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소바의 본고장, 이즈시
소바의 고장 이즈시
손님 다섯을 태운 버스가 시가지를 나와 좁은 시골 도로에 진입했다. 투명한 차창 밖으로 푸른 하늘과 흰 눈 입은 세상이 펼쳐지는 동안 둘은 졸고 둘은 수다를, 나머지 하나는 유리창에 머리를 맞대 바깥세상을 구경했다.유리창에 비치는 무표정한 얼굴을 덮는 산과 들, 논과 밭, 상점과 주택. 그 밖의 무수한 전원 풍경을 바라보는 사이 버스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작은 버스 터미널에 들어갔다.
‘젠탄버스 이즈시 영업소!! 이 차의 종점입니다.’
나른함을 깨는 무거운 외침에 정신을 차리고 짐을 챙겨 하차했다. 작은 하천을 낀 승하차장 옆, 가파른 기와지붕을 눌러 쓴 대합실에는 의자 몇 개와 자판기, 동전 사물함이 놓여 있었다. 전반적으로 낡고 허름한 분위기가 맴도는 공간에 여고생 둘과 남고생 하나가 의자 하나 씩을 꿰찬 채 수다를 떨었고, 버스 시동 꺼트리는 소리에 사무실 문을 열고 나온 매표소 직원은 짧은 감탄사와 함께 손에 들고 있던 빗자루로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때마침 버스에서 내린 운전수 아저씨는‘사무이네’(춥네) 라는 한마디로 그녀와 인사를 주고받았다. 각자의 일상에 충실한 군상 뒤로 펼쳐진 바깥세상에는 매서운 겨울바람이 왔다 갔다 했다. 귓불을 흔드는 칼바람에 목도리를 고쳐 매고 앞으로 나아갔다.
자동차 몇 대가 오가는 2차선 도로를 따라 몇 개의 상점을 스쳐 지나자 조그만 사거리가 보였다. 신호 건너 왼편에 자리한 다지마 신용 금고 옆으로는 이즈시 강이 흘렀고, 건물 앞에는 낡은 등롱 하나가 서 있었다. 에도시대, 물자를 실은 상선(商船)이 이즈시 강을 타고 마을까지 들어왔는데 이때 배들에게 선착장에 당도했음을 알려주던 게 여기 있는 오류 등롱(おりゅう灯籠)이었다.
그리고 사거리 건너기 전, 오른쪽으로는 100년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가부키 극장이, 그 옆으로 좁게 이어지는 골목 앞으로는 고즈넉한 건축물 몇 채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좀 더 걷자 큰 목조 시계탑과 지역 특산물 판매장이 등장했다.
안내 지도를 얻고자 들어간 판매장에는 도자기와 면직물, 수공예품, 엽서, 주전부리 등 지역을 대표하는 명물들이 놓여있었고, 실내 끄트머리에 자그마한 관광 안내소가 자리했다. 또한 안내소 맞은편에 설치된 게시판에는 접시 소바 순례(出石皿そばめぐり라 하는 체험 프로그램 소개 전단지가 붙어 있었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직원에게 ‘접시 소바 순례’를 위한 돈을 치르고 견직물로 만든 주머니 하나를 받았다. 이를 열자 영락통보(永楽通宝/명나라 시대에 쓰던 동전) 세 닢이 나왔다. 직원의 설명에 따르면 마을에 소재한 프로그램 참가 소바 전문점에 들러 이를 제시하면 소바와 바꿔 먹을 수 있다고 한다.
허나 식사를 하기에는 다소 일러서 안내소 오른편 아리코(有子) 산자락에 터 내린 이즈시 성터로 향했다. 1574년, 야마나 스케토요가 산 정상에 성을 쌓은 것을 1604년에 고이데 요시히데(小出吉英)가 현 자리로 옮겨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이즈시 성은 250여 년간 5만 8천 석의 소출을 받던 이즈시 영주의 정치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그러나 1871년, 폐성령과 함께 성내 시설 다수가 철거되었고 오늘날에는 해자와 석벽, 망루만 남아 지난 역사를 대변한다.
그리고 성 맞은편으로는 바둑판 마냥 길과 길이 열과 오를 맞춘 마을 전경이 드러났다. 흡사 그 모습이 교토와 닮아 있다 해서 사람들은 이즈시를 다지마의 작은 교토라 부른다. 도로 폭과 택지 구획 등 300여 년 전, 에도 시대 느낌을 고스란히 간직한 마을. 하지만 거리에 남은 상점과 무사 저택은 비교적 새것 느낌이 적지 않았다. 1876년에 발생한 대화재로 가옥 966채, 사원 39곳, 창고 290동 등 마을에 있던 건물 중 8할 이상이 소실되면서 건물 대다수가 새롭게 지어진 탓이다. 그렇다 해도 15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것들이 대다수라 골목골목에서 짙은 고즈넉함이 흘러나왔다.
한편 성터 뒤로는 이즈시 신사(出石神社)가 있는데 이곳에는 우리 역사와 관련한 전설이 남았다. 일본서기(日本書記) 수인기에 따르면 신라 왕자 천일장(에마노히보코, 天日槍)이 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한 다음 청동과 철기, 옥과 거울 등을 들고 일본에 건너와 정착한 곳이 오늘날 이즈시 마을이 속한 다지마(但馬)국이었다고 한다.
아울러 이즈시(出石)라는 지명도 그가 신라에서 가져온 보물 중 하나인 단검 이름에서 비롯했다는 설이 남아있다. 천일장과 관련한 역사가 허구든 설이든 우리 역사와 연관성을 갖는 만큼 빨간 토리이(鳥居)가 이어지는 신사에 들러 보고 싶었으나 겨우내 쌓인 눈이 꽁꽁 언 탓에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마을의 명물 이즈시 소바
아쉬움을 안은 채 관광 안내소 근처로 돌아갔다. 이즈시 마을은 걸음이 느린 아이도 1시간 반이면 다 돌아볼 정도로 작은 동네라 나비가 하늘하늘 산책하듯 느리게 훑어보기로 했다. 먼저 안내소 옆에 위치한 이즈시 가로 야시키(出石家老屋敷)로 향했다. 에도시대 후기, 영주를 보필하던 상급 무사 가로(家老, 장로 직급)가 머물던 이 무사 저택에는 당시 상급 무사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전시품이 남아있다. 큼직한 현관 뒤로 기다랗게 펼쳐진 실내로 각종 문서와 가마, 그림, 영주의 영지 행차 때 쓰던 물건 등 여러 유물이 전시된 가운데 다다미 바닥이 펼쳐졌고, ‘가로’의 목숨을 노리고 침입한 자객들이 함부로 칼을 휘두를 수 없도록 천정을 낮게 둔 것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넋 놓고 전시품을 구경하기에는 발이 시렸다. 조금이라도 추위를 덜 느끼고자 발끝을 세워 이방 걸음으로 실내를 살폈다.
15분 후. 차가운 방바닥에 잔뜩 오그라든 발가락을 신발에 밀어 넣어 거리로 나섰다. 1시간 전만 해도 쥐 죽은 듯 조용하던 거리 위로 크고 작은 대화가 들려왔다. 목도리를 매거나 모자를 쓰는 등 각각의 방법으로 추위에 맞선 여행객들이 오가는 거리 옆으로 커다란 시계탑이 우뚝 섰다. 1871년에 설치된 이 목조 시계탑은 신코로(辰鼓楼)라는 이름을 가졌다. 마을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기 위해 세운 이 탑의 높이는 총 13m로 이를 받치는 돌담 높이도 5m에 달한다. 참고로 돌담은 폐성령 이후 이즈시 성에서 발생한 폐자재들로 만든 것으로, 그 위에 목조 누각을 두고 최상부에는 아리코노 시라베(有子のしらべ)라는 큰 북을 설치했다.
한편 이 시기, 마을에는 이케구치 추조(池口忠恕)라고 하는 의사가 살았다. 평소 그는 성심성의껏 아픈 사람을 돌보며 주민들에게 두터운 신망을 얻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의료활동을 하던 그가 병에 걸렸다. 이에 모든 주민들이 신사에 나가 기도를 올렸다. 주민들의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전해졌는지 얼마 후 이케구치 추조는 기적처럼 완쾌했다. 이에 힘입어 그는 본인의 회복을 기원한 마을 주민들에게 감사를 전하는 차원에서 신코로에 대형 시계를 설치했다. 이후 매일 오전 8시와 오후 1시 정각이 되면 시계탑 최상부에 위치한‘북’이 울렸고 현재도 매일 오후 1시마다 정각을 알리는 북이 울린다.
이렇듯 이케구치 츄조의 헌신과 마을 사람들의 염원이 깃든 시계탑은 마을의 주요 관광자원이자 주민들의 자긍심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여행객들이 신코로 앞에서 추억을 남기려 했다. 나 또한 그들 틈에 끼여 사진 몇 장을 찍었다. 그런 다음 시계탑 건너편에 있는 소바 전문점 도죠(登城)에 들렀다. 인터넷에 개제된 설명에 따르면 마을에 소재한 소바 가게 중 가장 ‘신코로’가 잘 보이는 이 가게는 휴가철이 되면 많은 여행객들이 줄을 서는 명소로 손꼽힌단다.
단체 여행객도 수용 가능할 정도로 넓은 실내에는 앉은뱅이 탁자 수 십 개가 놓여 있는데 그 맞은편으로 시계탑이 보였다. 가게에 들어가기 무섭게 사진 찍기 좋은 자리에 앉아 소바 1인분을 주문했다.
주문하기가 무섭게 직원이 소바 정식을 들고 나왔다. 접시 다섯 개에 나눠 담긴 면과 다이콘 오로시(갈아 넣은 무), 파, 마, 날계란 한 개와 소바 간장 국물을 담은 토쿠리(술병), 소바 삶은 물에 이르기까지 먹음직스러운 구성에 군침을 삼켰다. 기록을 위해 사진 몇 장을 찍은 후 차림표에 적힌 ‘소바 맛있게 먹는 방법’ 안내를 숙지했다.
1. 소바 간장 국물을 한 모금 마시며 간장의 깊은 맛을 음미한다.
2. 소바 면 한 젓가락을 집어 살짝 소금을 찍은 후 면 맛을 즐긴다.
3. 첫 번째 접시는 소바 간장 국물에 파와 와사비를 넣어 먹고
4. 두 번째 접시는 마를 더해 먹으며
5. 세 번째 접시는 간장 국물에 날계란을 풀어먹는다.
6. 소바 면을 다 먹은 후 남은 간장 국물에 소바 삶은 물을 부어 마신다.
평소, 음식에 깊은 조예가 없는 만큼 되지도 않는 감상과 잣대로 맛을 논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맛을 즐기기로 하고 차림표에 적힌 설명대로 따라 했다. 우선 맷돌로 갈아 만든 면에 소금을 찍어 후루룩 빨아들였다. 여태까지 먹은 소바에 비해 면발이 굵지 않아서 ‘스르르’하고 입안에 녹아들었다. 이어 간장 국물에 면을 살짝 찍어 먹자 생생하면서도 짭조름한 맛이 식욕을 돋우었다. 아울러 각각의 재료를 첨가해 미세한 맛의 차이를 느끼는 과정도 즐거웠다. 다만, 성인 여성의 경우 15~25접시, 남성은 20~30접시를 적당 섭취량으로 치는 이즈시 소바 특성상 5접시는 간에 기별도 안 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면을 빨아들이고 소바 삶은 국물까지 후루룩 밀어 넣었다. 10분도 안 걸려 그릇을 비운 후 엽전 한 닢으로 계산을 하고 두 번째 소바 전문점인 간베에(官兵衛)에 방문해 재차 1인분(5접시)을 주문했다. 이 가게에서 제공하는 소바로 말할 것 같으면 기본적인 틀은 앞서 먹은 것과 큰 차가 없으나 비교적 면발이 굵고 쫄깃쫄깃한 게 매력으로 국물은 크게 달지도, 짜지도 않은 무난한 맛이었다.
앞서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면과 소바 국물까지 맛있게 먹으며 식욕을 끌어올렸다. 기세를 몰아 이번에는 신코로 남쪽, 도보로 3분 거리인 카쓰라(桂)에 들어가 1인분을 더 시켰다. 앞서 두 곳에서 먹은 것보다 훨씬 얇은 소바 면을 농도가 얕은 가운데 미세하게 단 맛을 띠는 간장 국물에 찍어 먹었다. 어찌나 맛있던지 5분 만에 소바 끓인 물까지 다 먹어 치웠다. 양으로 따지면 황소가 새 모이 먹는 수준. 대신 짝사랑에 빠진 아이가 상대방의 말 하나하나 곱씹고 사소한 뉘앙스에 의미 부여하듯 혀와 입천장, 그 밖의 모든 감각을 동원해 맛과 농도, 식감을 즐기는 재미가 쏠쏠했다.
마지막 남은 엽전으로 소바 값을 치른 후 거리로 나섰다. 면은 차치하고 뜨끈뜨끈한 국물까지 먹었으면 배가 찰 만 한데 여전히 허기가 졌다. 어쩔 수 없이 가게 두 곳에 더 들렀고 마지막 가게에서 ‘소바 삶은 물’을 마시고 나서야 목 끝까지 포만감이 차 올랐다.
이즈시 산책, 느리게 걷기
배도 채웠겠다. 미처 발걸음 못한 마을 내 명소를 둘러보기로 했다. 느릿느릿 짧은 보폭 사이로 파고든 짙은 그림자와 햇살 몇 줄기, 그 위를 넘나드는 매서운 칼 바람. 평소였다면 눈 여겨보지 않을 일상의 단편 위로 주민들의 삶이 드러났다. 전단지를 들어 호객행위를 하는 아주머니와 가판대 물건을 정리하는 할머니, 작은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희로애락을 전하는 우체부 아저씨, 분주한 손길로 자판기에 음료수를 보충하는 또래 남성. 고단한 표정 위로 땀방울이 맺힌 이들 뒤로 이어진 골목 끝자락에는 파란색 근대 목조 건축물이 있었다. 1887년, 군청 사무소 용도로 지어진 이곳은 오늘날 이즈시 메이지관(出石明時館)이라는 이름 하에 마을이 배출한 유명 인사들의 자료와 유품을 전시하고 있다.
크게 구미가 당기진 않았으나 오늘이 아니면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데다 짧은 토막 상식일지 언정 마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거란 판단하에 잠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옛 군청 사무소와 군장 집무실이 재연된 전시실에는 마을이 배출한 여러 인물과 관련한 자료와 유품이 남아 있었고, 이중 일본 기상청을 설립한 사쿠라이 츠토무(桜井勉)의 기록이 가장 크게 다가왔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 흥미를 돋울 게 없어 대충의 정보만을 훑은 다음 밖으로 나섰다.
이번에는 건물 외관 오른 편과 마주한 골목으로 진입했다. 마침 나를 앞서 간 작은 트럭 꽁무니를 쫓다 산책 나온 강아지와 노인, 터줏대감 마냥 어슬렁거리는 노란 고양이 한 마리와 인사 나눴다. 이때 깃든 옅은 미소가 옅어질 즈음, 노란 흙벽 창고 건물이 나타났다. 지금으로부터 260여 년 전에 지어졌다는 이곳에는 150년 전, 이즈시 주조(양조장)이 입점했다. 그 덕에 건물 양옆 골목에 짙은 술 냄새가 흘렀다. . 1년에 맥주 한 잔 마실까 말까 한 내 코도 즐겁게 향기, 다만 이를 담을 재간이 없어 추억이라도 주워 담자며 카메라를 들어 셔터를 눌렀다.
그 후 시계탑이 있는 마을 중앙으로 돌아가 아침에 걸었던 골목으로 들어갔다. 메이지 시대, 마을에서 셋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부를 쌓은 후쿠토미(福富)가문 저택을 고쳐 만든 이즈시 사료관에 들러 미처 살피지 못한 마을 이야기를 머릿속에 담은 다음 바로 근처에 있는 가부키 극장인 에이라쿠칸(永楽館)에 들렀다. 1901년, 가부키 및 신파극 공연장으로 문을 연 이곳은 긴키 지역에 남은 가부키 극장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오늘날에도 비정기적으로 공연을 여는 실내에는 개관 초기의 모습을 가늠할 수 있는 전시물과 공연 장치가 있다.
먼저 1층 실내 중앙에는 4명씩 앉을 수 있는 정사각형 나무틀이 놓여 있는데 이를 마스세키桝席’라 부른다. 그 바로 옆으로 마련된 기다란 통로는 하나미치花道라 해서 배우가 관객과 소통하기 위해 왔다 갔다 하던 역할을 했고, 하나미치 한쪽으로 괴물이나 악역이 등장하는 ‘구멍’ 역할을 한 슷폰すっぽん’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바로 맞은편에 자리한 큼직한 무대를 세리(せり)라 불렀다.
세리 주변에도 여러 장치가 남았다. 먼저 무대 중앙 바닥에 정사각형 모양으로 설치된 문, 그러니까 나라쿠(奈落)라 부르던 구멍은 배우가 등장과 퇴장할 때 활용하던 출입구 역할을 했다. 그리고 나라쿠 주변으로 동그랗게 그인 선은 무대 배경을 바꿀 때마다 회전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무대 양옆으로 북과 피리 등 악기를 연주하는 공간과, 극에서 해설자 역할을 하던 변사가 머물던 기다유세키(義太夫席)등 여러 연출 장치가 남아 있었다. 아울러 공연장 천장에는 가부키 공연을 협찬하던 지역 상점과 가게 간판들이 다닥다닥 붙었고 간판 바로 아래에 자리한 2층 공간에는 오오무코(大向)라 하는 좌석, 지하에는 무대를 움직이는 장치들이 자리했다.
이렇듯 가부키 공연과 관련한 여러 장치가 남은 에이라쿠칸은 이즈시의 찬란했던 지난날을 드러내는 매개체이자 전통 가부키 공연장의 모습을 알리는 ‘역사의 장’ 역할을 도맡고 있다.
에이라쿠칸을 끝으로 이즈시에서의 일정을 끝내기로 하고 마을 중앙에 소재한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과 디저트로 체력을 보충했다. 그 때, 벽 한 쪽에 앉은 라디오에서 늦은 오후부터 재차 50cm 넘는 폭설이 내린다는 예고가 흘러나왔다. 원래는 키노사키 온천에서 하루를 더 묵고자 했으나 잘못 하다가 2-3일 가량 남의 동네에서 고립될 수 있다는 걱정과 함께 고베로 돌아가는 전차가 있는 도요오카로 돌아가 여정을 마무리했다.
아쉬우나 어쩌겠나. 예고없는 날씨의 변덕도 여행의 일부이니 받아 들여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