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겨울 왕국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겨울 왕국, 시라카와고
푹신한 함박눈 입은 하쿠산(白山) 기슭. 시옷 자 모양 지붕을 덮어쓴 전통 가옥 백여 채가 옹기종기 모인 마을 어귀 버스 터미널에 고속버스 한 대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취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앞 문이 열리자 무서운 속도로 하차해 대합실 구석에 설치된 동전 사물함에 짐을 보관했다.
귀중품을 넣은 가방 하나와 카메라 한 대. 한결 가벼워진 몸뚱이를 이끌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곳곳에 흰 눈이 얼어 붙은 길 위에 서서 숨을 들이쉬어 상체를 들자 구름 몇 점 묻은 하늘과 눈 덮인 산등성이가, 한참 아래로 합장 가옥(合掌造り, 갓쇼즈쿠리)이라 부르는 전통 가옥이 다닥다닥 붙은 풍경이 펼쳐졌다.
‘우와…’
드넓은 대자연과 인간의 지혜가 빚어낸 광경은 거리에 서 있는 모두를 감동케 했다. 여기저기서 언빌리버블(Unbelievable), 그레이트(Great), 스고이네(凄いね, 대단해)와 같은 감탄사가 쏟아졌다. 이렇듯 성별, 세대, 국적 불문하고 모든 이들을 전율케 하는 이곳은 기후현(岐阜県) 북동부, 험준한 산속, 혹독한 겨울에 순응하며 독특한 건축 문화를 잉태한 시라카와고(白川郷)다.
총면적 356.64 km2. 여의도(8.4 km2 ) 보다 42.4배 넓은 토지 위로 주민 1,500명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시라카와고는 1995년, 마을에 소재한 합장 가옥의 역사적 가치와 이를 지키고자 하는 주민들의 보존 의지를 인정받아 일본에서 여섯 번째로 세계 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지붕에 눈이 쌓이지 않도록 억새로 된 지붕을 경사지게 만드는 과정에서 지붕 형태가 손을 모아 합장하는 구조를 갖추며 합장 가옥(合掌造り)이라 불린 전통 주택 상당수는 마을 면적의 4.3%에 불가한 평지에 집중해 있다. 따라서 꼭 둘러봐야 하는 명소 서 너 군데와 맛집, 카페를 끼워 동선을 짜면 당일치기 여행도 가능하다. 하지만 내게는 비싼 돈을 치러 얻은 여유와 이 고장과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가슴속에 담겠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1박 2일의 일정으로 천천히 돌아보기로 했다.
다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주린 배부터 채우기로 하고 2년 전에 방문한 향토 음식 전문점 이로리(いろり)에 들어갔다. 합장 가옥 두 채를 이은 가게 중앙으로 일본 전통 난방 기구인 이로리가 놓인 가운데 종업원 몇몇이 분주히 음식을 들고 날랐다. 그중 인기척을 느낀 직원 한 명이 인사를 건네며 햇살 좋은 자리로 안내했다. 따듯한 온기가 스며든 공간에 앉은 후 일전에 먹은 이로리 정식(いろり定食)을 주문했다. 해산물 일색인 타지역과 달리, 깊은 산속, 매서운 겨울과 공존한 시라카와고는 산채 나물과 구황 작물을 중심으로 독특한 식문화가 발전했다. 또한 보다 깊은 풍미를 느끼고자 하는 과정에서 호바 미소(朴葉味噌)라는 된장이 탄생했다. 혹독한 추위 탓에 음식을 발효하거나 절이는 족족 꽁꽁 얼어버려 보존식 문화가 발달하지 못한 시라카와고에서 궁여지책으로 절임 음식을 불에 데워 먹다가 등장한 게 호바 미소였다.
과정은 이러했다. 서리 내릴 무렵, 주민들은 산과 들에 떨어진 박엽 나뭇잎을 주워 와 3일가량 소금물에 담갔다. 이후 물로 잎을 헹구고, 살균된 잎 위에 향신료와 파를 넣어 양념한 된장을 올려 구워 먹었기 시작했다. 이렇게 탄생한 호바 미소는 달달하고 진한 맛으로 기후현을 대표하는 향토음식으로 자리매김했다. 초기에는 된장에 버섯과 산나물을 곁들여 먹는데 그쳤으나, 시간이 흘러 지역 명물 소고기인 히다규(飛騨牛)를 더해 먹는 문화로 발전했다.
맛으로 말할 것 같으면 쌈장 보다 2-3배 단 된장을 구워 먹는 느낌. 걸쭉함은 적으나 기존 일본 된장보다 당도가 높고 맛도 깊어서 밥에 섞어 먹으면 밥도둑이 되고, 소고기에 찍어 먹으면 육질이 세 배 가량 황홀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렇듯 식욕을 돋우는 호바 미소를 위시로 지역에서 난 부드러운 소고기와 신선한 채소, 식감 좋은 두부, 찰진 쌀밥 등으로 구성된 이로리 정식은 손님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다. 단, 일본 음식이 익숙하지 않거나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호바 미소의 달짝지근함이 이질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햇수로 일본 생활 10년 차를 넘어선 데다, 쌈장과 김만 있어도 밥 두 그릇은 거뜬한 내게 ‘호바 미소’의 풍미는 걸림돌이 되지 못 했다. 그리하여 음식 나오기가 무섭게 분주히 손을 움직였다. 뜨끈뜨끈하고 달짝지근한 호바 미소를 밥과 반찬에 곁들여 먹는 재미가 어찌나 쏠쏠한지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먹어 치웠다.
배도 채웠겠다 본격적으로 마을을 돌아보기로 했다. 먼저 식당 지척에 있는 와다케(和田家) 저택에 방문했다. 마을에 남은 합장 가옥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이곳에는 대대로 시라카와고를 이끈 와다 가문의 발자취가 남았다. 전국 시대 이래로 400여 년간, 와다 가문은 쇼야(庄屋)라고 하는 촌장직과 더불어 마을 공금 관리, 양잠업(누에고치에서 추출한 생사로 비단을 만드는 산업)에 종사한 한편, 비밀리에 화약 제조에도 손을 댔다. 그러는 한편 1573년부터 가문의 대를 잇는 후계자들은 야에몬(弥右衛門)이라는 이름을 물려받기 시작했는데 이들 야에몬은 대대로 가문의 번영과 고장 발전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이렇듯 지난 시간, 동네 구심점이 된 저택은 ‘마을 최대 가문 집안’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했다.
흰 눈 소복이 내려앉은 드넓은 대지 위에 우뚝 선 저택은 3-4층짜리 다세대 주택에 버금갈 정도로 으리으리했고 이중 상당수를 가파른 지붕이 차지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매년 쏟아지는 폭설로 인해 집이 붕괴하는 것을 막고자 지붕을 가파른 시옷 자 모양으로 세운 합장 가옥은 지붕 하중을 견딜 수 있도록 크고 두꺼운 들보를 여럿 두어 무게를 분산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리고 지붕을 덮는 재료로는 가야부키(茅葺, 억새와 갈대)를 썼는데 이들 억새 지붕은 30년 주기로 교체해야 했다. 하지만 크기가 상당한 탓에 교체 작업에는 100명 이상의 인력을 요했다. 때문에 주민들은 유이(結)라고 하는 공동체를 결성해 서로의 지붕 교체를 도왔다. 그리고 이때 마을 촌장은 이웃의 지붕 갈이에 참여한 구성원 이름을 유이쵸(結帳)라는 메모장에 기입했다. 이때 기록에 올라간 주민들은 훗날 본인 집 지붕을 교체할 때에 다른 구성원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이렇듯 자연에 순응하는 인간의 지혜와 공동체 의식이 깃든 합장 가옥.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와다케 저택은 웅장한 외관만큼이나 실내에도 볼 거리가 많았다. 일반적으로 합장 가옥은 3~4층 구조로 구성되는데 1층은 가족 구성원들의 생활 공간으로 쓰였다. 이때 각 방을 데이(でい)라 불렀고, 데이와 조금 떨어진 곳에 난방 기구이자 조리 기구인 이로리를 뒀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설치된 이로리 근처로는 가문의 역사와 발자취를 가늠할 수 있는 유물과 기록이 전시되었다. 유물 중에서는 옻칠 그릇과 같이 세간살이와 관련한 것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이로리와 마주 보는 건너편 벽 뒤로는 후스마(나무틀을 짜서 양면에 두꺼운 헝겊이나 종이를 바른 문)로 구획을 나눈 다다미방이 이어졌고, 방 가장 구석자리로는 화병과 걸개 등을 둔 공간인 도코노마(床の間)가 자리했다. 바닥이 다소 차갑긴 했으나 생각만큼 춥진 않아서 실내 곳곳에 있는 전시품을 구석구석 살핀 후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을 잇는 가파른 나무 계단 중간쯤에는 츄 니카이(中2階)라고 하는 다락방이 존재했다. 오래전에는 집안일을 돕던 사람이 이곳에 머물렀다고 하는데 지금은 가재도구만 남았다. 눈 대충으로 실내를 훑은 다음 남은 계단을 마저 오르자 지붕을 떠받치는 나무 기둥과 들보, 그 옆으로 양잠과 관련한 전시품이 등장했다. 그리고 실내 끝, 커다란 나무 창틀 건너편으로는 마을 전경이 펼쳐졌다. 눈앞으로 평화로운 풍경이 자리한 가운데 흰 눈 덮인 눈밭에서 사진을 찍거나 눈싸움을 하는 여행객들의 웃음소리와 이따금 지저귀는 새소리가 마음을 평안하게 해줬다.
‘어쩜 이렇게 아름다울까..’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진심을 담아 혼잣말을 내뱉고는 카메라로 순간을 담으며 건물 구경을 마쳤다.
합장 가옥 옆 합장 가옥
숱한 발자국이 남은 골목길을 지나 마을 중앙을 관통하는 대로에 진입했다. 동네 끝까지 이어지는 도로 양옆으로 줄지어 선 지붕 처마에 아슬아슬 매달려 있던 고드름이 녹아 내리는 가운데 여행객들은 고기 호빵(니꾸망)이나 꼬치와 같은 주전부리로 몸을 녹였다. 그들 틈에 서서 고기 호빵 한 입 베어 문 다음 몇 백 보 더 걷다가 왼쪽 비좁은 골목길로 빠졌다. 구수한 시골 정취가 묻은 흙 길을 따라가던 중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에 귀가 쫑긋거렸다.
눈앞으로는 겨우내 쏟아진 함박눈과 고드름이 녹아든 냇물과 수력을 이용한 디딜방아(唐臼)가 놓인 창고가, 바로 뒤편에는 와다케 저택의 절반 크기쯤 되는 합장 가옥이 위치했다. 1800년대 초, 와다 가문의 차남이었던 와다 사지에몬(和田 佐治衛門)이 분가해 세운 칸타케(神田家) 저택이다.
저택이 선 자리는 본디 우부즈나 하치만궁(産土八幡宮, 신사 이름)이 관리하던 ‘논’이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신사가 소유한 논을 신덴(神田)이라 부르는데, 이를 훈독으로 읽으면 칸다(神田)였다. 때문에 와다 사지에몬은 땅 매입을 계기로 성을 칸다로 바꾼 다음 이름도 기치에몬(吉右衛門)으로 개명했다. 이후 그의 후손들은 화약 제조와 양잠업, 양조업에 종사하며 이곳에 살았다. 앞서 건물 옆에 있던 디딜방아 창고도 술을 빚던 가문의 ‘발자취’ 중 하나다. 여하튼 오늘날에는 5대 후계자부터 7대 후손에 이르기까지 3대가 역사를 잇고 있다.
눈 덮인 마당을 지나 실내로 들어가자 현관 바로 옆에 마련된 공관에서 입장권을 판매하던 여성 한 분이 살갑게 맞아 주셨다. 본인을 6대 후손 며느리라 소개한 그녀는 어디에서 왔고, 이 동네에는 언제 도착했으며, 얼마나 머물 예정인지. 맛있는 음식은 먹었는지, 속사포 같이 질문을 건네던 그녀는 이내 건물과 관련한 역사 이야기를 읊기 시작했다.
설명에 따르면 저택은 대략 1818년부터 10년간 지은 걸로 추측하며, 다이구(宮大工, 신사와 불당과 같이 대형 건축물을 세우거나 보수하던 전문 목수 직업군)의 손길을 거친 덕에 마을에 소재한 그 어떤 합장 가옥보다 정교하고 튼튼하게 지어졌다고 한다. 이를 증명하듯 건물 내부는 사원과 같은 대형 건축물에서나 볼 법한 큼직한 들보와 기둥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이들 구조물에 둘러싸인 1층은 와다케 저택과 마찬가지로 가족들의 생활 공간으로 쓰였다. 현관과 다다미방, 응접실 등 여러 공간이 존재한 가운데 실내 중앙 커다란 이로리가 놓인 곳을 오에(おえ)라 불렀고 바로 맞은편 벽에는 4대 후손 며느리가 시집올 때 입고 온 옷으로 만든 노렌이 걸려 있었다. 화사한 노랜 건너편, 빨갛게 타오르는 불길에 손을 가져다 대자 그녀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로리 연기가 심하죠? 조금 메슥거리기는 해도 방충효과에는 탁월하답니다. 또한 여기서 발생한 열기는 폭설에 젖은 억새 지붕을 말려주는 역할을 해요. 매일같이 이로리에 불을 지피는 합장 가옥의 지붕 교체 연한이 40~50년인데 비해, 그렇지 않은 집의 지붕 교체 연한이 30년 정도에 그치는 걸로 그 효과를 확인할 수 있어요. 게다가 예전에는 이 열기를 이용해 위층 다락방에서 누에를 키웠고, 불길에서 나온 재는 그릇을 닦는 세제 역할도 했답니다.
차분한 어조로 설명을 이어 나가던 그녀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른손을 이로리 옆 바닥으로 가져갔다. 손길이 향한 곳으로는 엔소아나(엔소아나(塩硝穴, 염초구멍)라 부르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오래전, 칸다 가문 사람들은 이 구멍을 통해 화약 염료인 염초를 생산했다고 한다.
이어진 설명에 의하면 에도 시대, 막부의 쇄국정책으로 초석(화학 칼륨의 질산염, 화약의 원료)을 구하지 못 한 지방 영주들은 군대 유지에 어려움을 겪었고, 이에 주목한 시라카와고 사람들은 남의 눈에 띌 염려가 적고 비밀 유지에도 용이한 지리적 환경을 활용해 염초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이때 주민들은 이로리 아래로 깊게 구멍을 판 다음 쑥과 누에 배설물을 넣어 5년가량 숙성 시켰고 이 과정에서 박테리아 작용이 일어나 질산칼륨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화약을 제조하는 일이 외부에 드러날 경우 해당 집안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에 문제가 발생하기에 화약을 제조하는 이들은 무엇보다 비밀 유출 방지에 힘 기울였다.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자 깊고 은밀하게 파 놓은 듯한 구멍 깊숙한 곳까지 살핀 후 자리를 털고 일어나 뒤편 다다미방으로 이동했다. 차가운 바닥 위로 세월 묻은 퀴퀴함이 묻은 방에는 오래된 전화기와 시계를 비롯해 옛 세간살이가 어우러져 예스러움의 정점을 찍었다. 동원 가능한 모든 감각을 활용해 순간을 담았다.
‘1층 소개는 여기까지예요. 저기 계단을 따라가시면 2층이 나오는데요. 중간쯤에 츄니카이라는 다락방이 있을 거예요. 거기서 오른쪽 벽을 주목해 주세요. 올라가 계시면 뒤따라 가서 마저 설명드릴게요.’
‘고맙습니다.’
와다케 저택과 마찬가지로 1층과 2층 사이에 자리한 다락방 츄2카이(中2階)에는 독특한 장치가 존재했다. 실내 오른편 벽에 마련한 히미마도((火見窓/ 불을 보는 창문)라는 창이 그 주인공으로 장자상속이 당연시되던 시기, 이 공간에 머물던 집안 내 미혼 남성들은 수시로 창을 들여다보며 1층 이로리에서 피어오르는 불길을 살폈다.
때마침, 정원에서 장작을 패던 5대 후손이 들어와 불쏘시개로 불을 지피자 희미해지던 불길이 되살아났다. 달콤한 솜사탕에 시선을 빼앗긴 아이 마냥 한참 동안 불길을 응시하다 2층으로 올라갔다.
1층 못지않게 넓은 2층에는 양조 도구와 생활용품이 남았다. 옛사람들의 손길이 묻은 여러 전시품 가운데 눈길을 끄는 건 주민들의 의복과 지붕 교체 때 억새를 엮는 누이바리(縫い針), 눈 위에서 목재를 나르는 기구인 테조리(手ぞり)와 같이 지역성에 맞춘 도구들이었다.
여기에 전시품 뒤편으로 큼직한 지붕을 지탱한 기둥과 들보 사이로 코마지리(駒尻)라는 구조물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코마지리란, 60도에 가까운 경사 지붕을 구성하는 두꺼운 합장 기둥(合掌梁, 지붕을 지탱하기 위해 비스듬히 세운 기둥) 끝을 팽이처럼 날카롭게 깎아 수평 들보에 끼운 것으로 기둥과 들보바닥을 못으로 고정하지 않은 덕에 지진이나 강풍에도 흔들리기만 할 뿐, 지붕이 폭삭 내려앉는 것을 막아준다. 평소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자연의 위대함’과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인류의 지혜에 감탄하고는 하는데 오늘도 혹독한 환경에 순응하는 과정에서 잉태한 건축 양식을 보면서 여러 번 감탄사를 내뱉았다.
그 사이 6대 후손 며느리가 올라왔다. 그녀를 따라 3층으로 향했다. 2층보다 훨씬 비좁은 공간에는 지난 시간, 주민들의 생계를 지탱한 ‘양잠업’과 관련한 전시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예로부터 농경지가 부족하고 교역이 원활하지 못해 사냥과 채집 말고는 내세울 산업이 전무했던 시라카와고에 있어 양잠업은 마을을 지탱하는 주된 수입원이었다. 당시 주민들은 실내 2~4층을 창고 겸, 양잠 작업 공간으로 활용했는데 누에의 성장에는 ‘열기’가 필요했다. 때문에 집을 지을 때 2층부터 4층 바닥 사이사이에 틈을 뒀고, 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열기는 누에의 생존뿐만 아니라 마을 주민들의 생계도 책임졌다.
‘유이(結)라는 공동체에 속한 모든 주민들은 서로 협력하며 누에를 키웠답니다.’
그녀의 생생한 설명과 잘 관리된 전시품 덕에 3층 중앙에서 옛사람들이 누에를 기르던 모습이 그려졌다. 아울러 지난 200여 년간, 7대 후손에 이르기까지 저택을 지켜 온 집안사람들의 보존 정신과 두터운 애정이 깃든 이곳에서 그 어떤 역사 유적에서도 느끼지 못 한 ‘사람 냄새’와 온기를 느꼈다.
독일의 시인 스테판 게오르게(1868~1933)는 그의 시 ‘말’에서 ‘말이 부서진 곳에서는 어떠한 사물도 존재하지 않으리라.’라는 말로 언어가 사물에 고유한 존재를 부여함을 역설했다. 그가 말하고자 한 바와 다소 궤는 다르나 방문객들에게 저택이 품어 온 이야기를 들려주는 후손들이 있는 한 칸다 가문 저택은 오래오래 ‘부서짐’ 없이 ‘따듯한 온기 머금은 공간’으로 기억되지 않을까…라는 감상과 함께 칸다 가문 저택에서의 일정을 마쳤다.
‘바쁘실 텐데 1층부터 3층까지 상세히 설명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집을 지키고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게 제 일인 걸요. 그럼 시라카와고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시고, 다음에도 꼭 방문해 주세요.’
인사를 나눈 후 밖으로 나서자 푸른 하늘과 쨍쨍한 햇볕이 나를 반겼다. 다만, 아까 전보다 거리 위에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어둑해지기 전에 일정을 소화하고자 페이스를 올렸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맞은편에 있는 나가세 가문 저택(長瀬家)에 들어갔다. 이곳은 에도시대, 마에다 가문의 주치의(御典医)였던 나가세 가문의 보금자리로 당시에 쓰던 의료 기구를 비롯해 미술품과 생활 전시품이 남았다. 또한 500년 이상 된 불단도 보였다.
앞서 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합장 양식을 띤 이 건물은 1890년, 5대 후계자인 나가세 타미노스케(長瀬民之助)가 지은 것으로 총 5층 규모를 자랑한다. 생활 공간이었던 1층과 침실 역할을 한 2층, 누에를 키우던 3~5층까지 보존된 이곳을 짓는데 들어간 비용은 800엔(오늘날 1,600만 엔)에 달하며 이와 별개로 쌀 5600Kg(40석, 오늘날 금액으로 200만 엔), 술 1,995리터(11석 8두)가 들었다고 한다.
이후 100년간, 정성스러운 손길로 옛 모습을 지켜낸 저택은 지난 2001년에는 대대적인 지붕 교체를 단행했다. 이 당시, 작업에는 전국에서 모집한 500여 명의 자원봉사자가 동원되었고, 교체 비용으로는 2,000만엔 가량 들었다.
마침 옆에 있던 일본인 가이드의 이야기에 따르면 지난 시간, 합장 가옥 개체 수와 인구 감소로 인해 마을 공동체 ‘유이’의 결속력이 약화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최근에는 지붕 교체를 하기 전, 전국에서 자원봉사자를 모으거나 전문적으로 진문을 갈아주는 업자에게 부탁을 하는 상황이란다. 게다가 지난 수 십 년간 무자비한 개발로 인한 자연환경이 변화로 지붕의 주 재료인 기후현 억새의 건조력이 크게 약해졌다고 한다. 그 결과 최근에는 구마모토현 아소산에서 채집한 억새를 들여오고 있는 실정이란다. 이후로도 집안과 관련한 설명이 이어졌는데 돈도 안 내고 귀동냥하는 게 미안하여 그들과 거리를 둔 채 실내 전시품을 둘러보고는 밖으로 나왔다.
이로써 첫날에 방문하고자 한 ‘문화재 구경’을 마무리했다. 다만 이대로 료칸에 가는 게 바로 근처에 있는 합장 가옥 찻집 오치우도(落人)에 들어갔다. 굵은 들보와 기둥 사이로 은은히 퍼지는 노오란 불빛 아래. 호호 아줌마를 닮은 주인장이 커피를 우려내는 주방과 탐스러운 과일 마냥 주렁주렁 내걸린 커피잔. 그 밖의 여러 장식이 놓인 가운데 바로 맞은편에는 이로리가 있었다. 이로리 왼편, 그러니까 주방과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아 단팥죽 한 그릇을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는 사이, 가게 직원에게 양해를 구해 실내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 그만 주인아주머니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이고, 인물 사진을 찍으려 한 게 아닌데...’
어찌나 민망했는지 양 볼이 붉게 상기되었다. 곧바로 ‘고멘나사이’(죄송합니다)를 외쳤다. 그러자 아주머니가 웃으며 화답했다.
‘괜찮아요. 마음껏 찍어도 돼요. 오늘 화장 잘 먹었거든’
넉살 좋은 웃음과 따듯한 한 마디로 민망함을 덜어준 아주머니는 앞서 칸다 가문 저택 후계자 분과 마찬가지로 어디서 왔고, 이 동네에는 얼마나 있을 건지 등을 물어봤다. 그런 다음 가게와 관련한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그중 중 하나를 빌리자면 몇 해 전, 원피스로 유명한 만화가 오다 에이이치로(尾田栄一郎)가 이곳에 들렀다고 한다. 당시 이 가게가 꽤 마음에 들었던 그는 이후 원피스 제566화 표지에 이곳 건물을 그려 넣었고 이를 계기로 국적 불문 많은 ‘원피스 팬’이 가게에 방문했다고 한다. 풍문으로만 들었지 한 번 도 본 적 없는 만화라 크게 와닿지는 않았으나 그가 남긴 ‘방명록 그림’을 액자로 걸어 둔 그녀의 마음만큼은 확실히 느껴졌다.
이후로도 아주머니는 가게와 관련한 이야기를 이어 나갔고 이를 벗 삼아 달달한 단팥죽 한 그릇 음미한 나는 시간이 흘러도 미화되지 않을 ‘행복’ 과 추억을 얻었다.
사실 시라카와고와 같이 많은 여행객들이 방문하는 관광지에 소재한 가게들은 끊임없이 드나드는 손님들로 인해 직원들이 지쳐 있기 마련이라 ‘실내 사진 좀 찍어도 될까요?’라 양해 구하는 것조차 미안한데 아주머니께서는 손님 한 명 한 명에게 눈길을 건네는 한편 재미난 이야기도 들려주시니 늘 혼자 여행하는 ‘입장’, 그러니까 ‘사람’으로 얻는 추억이 적은 내게는 얼마나 ‘큰 고마움’이었는지 모른다. 설사 그녀에게 나라는 존재가 잠시 머물다 간 손님 1에 지나지 않았을 언정, 내게 그녀가 ‘소중한 기억’으로 남았음에 설사 한 쪽만 기억되는 만남이라도 결코 헛되지 않은 것이라. 그렇기에 언젠가 다시 방문해 반갑게 인사 건네는 날을 학수고대하며 첫날 일정을 마무리했다.
시라카와고, 둘째 날
시라카와고 중심부 오기 마을(荻町)에서 1.6km 떨어진 료칸에서 하룻밤 묵었다. 1박(泊) 2만 6천 엔에 걸맞은 음식과 객실, 구름에 걸터 앉아 꾸벅꾸벅 조는 별님 달님이 보이는 노천탕에서 여유를 만끽했다. ‘숙박비’에 큰돈을 치르는 것에 납득 못하던 시절이 무색하게 제대로 된 휴식을 위해서라면 만 엔짜리 두세 장 건네는 것도 감수하는 직장인의 삶. 일상이 전쟁인지라 여행지에서만큼은 유유자적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한 ‘변화’였다.
다음 날, 석식만큼 푸짐한 조식을 먹은 다음 마을 입구로 돌아왔다. 이때 시간이 오전 10시 20분, 아직은 인적이 드문 거리에 선 채로 1분가량 ‘하루 일정’을 짜다 마을 전경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오기마치 성터 전망대(荻町城跡展望台)로 향했다. 관광 안내소 직원의 말에 따르면 16세기 말까지 존재한 성터 주변에 들어선 전망대에 가기 위해서는 와다 가문 저택 앞에 서는 셔틀버스를 타거나 두 발로 걸어가는 것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단다. ‘시간은 금이다.’라는 믿음으로 사는 탓에 평소라면 일말의 고민 없이 전자를 택했겠으나 하늘은 맑고 바람은 선선하며, 발길은 깃털처럼 가벼워 걸어 후자를 택했다.
버스 터미널 기준, 마을과 반대한 2차선 도로를 따라 걷다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언덕길에 진입했다. 가파른 언덕 양옆으로는 족히 10m는 넘어 보이는 눈더미가, 사이 사이로는 합장 가옥 몇 채가 고개를 들었다. 풍문으로만 듣던 설경에 입이 쩍 벌어졌다. 그러는 동안 여행객 몇 명을 태운 셔틀버스가 지나갔다. 점점 멀어지는 버스 뒤꽁무니를 좇아 남은 경사 길을 오르자 드넓은 눈밭이 등장했다.
맑고 푸른 하늘 아래로 흰 눈 곱게 쌓인 동화 같은 풍경은 구름 위에 선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천국이 존재한다면 이런 곳이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한편 일개 여행객에 불가한 나를 영화 속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절경. 눈 쌓인 모습을 설명하려 모든 수식어와 내 모든 감성을 끌어오려는 게 누군가에게는 납득이 안 갈 수도 있겠으나 5년에 한 번 함박눈이 내릴까 말까 한 남쪽 나라에서 20년을 산 내게는 어지간한 호들갑으로는 주체하기 힘들었다. 따라서 모든 순간을 기억하고자 눈 한 번 감지 않고 전망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잠시 후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 인적이 느껴졌다. 도착을 직감하며 가방을 고쳐 메고 한달음에 뛰어갔다. 산 정상에 우뚝 선 전망대 휴게소 앞 작은 공터에는 안면도 없는 이들이 익숙한 모습으로 저마다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주전부리를 뜯는 사람, 인증 사진을 찍는 사람, 행복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등 여러 군상을 뒤로하고 전망대로 이동했다.
‘짜잔!’
두 손으로 전망대 앞에 설치된 난관을 짚은 채 눈을 크게 뜨자 흰 눈으로 옷깃을 여민 설산과 고깔모자 닮은 지붕을 덮어쓴 합장 가옥 백여 채가 옹기종기 모인 겨울 왕국이 한눈에 들어왔다. 눈을 반짝이게 하는 이 신비로움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고민하다 떠올린 게 ‘아름답다.’라는 형용사를 형상화한 게 시라카와고가 아닐까?
와 같은 다소 오글거리는 감상이었다. 그런데 열 손가락이 오그라들 ‘표현’을 거침없이 해도 거리낌 없을 만큼 눈앞에 자리한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거기에 신기롭고 평화롭기까지 하니 이런 ‘정취’를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우와.’ 라 소리 내어 감탄하는 것과 인증샷을 남기는 게 고작이었다. 그리하여 원 없이 감탄사를 내뱉다 카메라를 들었다. 뷰 파인더에 시선을 놓고 검지로 조리개를 맞춘 다음 숨을 참고 촬영 버튼을 눌렀다. 아름다운 풍경 덕분인지 감성이 이성을 뛰어넘어서인지 그 여느 때보다 ‘차르륵’하는 셔터 소리가 감칠맛 났다.
이후 각기 다른 각도로 사진 몇 장을 더 찍은 후 전망대 뒤편 휴게소에 들러 고헤이모치 (五平餅) 라는 간식을 먹었다. 흰떡꼬치에 호바 미소를 칠한 이 주전부리는 쫀득쫀득하면서 달달한 게 매력이었다. 다만, 양이 너무 적어서 휴게소 바로 옆 돗코라쇼(どっこらしょ)라는 가게에 들러 기다란 카레빵을 하나 더 먹었고 그제서야 (비로소) 포만감을 느꼈다.
다시 마을로
알찬 먹부림을 끝내고 마을로 내려갔다. 시간 절약 차원에서 내려가는 길은 셔틀버스를 이용했다. 5분 만에 도착한 마을 내 버스 정류장 앞 대로를 따라가다 강과 인접한 오른편 골목길로 진입했다. 큼직한 합장 가옥 몇 채 사이로 이어지는 길을 걸었다. ‘관광지’를 살짝 비켜간 거리에서 주민 몇몇과 마주쳤다. 한 노인은 강아지와 산책을 했고, 볼 빨간 아주머니는 집 앞을 쓸었다. 아주머니 집 뒤 합장 가옥에 사는 아저씨는 지붕에 올라가 눈을 털어냈다.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마을에서 각자의 일상에 충실한 군상들을 뒤로하고 쭉 걸었다. 3분 정도 지났나? 상점 몇 개가 밀집한 삼거리 골목이 나왔다. 오른쪽으로 돌아 오십 보 백 보 걷자 마을 옆을 가로지르는 쇼 강(庄川)과 다리가 나왔다. 데아이바시(であい橋・만남의 다리)라 불리는 다리 맞은편으로 호무라진 미술관이 있었다. 그 앞에는 합장가옥 스무 여섯 채가 옹기종기 모인 갓쇼즈쿠리 민가원(民家園)이 자리했다. 마을 여기저기에 있던 합장 가옥들을 한곳에 모은 민가원에서는 매년 4월 중순부터 10월 사이에 짚신 만들기와 소바 만들기, 염색 등 옛사람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체험이 열린다. 모처럼 먼 길 했음에도 시기가 맞지 않아 체험을 못 해 보는 게 아쉬웠으나 뭐 어쩌겠나. 다음을 기약하며 민가원 내부를 살피는데 의의를 뒀다.
30 분 남짓한 구경을 끝으로 민가원을 나섰다. 마을 중앙으로 돌아가는 다리를 건너려는 찰나 배에서 ‘꼬르륵’하는 신호가 울렸다. 아침부터 여기저기 돌아다닌 탓에 허기가 진 모양이다. 그리하여 앞서 걸어오던 길에 발견한 식당에 방문했다. 일말의 기대도 없이, 그저 배나 채울 요람으로 들어간 식당 내부는 손님으로 북적거렸다. 잠시 기다려야 하나 생각하던 찰나 직원이 내게 말을 걸었다. 창가 자리가 났단다. 가족 단위 여행객 틈에 앉아 말차 자루 소바와 유부초밥, 커피 한 잔을 시켰다. 맛으로 말할 것 같으면 동네에 하나쯤 있을 법한 가게. 면에서 말차 맛이 나고 유부가 따뜻한 것 제외하면 특별한 게 없었다. 그럼에도 이곳이 만족스러웠던 이유는 다름 아닌 ‘풍경’ 때문이었다. 자리 바로 맞은편, 크게 난 창문 뒤로 펼쳐지는 경치가 일품이었다. 눈 덮인 마을과 합장 가옥을 구경하며 식사를 하다 보니 평범한 맛도 특출나게 느껴졌다. 이에 힘입어 소바 한 가닥부터 커피 한 방울에 이르기까지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입보다 눈이 즐거운 식사를 끝내고 발길을 재촉했다. 좁은 길을 돌고 돌아 마을 중앙을 관통하는 대로에 올라탔다. 지붕에 붙어 있던 눈이 녹아 물방울로 뚝뚝 떨어지는 합장 가옥과 주택을 사이에 둔 길을 따라 뚜벅 걸음 했다. 상점 몇 곳과 하치만 신사(八幡神社)를 지나자 왼편으로 눈 덮인 양잠 전시관이, 오른쪽으로는 큼직한 나무와 이웃한 합장 가옥이 세 채가 등장했다. 이들 가옥은 시라카와고를 알리는 안내 전단지와 방송에 종종 출연하는 배경으로 시라카와고 여행 시 꼭 들러 봐야 하는 곳으로 손꼽는다. 다만, 방송에서 보던 모습을 보려면 건물 측면과 마주한 눈밭 중앙까지 들어가야 했다. 이미 많은 여행객들이 다녀갔는지 눈밭은 발자국 투성이었다. 얼핏 가장 딱딱해 보이는 곳으로 향했는데 발을 내딛는 족족 무릎까지 푹 빠졌다. 눈을 밟은 적은 있어도 이렇게 깊게 빠져본 경험은 처음이라 생경함을 느꼈다. 그러던 중 실수로 무게 중심을 놓치며 눈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누가 봤으면 어떡하나?라는 부끄러움도 잠시. 이왕 쓰러진 거 영화 <러브 스토리>에서 주인공 올리버와 제니퍼가 함박눈 위에 몸을 내던지듯 덜렁 누웠다. 차가우면서도 폭신한 감촉이 어색하면서도 신기하게 다가왔다. 잠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 코끝을 두드리는 바람이 향하는 곳으로 몸을 일으켰다.
‘좋다.’
찰나 한순간, 나이를 잊은 채 어린아이 마냥 철퍼덕 누워 눈 장난을 친 게 훗날 눈 내릴 때마다 떠오를 작고 소중한 추억이 되었음을 느끼며 마을로 돌아갔다.
합장 가옥 구조의 사원과 커피 한 잔
팔을 들어 손목 시계를 쳐다 봤다. 2시 25분, 뭐 한 것도 없는데 한나절이 지났다. 걸음을 재촉해 마지막 ‘관광 명소’인 묘젠지로 향했다. 어제 들른 와다 가문 저택이 마을 내에 소재한 합장 ‘가옥’ 중 최대 규모의 건축물이었다면 지금 눈앞에 선 묘젠지 향토관 (明善寺 郷土館)은 마을 내에 있는 건물 중 가장 큰 건축물이다. 사원으로서는 드물게 합장 가옥 형태를 한 이곳은 1825년부터 3년간 경험 많은 목수들이 힘을 모아 지은 ‘사원’이다. 경지 내 건물로는 정문 역할을 한 쇼로몬(鐘楼門)과 제를 모시던 본당, 부엌과 사무실 양잠 작업장을 포함한 구리(庫裡)가 있다. 꼭대기 층에는 합장 지붕을 올리고 그 아래로 ‘판자 지붕’을 둔 쇼로몬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건축 양식을 띠는데 이를 짓는 데만 1425명의 인력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쇼로문 뒤편에 자리한 본당 또한 합장 지붕으로 제 몸을 치장했다. 목재 조달부터 건설에 이르기까지 총 인원 9191명을 동원한 한편 최고급 자재를 엄선해 지은 이곳은 2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큰 부식과 갈라짐을 경험하지 않았다고 한다. 큼직한 기둥들이 지탱하는 내부, 불당과 제등이 놓인 실내에는 그윽한 향이 흘렀고 기둥과 기둥 사이 널찍한 벽에는 일본 내에서 명성 높은 벽화 화가 하마다 다이스케(浜田泰介)가 그린 장벽 화가 걸려 있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후지산의 변화’를 표현한 벽화가 지닌 장엄함은 나를 숙연케 했다.
그리하여 잠시, 차분한 마음으로 후지산 그림을 바라보다 본당과 이웃한 쿠리(庫裡)로 이동했다. 기다란 복도 뒤로 위치한 쿠리는 건축면적 108평, 총 높이 15m에 이르는 대형 건물로 사무실이 자리한 1층은 이로리에서 발생한 연기와 발자국이 나무 바닥에 마찰하며 발생한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앙상블을 이뤘다.
그리고 실내 한쪽, 검고 어둑함을 머금은 계단을 타고 올라간 2층과 3층에는 여타 합장 가옥과 마찬가지로 양잠 도구가 농기구가 있었다. 또한 건물 측면에 커다랗게 뚫린 창문 밖으로는 소소한 마을 전경이 펼쳐졌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소리와 물소리, 누군가의 웃음소리에 귀 기울인 채 이제는 익숙해진, 그럼에도 질림 없는 풍경을 바라보며 평온함을 만끽했다. 그런 다음 1층으로 내려가 이로리 앞 방석에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빨갛게 피어오르는 불길에 손발을 맞대며 몸에 묻은 추위를 털어냈다.
묘젠지를 끝으로 목표로 한 명소를 다 방문했다. 이는 1박 2일 여정에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다만, 나고야로 돌아가는 버스 출발까지 50분가량 남은 데다 이대로 버스 등 돌리는 건 아쉬워서 몸도 녹이고 마음도 달랠 겸 어제 봐 둔 합장 가옥 커피집에 들렀다.
메뉴라고는 커피 한 잔이 전부인 가게 중앙, 마을 전경과 설산이 보이도록 크게 창을 튼 자리에 앉아 베레모 쓴 주인장 할아버지가 따라준 커피를 음미했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원두 커피에 설탕과 크림을 넣고, 그 위에 일말의 아쉬움까지 올린 후 목젖을 당겨 짙게 목 넘김 했다. 은은한 황홀함과 감미로운 카페인 향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어깨에 긴장이 풀렸고 아쉬움도 사라졌다. 비로소 100% 만족스러운 '여행'을 했다는 마음의 소리와 함께 1박 2일 여정에 종지부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