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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박탄호 Oct 30. 2022

일본의 작은 마을, 사가현 요부코

1년에 하루만 쉬는 일본의 3대 아침 시장을 만나러 



소쿠리에 담긴 장인 정신





오전 6시 20분,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폈다. 고개를 돌려 창문 커튼을 젖히자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쬈다. 슬며시 연 창문 틈으로는 싱그러운 바닷바람이 들어왔다. 멍하니 앉아 잔잔한 물결 위로 시선을 내려놓았다. 그러길 10여 분, 정신을 차리고 샤워를 끝낸 다음 짐을 챙겨 나왔다. 출근 날도 아닌데 이른 아침부터 서두르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어제 들른 가라쓰 은행 근처로 길게 누운 아케이드 시장 초입에 있는 노포(老舗) 가와시마 두부점(川島豆腐店)에 가기 위해서다. 간세이 연간(寛政年間, 일본의 연호. 1789년부터 1801년 사이)부터 가라쓰 영주에게 두부를 헌상한 이 가게는 2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두부 전문점이다. 







이곳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 유서 깊은 두부 가게가 뿌리내린 일본 사회에서 두부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상 그 이상이다. ‘나베 요리’와 같은 일식의 주재료로 쓰이는 한편, 여러 음식에 영향을 미쳤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오뎅이다. 12세기 일본 사회에서는 꼬챙이에 꿴 직사각형 두부에 미소를 발라 먹는 덴가쿠((田楽)가 유행했는데, 훗날 오뎅으로 발전했다[1]







또한 1782년에는 다양한 두부 요리법을 소개하는 두부백진 (豆腐百珍)이라는 서적이 출간되었으며, 1960년도에는 전국에 5만 곳이 넘는 두부 공장이 존재할 정도로 ‘국민 음식’ 역할을 했다. 하지만 복잡한 제조 과정과 시대 발전에 따른 식재료의 다양화로 두부의 수요가 줄면서 현재는 5천 곳 가량의 두부 가게가 남은 실정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두터운 장인 의식으로 양질의 두부를 만든 카와시마 두부 전문점은 2005년 7월 닛케이 신문 선정 전국 두부 맛집 1위에 올랐다. 2009년 7월에는 주간 문춘(週刊文春, 일본을 대표하는 주간 시사 잡지)으로부터 냉 두부가 맛있는 가게 1위에 뽑혔다. 이렇듯 맛으로는 전국 으뜸가는 곳이라 영업 내내 문전성시를 이룬다. 







그리고 두부 가게 옆으로는 9대 점주인 가와시마 요시마사 씨의 아들이 운영하는 두부 요리점이 있다. 8시, 10시, 12시. 하루 세 차례 예약 손님 한정으로 문을 여는 식당에서는 다양한 두부 요리를 선보인다. 특히 오전 8시, 첫 영업 때는 공장에서 갓 만든 신선한 두부를 맛볼 수 있다. 






‘땡’






시침이 8을 가리키기가 무섭게 실내에 들어갔다. 직원과 눈 인사를 주고받은 다음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여기저기 살피는 사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두부 한 접시가 나왔다. 가게의 명물인 소쿠리 두부 (ざる豆腐・자루 토우후)다. 







1983년, 9대 점주인 요시마사 씨가 개발한 소쿠리 두부란 직경 22cm의 대나무 소쿠리 안에 두부 2KG을 담은 것을 말한다. 흔히 두부는 80도 이상의 온도를 가해 뜨겁게 끓인 두유에 간수를 부은 후 이를 물이 담긴 사각 틀에 옮겨 응고하는 과정을 거친다. 







반면 소쿠리 두부는 부드러운 식감을 위해 62-65도 정도로 두유를 끓인 다음 간수를 부어 소쿠리에 넣는다. 이때부터 응고가 시작하는데 소쿠리 틈으로 수분이 빠진다. 그 덕에 물에 담근 두부보다 식감이 쫄깃하고, 대두 본연의 향과 맛이 강하다. 







‘식기 전에 빨리 드세요. 하루에 한 번밖에 못 먹는 갓 완성한 두부예요. 오전 2시부터 6시간에 걸쳐 직원들이 성심성의껏 만들어서 맛있을 거예요. 바로 먹어야 그 진가를 알 수 있으니 얼른 드셔 보세요. 








모든 식사가 나오면 예쁘게 세팅해서 사진 한 장 찍으려고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두부 앞에서도 가만히 앉아 있는 나를 향해 요시마사 씨의 둘째 아들이 말을 걸었다. 







‘아! 그렇군요. 음식이 다 나오면 찍으려 했는데. 추억 한 장 남기잡시고 최고의 순간을 놓칠 뻔했네요. 고맙습니다.’ 







휴일을 만끽하러 왔지, 인증샷 찍으러 온 게 아니지 않냐며 기다림을 포기하고 젓가락을 들었다. 두부라고 하기에 쫄깃한 식감. 고소하게 퍼지는 대두 향. 기분 좋은 맛이었다. 이어서 나온 두유는 비린 맛없이 깔끔했으며 튀긴 두부와 푸딩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전체적으로 담백한 게 만족스러웠다. 












일 년에 364일 문을 여는 곳. 요부코 시장






두고두고 회자할 맛으로 둘째 날의 서막을 열었다. 지금부터는 타이쇼 시대(1912-1926) 이래로 100여 년간, 새해 첫날을 제외하고 364일간 영업하는 요부코 시장(呼子市場)으로 가려 한다. 








가라쓰 시내에서 버스로 40분 거리에 위치한 시장은 매일 오전 7시부터 12시 사이, 마을을 가로지르는 골목길 200m 양쪽으로 해산물과 과일, 채소 등을 판매하는 노점이 열린다.







이시가와현의 와지마 아침 시장, 치바현의 가쓰우라 아침 시장과 함께 일본 3대 아침 시장으로 뽑히며 매년 100만 명 이상의 여행객이 들르는 시장 주변은 어릴 적 동해안 여행 중에 만난 어느 어촌 마을 정취와 흡사했다. 







한편 민가 몇 채가 오밀조밀 모인 입구로는 경북 의성군 금성면에 있는 탑리 버스터미널을 연상하는 터미널이 자리했다. 세월이 묻은 건물 주변으로 적막함이 도는 가운데 때마침 가라쓰 시내로 가는 버스 한 대가 들어왔다. 







‘치익’ 






공기 빠지는 소리와 함께 차 문이 열리고 안내 방송이 울리자 낡은 대합실에 앉아 있던 손님 몇몇이 엉덩이를 떼기 시작했다. 무표정한 표정으로 차량에 오르는 이들을 뒤로하고 끼룩끼룩 갈매기 울음소리와 우렁찬 뱃소리가 뒤섞인 맞은편 부둣가로 걸어갔다. 














향수를 자극하는 바다 내음이 맴도는 바다 위로 오징어잡이를 끝내고 귀항한 어선 수 십 척이 휴식을 취했다. 그 주변으로는 어부 아저씨 몇몇이 그물과 조명을 손봤고. 놀이터의 회전무대(뺑뺑이) 마냥 무미건조하게 돌아가는 건조기가 오징어를 말렸다. 





이렇듯 전국 어디서나 볼 법한 어촌 마을 풍경이지만 한때는 잘나가던 항구 마을이었다. 1,300~1,400년 전부터 항구 역할을 하던 마을은 전국 시대에는 여러 지역에서 몰려든 회선(廻船, 화물 수송선)이 기항했다. 





에도 시대 초기에는 외국 선박을 감시하는 토오미반쇼(遠見番所)와 막부의 법령을 알리던 코사츠바(高札場)가 설치되었으며, 중기부터는 포경업(고래 잡이)으로 번영했다. 그리고 현재는 일본을 대표하는 아침 시장이자 오징어 산지로 손 꼽힌다. 이런 연유로 요부코에 들르면 오징어 회와 오징어 버거, 이카 슈마이(오징어가 들어간 만두 요리)는 꼭 먹어봐야 한다. 







‘배는 안 고프지만, 슈마이는 먹어 보자.’ 







부푼 기대감을 안고 항구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이카 슈마이를 파는 만보우'(萬坊)로 향했다. 터미널에서 100m 떨어진 시장 초입에 자리한 가게 앞에는 이미 손님 몇몇이 줄을 서 있었다. 그들 뒤에 서서 순서를 기다린 다음 먹음직스러운 슈마이 두 개를 시켜 먹었다. 







‘우와 이 맛이야!’ 







라 감동할 정도는 아니고, 여타 슈마이 맛집에서 파는 것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정도다. 겉이 부드럽고 속이 알찬 게 ‘호호’ 불어 먹기 좋았다. 







이른 아침 식사에 이어 식감 좋은 슈마이 두 개. 부풀어 오른 배를 움켜쥐고 시장으로 진입했다. 상인 몇몇이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는 입구를 시작으로 200 미터 골목으로는 60-70개의 노점이 늘어섰다. 그 위로 손님과 상인들이 분주히 흥정을 했다. 







한때 7,000명이 넘던 마을 인구가 급속한 도시화와 고령화에 따른 인구 유출로 4,000 명대로 줄면서 시장 규모가 축소하긴 했으나, 수많은 손님과 상인들이 어우러진 모습은 ‘일본의 3대 시장’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았다. 







한편 시장 중앙에는 ‘가라쓰 요부코 오징어 검정’이라고 해서 2006년부터 14년까지 요부코 오징어를 전국에 알리기 위해 실시한 오징어 관련 지식 시험을 알리는 동상이 남았다. 효고현의 아카시 문어 시험을 참고해 만든 ‘오징어 검정’은 첫 회에 448명이 응시할 정도로 화제를 모았으나 점점 응시자 수가 감소하며 2014년을 끝으로 폐지됐다. 







현재는 역대 합격자 이름을 새긴 작은 오징어 동상 만이 남아 지난 시절을 기린다. 그리고 동상 주변으로는 오징어로 가득한 가판이 줄을 이었다. 







그런 가운데 인상적인 모습 두 가지를 포착했다. 어시장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비린내가 적다는 점, 여타 일본 시장에서 볼 수 있는 아케이드 천정이 없다는 점이다. 특히 후자의 아케이드 천정이 없는 덕에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서 고향 마산의 진동 5일장을 떠올렸다. 오래전, 아빠 손잡고 거닐던 그 시절 그 풍경에 울컥해지려는 마음을 다 잡고 다시 걸었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시식과 구입을 권하는 어머님들과 눈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시장 끝자락에 자리한 추억의 상점 앞에서 발길을 세웠다. 1960-70년대에 즐겨 먹던 불량 식품과 장난감 등을 파는 가게에는 고사리 손을 흔들어 부모님을 보채는 아이들로 가득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호기심에 부풀어 올라서는 안으로 들어가 눈대중으로 이곳저곳 훑었다. 














에도시대 고래잡이의 흔적을 찾아서. 나카오 저택 





대충 간식거리 몇 개를 구입 후 가게 문을 나섰다. 상점 근처로 큼직한 전통 건축물 한 채가 보였다. 에도 시대, 고래 잡이로 큰 부를 쌓은 나카오 가문의 저택(中尾家屋敷)이다. 








18세기 초반부터 1877년에 이르기까지 170년간 8대에 걸쳐 포경업에 몸담은 나카오 가문의 흔적이 남은 저택은 시장과 함께 마을이 자랑하는 역사 유산이다. 지금 눈앞에 선 건물은 폐허로 방치된 것을 가라쓰 시가 인수, 이후 4억 엔의 예산으로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거쳐 2011년 4월에 개장한 것이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마을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가자는 마음에 안으로 들어가 입장권을 구입했다. 그러자 직원 한 분이 나와 말을 걸었다. 







‘괜찮으시면, 저택 내부를 안내해드리고 싶은데 어떠세요?’ 







정중히 안내를 권하는 직원은 마에다라는 스텝으로 건물 관리 및 안내사 일을 했다. 감사한 마음으로 그녀를 따라나섰다. 







“지금 계신 이곳은 나카오 가문이 8대, 170년에 걸쳐 포경업에 종사하며 이룬 결과물입니다. 일찍이 요부코 마을은 역대 가라쓰 영주의 영지이자 화물 수송선이 드나드는 ‘항구’로 번영했는데요.”







“17세기 중반에는 2대 영주인 데라자와 히로타카가 후손 없이 사망. 일시적으로 에도 막부가 요부코 일대를 관리했어요. 이를 계기로 마을에 토오미반쇼(遠見番所)와 막부의 코사츠바(高札場)등이 설치됐죠.” 







“이후 새로운 영주가 부임하면서 다시 가라쓰 영지에 포함되었고, 에도 막부가 문을 닫기까지 역대 영주 가문의 물물 거래소 역할을 했어요.” 







“그리고 같은 시기, 기슈 지방(現 와카야마현 일대)에서 새롭게 개발한 고래잡이 방법(그물을 던져 고래의 움직임을 제한한 다음 창살을 던져 목숨을 끊음)을 도입한 나카오 가문은 대규모 고래잡이 조직을 결성. 인근 오가와 섬(小川島)에서 포획을 실시했답니다. 






에도 시대를 그린 여러 그림 중 오가와 섬 고래잡이 전투『小川島鯨鯢合戦』라고 해서, 이들 조직이 고래를 사냥하던 모습을 그린 작품이 있는데요. 그림 한 쪽에 등장하는 호화로운 저택이 바로 지금 계신 건물입니다.”







"큼직한 건물 외관을 통해 느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나카오 가문의 고래잡이 조직은 종업원이 500명이 넘을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했습니다. 1789년, 요부코 마을 인구가 1174명이었으니 주민 두 명 중 한 명이 포경업에 종사했다 볼 수 있죠. ”







또한 조직 구성도 체계적이었습니다. 너나 할 거 없이 배를 타고 우르르 바다로 나간 게 아니었다는 의미입니다. 인근 오가와 섬에 설치한 미하리쇼(見張り所, 탐색 시설)에서 고래의 동태를 살피는 파수꾼(山見)과 고래 몸통에 칼과 창살을 던지던 하자시(羽指), 히자시의 견습생 격인 마스카코(増水主), 나야바 (納屋場)라는 작업장에서 고래 몸통을 해체 및 가공하는 작업자 등 업무를 세밀하게 나눴습니다. 






이렇듯 많은 이가 고래잡이에 동참한 데는 고래 한 마리로 얻는 이익이 막대했기 때문입니다. 에도 시대에는‘고래 한 마리를 잡으면 7개 고을이 배불리 먹는다.’라는 말이 있었는데요. 







고기는 식용으로, 기름은 등롱 연료와 논 병충해를 잡는 약으로, 뼈와 수염은 수공예품 재료로 활용할 수 있어서 한 마리 당 2,000만 엔(우리 돈 2억 원 상당)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이에 나카오 조직은 4개월에 50마리 이상의 고래를 포획하며 10억 엔 이상의 고수익을 올렸고요. 







그 결과 건물 후원에 있던 칸죠바(勘定場, 1883년 간죠바가 있는 자리에‘혼구라’라는 창고가 생김 ) 건물에는 센료바코(千両箱・금화 천 량이 든 노송나무 상자)가 한가득 쌓여 있었고, 마을에 부과된 어업세 중 7할이 고래잡이와 관련했다고 합니다. 또한 요부코 인근 주민들 사이에서는‘나카오 님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영주님 정도는 되고 싶어라.’라는 노래가 돌기도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3대 업주인 나카오 진로쿠(中尾甚六)는 1783년, 이곳을 가라쓰 영주와 대마도 영주, 소씨 가문이 머무는 ‘숙박 공간’으로 만들고자 부지를 넓히는 한편, 건물을 증축했습니다. 이때 세운 북쪽 별관의 건축 시기를 18세기 중엽으로 추정하는데 이는 규슈 북부에 남은 민가들 중 굉장히 오래된 편에 속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건물 내부로는 에도 양식과 메이지 양식(19세기 후반 건축 양식)이 혼재합니다. 




그런데 19세기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고래잡이 사업이 부진에 빠졌습니다. 4개월에 50 마리 이상 포획하던 예전과 달리 4-5마리 잡는 데 그치는 일이 빈번해졌습니다. 이윽고 1877년에는 고래잡이에 흥미를 못 느낀 8대 업주가 사업에서 손을 떼며 나카오 가문의 영광도 막을 내립니다. 







물론 이후로도 고래잡이는 이어집니다. 오가와시마 조직이 사업을 계승해 1949년까지 고래를 잡았고, 이후로도 한동안(1961년까지) 소형 포경선을 중심으로 밍크고래 잡이가 성행했습니다. 지금은 고래 대신 오징어잡이가 활발하고요. 







자, 제 설명은 여기까지이고요. 뒤로 나가시면 혼구라라고 하는 창고에 자료실이 마련되어 있으니 한 번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귀한 이야기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긴 시간 건물의 역사와 내부 장식, 가문 이야기, 고래 잡이 역사를 설명해 준 마에다 씨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후 뒤뜰에 있는 혼구라에 갔다. 이곳에는 고래잡이와 관련한 역사적 자료와 시대상이 가늠 가능한 있그림, 고래잡이 도구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다만, 잔혹한 고래 잡이 방법을 소개한 자료와 그림, 끔찍한 사진. 수많은 고래의 목숨을 끊은 도구를 너무도 의연하게 전시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안 좋았다. 그리하여 밖으로 나와 부둣가를 거닐었다. 






그러다 몇 해 전에 만난 붙임성 좋은 고양이와 재회했다. 3년 전, 내가 마음에 든 건지, 아님 먹이를 달라는 건지 다리에 꼭 들러붙어 온갖 재롱을 부리던 녀석이다. 첫 만남 때와 마찬가지로 수중에 줄 만한 간식이 없어서 아쉬운 대로 자판기에서 미네랄이 안 들어간 생수를 뽑아 줬더니 홀짝홀짝 잘 마셨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재롱을 부리다 한차례 몸을 털더니 그늘진 골목 가로 들어갔다. 






‘요부코에서의 일정도 여기까지 인가 보다.’ 





청명한 하늘 아래로 웅장하게 울리는 뱃고동, 앞머리를 살랑이는 바람과 신선한 바다 내음, 고향 진동 5일장을 연상케 하는 시장 풍경, 그 주변으로 자리한 분위기 좋은 카페와 고즈넉한 골목. 화려하진 않지만 마음에 여유를 주는 소소한 분위기 가득한 가라쓰에서 특별한 생일을 보내고 잘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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