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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박탄호 Oct 30. 2022

일본의 작은 마을, 사가현 가라쓰

낭만과 여유 가득한 작은 소도시에서의 1박 2일  



일본의 작은 마을 : 사가현 가라쓰 

남의 나라에서 맞이하는 생일은 더욱 특별하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 누구 하나 의지하나 없는 곳에서 나 스스로라도 잘 챙겨야 덜 서러우니 아무리 바빠도 케이크는 잘라야 한다. 그래서 떠났다.  여유와 노스탤지어가 깃든 사가현 가라쓰(唐津)로. 


100만 그루 소나무가 내려다보이는 카가미야마(鏡山) 전망대와 가라쓰 버거(唐津バーガー) 





단조로운 고속도로를 달리길 2시간, 첫 목적지인 카가미야마(鏡山)에 도착했다. 시내 외각에 자리한 정상(284m)에는 4km 길이의 소나무 밭과 푸른 바다가 내다보이는 전망대 공원이 있다. 

크고 작은 수목이 앉은 공원 입구로 들어가자 마쓰우라 사요히메라고 하는 여성의 동상이 등장했다. 설명에 따르면 7세기, 나당 연합의 공격으로 멸망 위기에 처한 백제에서 벌어진 백촌강 전투에 참전한 정인, 오토모노 사데히코를 그리워하다 망부석이 된 여성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한다. 

동상을 지나 좀 더 깊숙이 들어가자 전망대가 보였다. 끝없이 펼쳐진 소나무 숲 니지노 마츠바라(虹ノ松原)와 콩알만 하게 보이는 시내, 그 옆으로 누운 나른한 수평선. 그 밖의 경이로운 풍경에 넋을 잃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와.’ 




그때, 맞은편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이 양 어깨에 묻은 중압감과 스트레스를 떨쳐냈다. 


‘아아! 진짜 좋다.’ 

서른 하고도 다섯. 결코 가볍지 않은 나이. 대학원 과정을 수료하느라 남들이 승진하고 결혼 준비할 시기에 겨우 직장에 들어갔다. 당연히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늦게 확인했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사는 게 정답이고, 어찌해야 욕 좀 덜먹고 중간 만치 가는 직장인이 되는지 모른다. 

다만 ‘정 안되겠다 싶을 때는 현실에서 벗어나 먼발치에 서 보는 것이, ‘내일의 일은 내일에 맡기고 오늘의 나를 위해 도망칠 줄도 알아야 한다.’라는 건 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직장인으로써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인간 박탄호의 하루에 충실하기로 했다. 의연한 결의를 담아 얕은 한숨을 내뱉고 신발 끈을 조여 맸다. 몸을 돌려 차가 있는 주차장으로 돌아갔다. 

뜨거운 햇살에 적당히 익은 카 시트에 엉덩이를 붙이고 시동을 걸었다. 굽이굽이 산길을 내려와 사거리 몇 개를 통과, 푸른 소나무가 펼쳐진 숲길로 들어갔다. 숲을 가로지르는 2차선 국도를 어디 중간쯤에 다다르자 낡은 버스 한 대가 등장했다. 1968년 개업 이후, 지역을 대표하는 맛집으로 우뚝 선 가라쓰 버거(唐津バーガー)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군 부대가 주둔한 나가사키 사세보 (佐世保)에는 여러 햄버거 가게가 문을 열었다. 패티 사이로 먹음직스러운 고기와 야채, 토마토를 넣은 미국 식 햄버거는 일본 사회에 반향을 일으켰다. 씹는 순간 흘러나오는 육즙에 감동하는 이가 한 둘이 아니었다. 

사세보에 들렀다 햄버거를 먹은 가라쓰 버거 사장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미국식 수제 햄버거 특유의 진한 맛에 큰 감동을 받았고 이후 지금 이 자리에 캠핑카를 두고 햄버거 장사를 시작했다. 가라쓰 버거 50년 역사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가게는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방풍림, 니지노 마츠바라(虹ノ松原)에 자리했다. 푸른 소나무가 끝없이 펼쳐진 방풍림은 지난 시간, 이 고장에 발자취를 남긴 여러 주민들의 손을 거친 결과물이다. 

오래전, 이 지역 주민들은 바닷바람을 타고 불어오는 백사장 모래로 인해 농사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하여 17세기 무렵, 한 영주가 해변 뒤편으로 소나무를 심도록 명했다. 한 그루 두 그루로 시작한 작업은 세월을 타고 100만 그루가 모인 24헥타르 규모의 송림으로 거듭났다. 그 모습이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무지개와 닮아 있다 해서 니지노 마츠바라(虹ノ松原)라고도 불리며 일본 3대 송림으로 자리 잡았다. 이렇듯 명성 높은 소나무 숲 한복판에서 영업 중인 가라쓰 버거는 가라쓰에 들르면 꼭 먹어봐야 할 명물이다. 



첫 방문 때와 마찬가지로 가게 근처 공터로는 이미 많은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사실 ‘가게’라 말하기도 민망한 게 번듯한 건축물 대신 낡은 캠핑용 버스 한 대가 고작이다. 그런 가운데 직원들은 주문받으랴, 음식 만들랴 정신이 없었고, 제 몫의 햄버거를 받아 든 손님들은 행복한 표정으로 음미했다. 

메뉴를 볼 틈도 없이 가게의 주력 상품인, 두툼한 패티 사이로 계란과 햄, 치즈, 양상추 등을 넣은 스페셜 버거와 콜라 한 잔을 주문했다. 5분 정도 기다리자 직원분이 직접 햄버거와 음료수를 가져왔다. 가라쓰 성과 니지노 마츠바라, 그리고 가라쓰 버거라는 문구가 적힌 비닐봉지를 열어 먹음직스러운 햄버거를 베어 물었다. 

달짝지근한 소스와 짭조름한 치즈. 아삭한 양배추가 자아낸 식감. 이를 감싼 두툼한 패티를 ‘앙’ 하고 베어 먹는 맛이 있었다. 전체적인 맛은 한국의 이 x 토스트의 스페셜 토스트와 비슷했다. 여기에 주변을 둘러싼 상쾌한 대자연을 더하니 꿀 맛 같았다. 



가라쓰의 랜드마크 가라쓰 성 

햄버거로 배를 채운 후 고장의 상징인 가라쓰 성(唐津城)으로 향했다. 학이 훨훨 춤추는 모습을 닮았다 해서 마이즈루 성(舞鶴城・무학성)이라고도 부르는 이곳은 조선과 관련이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을 앞두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조선과 가까운 사가현 가라쓰 인근에 히젠 나고야 성(肥前名護屋城)을 축성. 침략을 준비했다. 이후 성은 군사 훈련과 물자 보급, 파견에 이르기까지 병참 기지 역할을 도맡았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왜란이 끝나면서 성의 운명도 다 했다. 이윽고 1600년에는 열도의 패권을 두고 도요토미 세력과 훗날 에도 막부를 여는 도쿠가와 세력이 맞붙었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라 부르는 이 전쟁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야에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이 남은 히젠 나고야 성의 해체를 명했다. 

이때 히젠 나고야 성 축성에 참여하고, 이후 도쿠가와 세력에 협조한 데라자와 히로타카(寺沢広高)라는 자가 해체된 성에서 나온 자재를 활용해 새로운 성을 쌓았으니 바로 가라쓰성(唐津城)이다. 

바다와 맞닿은 미쓰시마산 자락에 자리한 성은 초대(初代) 영주이자 12만 3,000석(1석은 한 명이 1년간 먹는 쌀의 양을 뜻함)의 소출을 받던 데라자와 히로타카의 발자취가 남았다. 하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버지 히로타카에 이어 2대 영주로 취임한 가타타카는 가혹한 통치와 크리스트교 탄압으로 백성들의 반발을 샀고, 이는 기독교인들의 저항으로 알려진 시마바라의 난으로 이어진다. 

규슈 지역을 뒤흔든 반란에 대한 책임으로 영지 일부를 몰수 당하는 등 고초를 겪은 가타카타는 신세를 비관하다 에도에서 자살, 대가 끊긴 데라자와 가문을 대신해 이후 오쿠보 가문을 비롯한 5가문이 차례로 가라쓰를 다스렸다. 

그러나 1871년, 메이지 정부의 폐성령으로 가라쓰 성은 해체의 길을 걸었고 오늘날에 남은 것은 20세기에 이르러 새롭게 복원한 것이다. 여기에 지난 몇 년간, 대대적인 보수 작업을 걸쳐 일본 100대 명성에 걸맞은 위용을 갖췄다. 

입구를 시작으로 촘촘히 깔린 계단 343개를 밟아 도착한 천수각과 그 주변은 열도 전역에 남은 다른 성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다. 다만, 눈앞에 선 천수각은 1966년, 대규모 복원 당시 새롭게 지은 것으로 원래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듯 새롭게 탄생한 천수각으로 들어가 여러 역사 자료에 눈 기울였다, 첫 방문이었던 2014년과 달리, 대규모 보수 공사를 거치며 전시 자료가 한층 풍성해졌다. 실내 한 쪽으로 마련된 전망대도 여전했다. 뒤편으로는 시가지가, 옆으로는 4km 길이의 소나무 밭 니지노 마츠바라가, 앞 쪽으로는 푸른 바다가 드러났다. 

세찬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 한가운데로는 타카시마 섬이 둥둥 떠 있었고 그 주변을 연락선 한 척이 뱅뱅 돌았다. 옆에 있던 지역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몇 해 전에 섬에 자리한 호우토 신사에 들른 어떤 사람이 복권 1등에 당첨되면서 ‘복권 당첨 신사’로 화제를 모았고, 이후 일확천금을 바라는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고 한다. 



근대 건축물로 알아가는 마을의 역사 


오후 1시 35분, 기온 27도. 조각구름 사이로 내리쬐는 햇볕에 콧잔등에 땀이 맺혔다. 잠시 목이라도 축일 겸, 성 입구에 위치한 카페 키코우안(基幸庵)에 들어갔다. 1973년, 결혼 예물 전문점으로 시작한 가게는 한차례 이전을 거쳐 카페 겸 예술품 판매점으로 거듭났다. 정갈한 외관을 지나 실내로 들어가자 왼쪽으로는 전통 공예품을 판매하는 공간이, 오른쪽으로는 카페 공간이 보였다. 

지난 방문을 기억하며 오른쪽으로 들어가자 따사로운 색감으로 가득 한 실내가 등장했다. 노란 흙벽과 잘 다듬은 목재, 크고 작은 예술품이 조화를 이룬 실내 구석에 앉아 말차 빙수를 주문했다. 짐을 내려놓고 목을 돌리다 시선이 천정으로 향했다. 목재에 홈을 판 다음 블록처럼 조합한 와타리 공법(일본의 전통 건축 공법)이 눈에 들어왔다. 

‘목재끼리 잘 엮었네.’ 

건설 회사 직원 아니랄까 봐 저런 것부터 눈에 보인다며 실소하는 사이, 내 몫의 간식이 나왔다. 우유 얼음에 연유 넣고 팥 넣고, 그 위로 후르츠를 올린 한국 빙수와 달리 물 얼음에 시럽과 팥을 올린 일본 식 빙수는 늘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더위를 식히기에는 충분하기에 감사히 먹었다. 

‘저희 가게가 한국 방송에도 나왔어요. 그래서 한국 손님들도 많이 오세요.’ 

인상 좋은 주인장과 이야기를 주고받은 후, 거리로 나섰다. 성 입구로 조성된 작은 상점가를 지나 주민들의 일상이 묻은 거리로 향했다. 




19세기, 근대화 시기에 철강 산업으로 번영한 가라쓰에는 유독 근대 건축물이 많다. 그중에서도 지금부터 향할 다카토리 저택 (旧高取邸)은 지난 시간, 도시가 번영했음을 알리는 존재다. 

성에서 도보로 6분 거리에 자리한 이 저택은 19세기 후반, 탄광 경영으로 일본의 석탄왕이라 불리던 다카토리 고레요시 (高取 伊好)가 살던 곳이다. 사가현 다쿠시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871년 도쿄에 상경, 게이오 의숙(慶応義塾大学・현 게이오 대학)에서 광산학을 배웠다. 

졸업 후에는 여러 조직에서 경험을 쌓았고 1885년에는 독자적으로 광산업에 진출했다. 하지만 이미 광산업에 뼈가 굵은 대형 자본가들에 밀려 성과를 못 냈다. 그러다 1909년에 매수한 기시마 (杵島) 탄광에서 큰 성공을 이루며 직원 5,000명을 둔 탄광 재벌 지위에 올랐다. 

이후 그는 지금 자리에 주거 및 손님 영접을 목적으로 다카토리 저택을 지었다. 2,300 대지에 우뚝 선 이 2층짜리 건물은 일본 적 미학과 서양의 화려함이 혼재했다. 입구를 시작해 방 곳곳으로 서양에서 건너 온 가구와 호화 장식품이 자리했고, 이를 지나 복도를 따라가면 다다미가 깔린 방과 무로마치 시대(1336-1573)부터 인기를 끈 가면극 노가쿠((能楽)를 상연하는 무대가 나타난다. 

사진 촬영이 금지된 탓에 실내 분위기를 담진 못 했지만 두고두고 마음에 남을 모습이라 아쉽진 않았다. 고풍스러운 가구와 화려한 장식품, 오랜 세월을 품은 삐걱대는 나무 복도, 그 위로 깔린 다다미 냄새, 투명한 유리창으로 내다보이는 해송 정원, 가족탕, 그 밖의 여러 풍경에 이르기까지. 추억으로 담았으니 이만하면 됐다. 

기다란 복도를 빠져나와 밖으로 나섰다. 노송이 꿋꿋이 선 마당 맞은편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향하는 골목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한 골목 지나 전통 가옥, 두 골목 지나 옛 돌담길. 길게 이어지는 고즈넉한 풍경을 따라 10분가량 뚜벅거리자 우뚝 선 가라쓰 신 옆으로 히키야마 전시관(唐津曳山展示館)이 나왔다. 




‘히키야마 전시관이라..’

히키야마(曳山)란 축제 기간에 마을 곳곳을 도는 대형 수레를 말한다. 매년 11월 2일부터 4일까지 3일간 시에서는 가라쓰 군치(唐津くんち)라고 하는 축제를 연다. 일 년간 열심히 농사 지어 얻은 농작물을 무사히 수확하기까지 은혜를 베푼 신들께 감사드리는 마음에서 비롯한 축제 기간에는 50만 이상의 인파가 몰린다. 

17세기, 가라쓰 신사의 가을 축제로 서막을 연 가라쓰 군치는 1819년, 카나타 마을 주민들이 신사에 거대한 적사자 히키야마를 헌납한 이후 다른 마을도 앞 다투어 용과 범고래, 도미, 우에스기 겐신(전국시대의 인물) 등의 히키야마를 바치면서 세를 불렸다. 

1대의 히키야마로 시작한 축제는 1876년에 이르러 14대가 종횡무진 하는 화합의 장이 되었다. 높이 7미터, 무게 2-3톤에 이르는 대형 수레. 그러니까 200여 년간, 조상의 손길이 닿은 수레를 대(台)당 300명의 장정이 ‘영차영차’ 함성을 지르며 끌면서 마을의 평화와 모두의 건강을 기원했다. 

축제가 끝나면 14대의 히키야마는 신사 옆 전시관으로 옮겨 민간에 공개한다. 그 모습을 보기 위해 문을 열면 로봇이 나올 법한 큼직한 전시관 중앙으로 조그맣게 난 입구로 들어갔다. 입장료를 내고 구석으로 들어가자 적사자를 시작으로 청사자와 거북이, 우라시마 타로 등 여러 모습을 한 히키야마가 등장했다. 

엄청난 위용에 짧은 감탄사를 내뱉는 순간, 전시관 한쪽에서 축제의 역사와 히키야마의 구조에 대해 설명하는 안내 방송이 들렸다. 설명은 이러했다. 히키야마에는 4개의 고정된 바퀴가 달려있다. 따라서 참가자들이 본체에 달린 기다란 줄을 끌면 바퀴가 돌아간다. 다만 바퀴가 고정된 탓에 양옆으로 회전할 때는 본체에 달린 수레 채를 지렛대로 삼아 본체 전체를 돌린다. 

말은 쉽지만 2톤이 넘는 수레를 돌리는 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보니 축제에 잔뼈가 굵은 참가자들이 수레 채에 매달린다. 

한편, 조종만큼 제작 과정도 번거로운 모양이다. 설명에 따르면 한 대의 히키야마를 완성하기까지 대략 3-5년 정도 걸리는데 이때 본체는 점토와 나무, 종이로 만든다고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제작 과정을 살펴보면 ... 

먼저 점토로 만든 형틀 위에 와시 (和紙・일본 전통 종이) 수 백 장을 겹쳐 붙인 후 그 위에 옻을 바른다. 그런 다음에 염료로 색을 입히고 금박을 칠해 말린다. 

이 과정을 거친 14대의 히키야마가 축제 기간에 거리를 수놓는 모습은 현지 주민과 여행객들의 마을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이를 보고 있자니 이미 세 차례나 방문했음에도 축제를 못 본 게 아쉽다. 뭐, 살아갈 날이 많으니 기회 닿는 날이 오겠지. 



일본 근대 건축의 선구자 ‘다쓰노 긴고’ 박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큰 계획 없이 세월아 네월아, 구름 따라 걷는 여행이라고는 하나, 이야기가 있는 명소는 꼭 들러야 직성이 풀린다. 그렇기에 재차 발걸음을 재촉했다. 

전시관에서 도보로 8분가량 걸어 도착한 시내 중심가에는 1912년에 완공된 가라쓰 은행 본점 건물이 있다. 사가현(佐賀県)에 남은 근대 건축물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이 서양식 건물은 도쿄역을 건설한 건축가 다쓰노 킨고(辰野金吾) 박사가 감독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가현 가라쓰 출신인 그는 도쿄 대학 공학부를 졸업. 이후 국가 장학생 자격으로 런던 대학 건축학부에 입학했다. 이 시기, 대영제국이라 불리며 세계를 호령하던 영국에서는 빅토리아 양식이라고 해서 중세 고딕 건축을 바탕으로 한 건축 양식이 유행했고, 이는 훗날 다쓰노 긴고 건축 양식의 토대가 된다. 

4년간의 유학을 끝내고 일본에 돌아온 그는 도쿄 대학 공학부 교수로 취임해 일본 은행 본점, 도쿄 역과 오사카 중앙 공회당 등 일본의 근대화를 상징하는 건축물에 관여하며 명성을 쌓았다. 그의 손길은 한반도까지 닿았는데 한국은행 본점 건물(당시 조선은행)과 부산 은행이 그의 감수를 거쳤고, 서울역은 그의 제자인 츠카모토 야스시(塚本靖)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역을 참고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한편, 화려한 외관만큼이나 으리으리한 실내에는 흑백 영화에서 볼 법한 은행 창구를 비롯해 금고, 샹들리에 양식 등 20세기 초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았다. “옛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은행 업무를 봤겠구나.” 라 추측게 하는 1층 전시관 한 쪽에는 돈 좀 들였을 법 한 타원형 계단이 있었다. 이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자, 다쓰노 긴고와 관련한 전시품으로 가득했다. 

그의 손을 거친 건축물과 양식, 근대 일본 건축사 이야기 등 세세한 자료가 남은 공간에서 발걸음을 세웠다. 수많은 자료를 보존하는 것도 대단하지만, 지역 사회와 관련한 역사 인물로 스토리텔링을 구축하는 일본의 자치단체의 노력에 매번 놀란다. 조국 한국이 일본 이상 가는 관광 대국이 되길 바라기에, 우리도 작은 것에 귀 기울이고, 보존하는, 나아가 이를 활용해 풍성한 스토리텔링을 갖추길 기원한다. 




내 삶의 온도가 딱 이 정도였으면 좋겠다. 

‘안녕히 계세요.’ 

은행을 지키는 직원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거리로 나왔다. 차가 쌩쌩 달리는 좁은 도로 양옆으로 세월을 맞은 근대 건축물들이 어우러졌다. 자동차 수리점과 포목점, 모퉁이 슈퍼와 전통 과자 가게, 파스텔톤을 머금은 구 무라카미 치과 의원과 갤러리 일락, 100년 된 장어 전문점 우나기 다케야 등 필름 사진 속 빛바랜 풍경 마냥 마음속 풍금을 자극하는 거리에서 한 번 도 경험하지 않은 시절의 향수를 느꼈다. 

한층 말랑말랑해진 마음으로 사뿐히 걸었다. 주민들이 모인 아케이드 시장과 굵은 재즈 선율이 흐르는 상가를 지나 가라쓰 역에 도착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자 푸른 색채가 빛을 바라기 시작했다. 

‘저녁 먹을 시간이네.’ 

혼잣말을 내뱉기 무섭게 허기가 찾아왔다. 안 되겠다 싶어 미리 알아봐 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앞서 오전에 방문한 카가미야마 산자락에 자리한 레스토랑 POPOTE다. 

노을이 타 들어가는 가라쓰만(唐津湾)과 고요함을 머금은 니지노 마츠바라(虹ノ松原)가 한 눈에 보이는 레스토랑은 지역 주민들이 즐겨 찾는 분위기 맛집이다. 전경은 말할 것도 없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빨간 머리 앤이 살 법한 건물 외관, 은은한 조명과 고풍스러운 장식이 조화를 이룬 실내는 손님들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실내에 앉아 저마다의 시간을 보내는, 다소 상기한 표정을 한 여타 손님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감성이 이성을 뛰어넘었다. 붉게 타오르는 바닷가, 석양 뒤로 밀려드는 잔잔한 어스름, 귓가를 적시는 황홀한 선율과 풍성한 음식. 이 밖의 모든 상황에 행복을 느꼈다. 앞으로 만날 점점의 일상이, 내 삶의 온도가 딱 이 정도이길 바랐다. 

이전 03화 일본의 작은 마을, 효고현 이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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