시관에서는 작은 인형극이 열린다. 옛날 옛적 마을 한쪽에 위치한 쿠로가미산에서 내려온 큰 뱀이 주민들을 괴롭히자 활의 명수인 미나모토노 타케모토가 이를 퇴치한 설화에서 비롯한 인형극이다.

극에 등장하는 모든 인형을 도자기로 만든 덕에 마을에서는 ‘세계 최초의 도자기 인형극’이라 널리 홍보하는 모양이다. ‘다만, 옛날 옛적에 괴물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괴롭혔는데 어떤 영웅이 나타나 구해줬더라.’와 같은 진부한 스토리다 보니 작품성을 갖고 가타부타 할 건 없었다. 


짧은 인형극을 끝으로 건물을 빠져 나왔다. 건물 앞으로 난 두 갈래 길 중 오른편 초입에는 서양식 건축물 한 채가 서 있었다. 

1876년, 마을을 대표하던 무역상 타지로 몬자에몬의 아들이 외국인 손님 접대와 숙박용으로 세운 이 곳은 ‘구 타지로 가문 서양관’이라 불리는데 실내에는 당시의 모습이 남은 응접실과 가구 등이 남았다. 그 주변으로 마을의 발전상을 알 수 있는 사진과 해설을 비롯해 여러 자료를 읽을 수 있는 터치 패널이 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못 지나치듯 실내에 들어가 구석구석 살핀 후 다시 이동했다. 1km 정도 걸었나? 오른 편으로 조그만 골목이 나왔다. 이를 따라가자 이삼평이 터전을 내린 것으로 알려진 덴구다니 가마터가 등장했다. 

가마터 앞에 있는 안내판 자료에 따르면 덴구다니 가마터는 산의 경사면을 활용해 만들었는데, 이를‘오름 가마’라 부르는 모양이다. 3~8m 가량의 폭에 길이는 50m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측하며 6년 주기로 가마를 교체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삼평 일가는 이곳에서 1616년부터 1650년까지 약 30년에 걸쳐 도자기를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5개의 가마를 남겼다. 한때는 도공들이 분주히 도자기를 굽고 가마 굴뚝 위로 모락모락 피어올랐을 텐데 지금은 풀과 나무만 남아 황량함만 흐르는 가마터를 뒤로하고 근처에 있는 이삼평의 묘소에 들러 한차례 묵념을 하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리타에 살다 간 사람, 아리타에 살아가는 사람

오후 2시 47분, 이삼평의 묘소를 출발해 후다노쓰지 삼거리로 돌아갔다. 거기서 길모퉁이를 돌아 아리타 역방향으로 향했다.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고, 앞서 자판기에서 뽑은 음료수 한 모금 마시는 사이 형형색색의 근대 건축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창업 140년을 자랑하는 이 지역 대표 도자기 업체, 고란샤(香蘭社)본관이다. 

일본 도자기 문화 형성에 이바지한 아리타 도자기는 해외 수출과 함께 왕실과 귀족 헌납품으로도 인기를 끌었다. 고란샤의 전신인 후카가와 에이자에몬(川栄左衛門)가문도 왕실에 도자기를 헌납하던 가문 중에 하나였다. 

한편 역대 상속자는 초대 창립자인 후카가와 에이자에몬의 이름을 물려받아 2대, 3대, 4대 후카가와 에이자에몬으로 살았다. 그런 가운데 19후반, 8대 후카가와 에이자에몬은 거친 근대화의 물결에 맞서 아리타 도자기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에도 시대, 아리타에서 생산한 수출용 도자기는 이마리에서 선적해 네덜란드 데지마로 옮겼다. 그런데 사가 영주(오늘날의 사가현 일대를 다스림)의 방침에 따라 아리타 도자기의 무역권은 ‘다지로 가문’이 독점하고 있었다. 이에 1868년, 8대 후카가와 에이자에몬은 목숨을 걸고 사가현에 무역권 확대를 간청하였고, 이후 해외에 도자기를 수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았다. 

이윽ㄱ 1876년에는, 미국 필라델피아 만국 박람회에 출품하기 위해 지역 내 유력 자본가, 도자기 공방 업주와 힘을 모아 일본 최초의 법인 회사인 고란샤를 설립, 박람회 출품을 통해 아리타 도자기를 미국에 수출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이 밖에도 양질의 전신주 애자(전기를 절연하기 위해 필요한 기구)를 개발해 전기 보급에 이바지했다. 이렇게 일본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사이 고란샤는 ‘고급 자기’로서의 입지를 확실히 다졌고, 오늘날에도 일본을 대표하는 도자기 회사로 손 꼽힌다. 

이를 증명하듯 본사 1층 판매장에는 많은 손님이 고가의 자기를 고르고 있었고, 2층에 마련된 미술관에는 도공들이 빚은 고급 자기를 보려는 구경꾼으로 가득했다. 이들 틈에서 도자기 몇 점을 살핀 후 다도 세트 한 점을 구입했다.  

계산 후 고란샤를 나와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경사 길을 따라 내려갔다. 그 수가 너무 많은 나머지 이제는 감흥조차 사라진 도자기 판매장 풍경을 지나 소소한 외관이 있는 건물로 시선이 갔다. 후치가미 도자기 판매점 옆에 자리한 Café da ILHA다. 

입구로 조그맣게 마련된 테라스를 통과해 문을 열자 은은한 커피향과 캐주얼한 장식, 노란 조명이 어우러진 풍경이 나타났다. 평안함을 주는 선율이 울리는 가운데 실내 오른 편 조리실에는 카페 사장이자 후치가미 도자기의 바이어인 후치노가미(ノ上)씨가 커피 원두를 꺼내고 있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눈 후 음료수와 디저트를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기까지 가만히 앉아 있자니 괜히 어색했다. 대한민국에서 셋째 가라면 서러울 낯 가림쟁이가 무슨 용기가 났는지 먼저 말을 걸었다. 

‘2015년 여름에는 본 적이 없는데 새로 오픈하셨나 봐요? 지나가는데 외관이 너무 예뻐서 들어왔어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저희가 2015년 11월에 문을 열었어요. 아리타 최초의 카페 겸 호스텔이랍니다. 그런데 아리타에는 어떻게 오셨어요?’ 

선한 인상에 진한 콧수염, 단정히 다듬은 헤어스타일이 인상적인 후치노가미씨가 환한 미소로 대화를 받아줬다. 

여행 겸 취재하러 왔어요. 이 근처 백파선 갤러리와 오래된 도자기 공방 몇 곳을 취재할 예정이거든요. 

아, 취재요? 혹시 라이터(기자) 분이세요?

기자는 아니고 그냥 취미로 책 쓰는 일을 합니다..’ 

그러시구나, 가끔 잡지사나 여행 기자분들께서 저희 가게에 들러 주시기는 하는데 작가시라니. 신기하네요.’ 


유명한 작가는 아니고요. 작가라 칭하기도 부끄러울 정도의 무명이에요.’ 

에이, 글 쓰고 책을 내면 작가님이시죠.’ 

인사치레로 끝내도 될 법한 대화임에도 세심히 귀 기울이며 공감하고, 여러 질문에 답해주는 후치노가미 씨 덕에 예상치 못한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다. 

한 시간 넘어 접한 그의 이야기는 꽤 흥미로웠다. 아리타 토박이인 그는 성인이 되어 후쿠오카로 이주, 여러 일을 경험하다 어학연수를 위해 오스트레일리아에 건너갔다고 한다. 그곳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는 한편, 다양한 경험을 했는데 도시 곳곳에 뿌리내린 카페 겸 호스텔 문화가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마을 주민과 여행자들이 어우러져 이야기를 나누고 일상을 공유하는, 그리하여 현지에서 좋은 추억이 생긴 여행자들이 재방문 하는 풍경을 보면서 ‘고향 아리타에도 카페 겸 호스텔이 생기면 좋겠다.’생각했단다. 

그리하여 어학연수를 마치고 일본에 돌아와 카페 겸 호스텔 개업 준비에 착수했다. 그간 모은 돈으로 200년 된 민가와 창고를 개조해,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룬 공간 창출에 성공했다. 

인스타그램에서 볼 법한 ‘인테리어가 예쁜 카페’에 걸맞은 실내 분위기는 물론이고 맛 좋은 커피와 디저트, 지역에서 재배한 신토불이 유기농 제품으로 만든 음식이 있는 카페는 매일 고정 현지 손님이 찾는다. 주말에는 여행객들도 많이 들른다. 또한 아득한 다락방에 전통을 입힌 호스텔은 몇 달 전부터 예약을 해야 할 정도로 인기라고 한다. 

저는 아리타가 여타 지역과 견주어도 모자람 없는 마을이라 생각해요. 도자기 굽는 공방과 판매점이 어우러지고, 운치 있는 건축물도 많으며 마을 곳곳에 밝은 미소가 살아 숨 쉬거든요. 아리타에 방문하는 여행자분들에게 이러한 매력을 전하고 싶어요.’ 

수줍은 미소로 마을을 향한 애정을 드러내는 후치노가미 씨의 행복을 기원함과 동시에 다음 방문 때는 꼭 Hostel da ILHA에 묵겠다 약속하며 가게를 나왔다. 

오후 6시, 예상치 않게 1시간 넘게 카페에 머물렀더니 어느덧 해가 저만치 기울었다. 발걸음을 재촉해 아리타 도자기 단지 아리타 세라(アリタセラ)에 있는 마을 최초의 호텔 아리타 하우스(arita huis)로 이동했다. 

언덕 위 양지 위로 넓게 앉은 단지 중앙에 우뚝 솟은 호텔은 건축 잡지에서 볼 법한 세련된 모습을 지녔다. 흰 블록 몇 개를 쌓은 듯한 외관 중앙으로는 따듯한 조명과 부드러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2018년에 오픈한 호텔은 객실 11개와 48개의 좌석을 갖춘 카페가 결합한 복합 시설이다. 아리타 도자기의 융성에 큰 역할을 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의 역사적 배경과 아리타 도자기 400년 사업을 계기로 보다 깊은 네덜란드와의 관계를 도모하는 의미에서 네덜란드 어의 하우스(huis)를 따서 아리타 하우스라 이름 지었다. 이름 그대로 따듯함이 있는 실내에 입장해 체크인을 하고, 배정받은 방에 짐을 푼 다음 레스토랑으로 나와 석식을 먹었다. 

맛있는 코스 요리가 차례로 나오는 가운데 나를 둘러싼 주변 좌석으로는 가족, 친구 단위의 여행객이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이를 보고 있자니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생겼다. 

어쩌다 보니 10년을 넘긴 남의 나라 육첩방 생활. 이 상황이 길어지는 사이 늘 곁에 있어줄 것 같았던 고향 친구들은 희미한 옛 추억으로 아득해졌고, 먹고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동굴을 파는 사이에 시시콜콜한 이야기 나누던 벗도 저 만치 멀어졌다. 

혈기 왕성함으로 세상을 논하고 아무 의미 없는 말장난을 주고받으며 어떤 소득도 없는 잡담으로도 마냥 행복해하던 그때 그 시절 은 그대로인데 나는 그곳에 없다. 이제는 돌아갈 기약조차 없다. 그러니 나 홀로 여행 중에 만나는 '따사로운 분위기'에서 철저히 외로워지며 이방인의 처지를 실감한다. 

더군다나 오늘은, 하필 서 있는 곳이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다 흙으로 돌아간 조선인 도공들의 고장 아리타라서... 그들의 인생이 남 일 같지가 않아서 한층 슬퍼졌다. 





불의 여신, 백파선 갤러리 

지난밤. 1년에 한 번 마실까 말까 한 맥주 한 잔에 깊게 잠들었던 모양이다. 새벽에 한 차례도 깨지 않고 푹 잤더니 몸이 솜털 마냥 가벼웠다. 기쁜 마음으로 호텔에서 제공하는 조식을 먹고, 호텔 옆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신 후 마을로 향했다. 

그늘진 언덕을 지나 차량이 쌩쌩 달리는 도로에 진입하자 뜨거운 자외선이 몸을 자극했고 이마와 귀 뒤편, 콧잔등 아래에 굵은 땀 방울이 맺혔다. 손수건으로 땀을 닦고 물 한 모금 마신 후 뚜벅 걸음으로 15분가량 더 걸어 철길 근처 2차선 도로 한 쪽 옛 민가를 개조한 검정색 건물 앞에 도착했다. 

 


'백파선 갤러리…’ 


 

 Gallery Baekpasun’이라는 간판 앞으로는 조선인 복장을 한 여성 좌상이 보였다. 이삼평과 함께 아리타를 대표하는 도공 백파선이다. 좌상을 향해 고개를 숙인 후 실내로 들어가자 아름다운 여성 한 분이 계셨다. 갤러리 부관장인 노진주 작가님이셨다. 

대학 졸업과 함께 일본에 건너온 그녀는 대학원에서 조형예술 도예를 전공한 후 도예가의 길을 걸었다. 이후 20년, 한국 출신 도공으로서 규슈 일대에 여러 발자취를 남겼다. 몇 해 전에는 본인 이름을 내건 조그만 공방도 차렸다. 


이와 동시에 '백파선'을 향한 애정으로 공방과 갤러리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밝은 웃음으로 나를 맞이한 그녀를 따라 갤러리 한 쪽에 앉았다. 그녀가 가져다준 시원한 커피 한 잔으로 목을 축인 후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선인 백파선의 삶

'작가님. 갑작스러운 부탁임에도 이렇게 응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사실 다른 종류의 책 취재 건으로 아리타에 왔다가 아리타 관광과 야마구치 씨로부터 갤러리 소개를 받았는데 꼭 한 번 뵙고 싶은 마음에 실례를 무릅쓰고 이리 연락드렸어요.'

'아니에요. 들러 주셔서 고맙습니다. 근데 제 이야기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대답 드릴 수 있는 선에서는 다 말씀드릴게요.

음, 뭐부터 말씀 드리면 좋을까. 아, 그래. 우선 저희 갤러리는 2016년에 오픈했어요. 아시다시피 백파선이라고 하는 여성 도공의 발자취를 기리고자 후손들이 세운 갤러리랍니다. 참고로 '백파선'이라는 이름은 본명이 아니고요. 그녀의 손주들이 '100세 가까이 산 할머니' 라 부른 데서 시작됐어요. 즉 그녀의 본명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죠.

좀 더 세부적인 이야기를 하려면 4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요. 임진왜란 당시, 김태도라고 하는 도공이 사가현 다케오에 끌려왔어요. 이후 다케오에 가마를 짓고 도자기를 굽던 그는 69세 되던 해에 사망합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백파선은 큰 결심을 내려요. 그 무렵, 이삼평이 아리타 이즈미야마에서 백자석을 발견했거든요. 이 소식을 접한 후 식솔 960여 명을 이끌고 아리타로 거처를 옮겼어요. 96세까지 산 그녀는 많은 도자기를 구웠을 거라 추정하는데요. 이에 힘입어 몇 해 전에는 그녀의 삶을 토대로 한 드라마 '불의 여신 정이' 가 제작되기도 했죠.

저는 지난 400년간 이삼평과 백파선 이외 여러 도공들이 저마다의 족적을 남겼을 거라 생각해요. 그리고 이들 중 절반이 여성이었을 거라 추정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자기 하나를 만들기까지 여러 과정을 거치는데요. 이 당시 여성 도공들은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유화 작업과 마무리 작업을 맡았을 거예요.

아무래도 여성들의 손이 섬세하다 보니까 세밀한 터치가 필요한 부분은 그들의 몫이었겠죠. 이러한 이름 없는 여성 도공들의 노력이 지금의 아리타를 만들었어요. 하지만 가장 유명한 여성 도공인'백파선' 조차 본명을 모르는 건 가슴 아픈 일이죠..

저는 삶의 배경과 발자취, 일본에 건너온 이유도 다르지만 이상하게 백파선 할머니에게 정이 가고 감정 이입이 됐어요. 아직까지 이 나라에서 '도자기'는 남성 도공이 주류거든요. 하물며 400년 전에는 더 많은 차별과 한계가 있었겠죠? 그런 제약 속에서도 식솔들과 함께 도자기를 빚은 그녀의 삶이 어떠했을지 ... 감히 상상하기도 힘듭니다.


한일 양국을 잇는 교두보

백파선 할머니의 남편인 김태도는 평소 의지하던 스님에게 후카미(심해) 소덴이라는 이름을 받았어요. 심해란 김해를 잘못 발음한 것으로 이를 통해 김태도의 고향이 '김해'라 추정합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경상남도 김해에서 활동하는 도공들과 교류를 시작했어요. 

매년 4월 하순부터 5월 초 사이, 아리타에서는 대규모 도자기 축제를 여는데 100만 명 이상의 군중이 몰려요. 이때 김해 출신 도공들이 오셔서 전시회를 연답니다. 담백하고 소소한 매력이 있는 한국 작가들의 작품은 축제 기간 중에 인기가 많아요.

뿐만 아니라 저희 갤러리는 한일 양국 여성 도공들을 잇는 '교류의 장'이 되고자 매년 여성작가 도예전을 연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남성 도공이 주류인 '도예 세계'에서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꽃피우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거든요. 그런 분들이 재능을 발휘하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매일 고민을 거듭하고 있어요. 다만 러리 운영에 필요한 모든 자금은 할머니의 후손인 '구보타씨'의 사비로 충당하다 보니 이래저래 제약이 많은 게 현실이랍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 해야겠죠. 아까 말씀드렸죠? 할머니의 성함이 본명이 아니라는 거 ... 사가현의 호온지라고 하는 절이 있는데 여기에는 할머니의 증손자가 세운 법탑이 있어요. 탑에 새겨진 '증조할머니의 이름은 모른다. 할머니는 온화하고 자애로운 분으로 후손들이 존경하는 마음에서 백파선이라 불렀다.'라는 글귀로 그녀의 삶을 추정할 뿐이죠.

음... 저희 갤러리 소개는 이 정도고요. 다음번에 시간 되실 때 제가 운영하는 공방도 한 번 찾아주셔요. 작가님께서 들려주신 조선 통신사 이야기를 보다 자세히 듣고 싶네요. 이를 통해 제가 연구하고자 하는 '과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사실 저는 이삼평과 백파선 이외, 이름 없는 도공들의 발자취를 좇고 싶어요. 아리타와 이마리뿐만 아니라 가라쓰, 우레시노 등 사가현 곳곳에 조선인 도공의 발자취가 남아 있거든요. 시간이 닿으면 모든 도공들을 찾아서 그들이 남긴 역사를 하나로 이어보려 해요. 

하지만 제 공방 꾸리랴, 갤러리 관리하랴, 아이들 키우랴.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니 언제 가능할지 모르겠어요. 아무쪼록 작가님, 오늘 저희가 나눈 이야기는 어떤 형식이라도 좋으니 꼭 세상에 나왔으면 좋겠어요. 멀리서 응원하겠습니다.



노진주 작가님과의 이야기를 끝내고  밖으로 나오자 오른편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고 바람이 나아가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갤러리 입구에 모셔진 백파선 할머니 동상이 내게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위로 하는 듯 했다. 





‘고맙습니다. 할머니, 다음에 또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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