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도의 눈물
히라도의 눈물, 히라도
이직을 앞두고 2박 3일 일정으로 여행을 떠났다. 네덜란드와 중국, 일본 문화가 혼재한 나가사키를 시작으로 일본 햄버거 1번지로 유명한 사세보에 들렀다. 미군 부대의 영향으로 서구 식(食) 문화 수용이 빨랐던 동네에는 햄버거 전문점이 많다. 이 중 시내 외각에 자리한 가게에 들렀다. 두툼한 빵 틈으로 먹음직스러운 패티와 양배추, 식욕을 돋우는 육즙이 흐르는 햄버거 한 입 물던 찰나, 지인 하나가 떠올랐다.
뺀질뺀질, 말 안 듣게 생겨서는 누구보다 성실했던 거래처 직원. 나를 ‘파꾸파꾸상’ 혹은 ‘파꾸파꾸찌’ 따위로 부르던 우에노(上野)였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일본 사람 치고 일도 빠릿빠릿하게 잘 하고 융통성도 있어서 평판이 좋은 청년이었다. 인성도 좋아서 외국인이라고 알게 모르게 무시하고 얕잡아보던 여타 거래처 사람들과 달리 나를 사람 대 사람으로 대해줬다. 그랬던 그가 몇 개 월 전 회사를 관뒀다.
‘파꾸파꾸찌, 히라도(平戸, 나가사키현 북서부에 소재한 섬)라고 아나? 나 이번에 고향으로 돌아가거든. 다음에 꼭 놀러 와. 배 태워 줄게.’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못 만날 것 같은 예감에 히라도 근처 사세보에 온 김에 그에게 전화 걸었다. 갑작스러운 연락에도 싫은 기색 없이 ‘왜 호텔 예약했어? 취소 안 되나? 우리 집에서 자고 가. 아니면 밥이라도 먹자.’라며 나를 반겼다.
아름답고 푸른 히라도
전화를 끊고 페달을 밟아 1시간가량 달렸다. 마을 관문인 히라도 대교를 지나 좁은 국도에 진입했다. 약속 시간까지 3시간 정도 여유도 있겠다. 일본의 각종 광고에 등장한 바 있는 카와치 고개(川内峠:카와치도게)로 향했다. 섬 북쪽에 자리한 이 구릉은 넓은 들판 아래로 내다보이는 경관이 으뜸이다.
다만 구릉까지 가는 대중교통이 전무한 탓에 국외 여행자의 발길은 뜸한 모양이다. 여하튼 이 아름다운 곳에 가기 위해 가파른 산길을 타고 한참을 달렸다.
몇 분 후. 차창 밖으로 푸른 바다가 보였다. 보아하니 목적지에 다다른 모양이다. 좀 더 힘을 내 남은 경사를 마저 오르자 널찍한 주차장이 나왔다. 차를 대고 밖으로 나가자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그 세기가 오래전, 한려 해상 국립공원에서 맞은 것과 흡사했다.
‘그러네. 바람이며, 경관이며, 이 동네... 남해와 닮았네.’
흩날리는 머리를 추스를 틈도 없이 사정 없이 내려치는 강풍에 맞서 가파른 언덕 계단을 밟았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색다른 풍경이 나타났다. 그렇게 5분. 정상에 오르자 그림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맞은편으로 널찍한 바다와 높은 하늘이 ‘누가 누가 더 파랗나.’를 두고 경쟁하는 사이 이웃 섬과 저 멀리 쿠주쿠시마 등 크고 작은 섬 위로는 삼삼오오 조각구름이 모여 장관을 이뤘다.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못 만날 것 같은 예감에 히라도 근처 사세보에 온 김에 그에게 전화 걸었다. 갑작스러운 연락에도 싫은 기색 없이 ‘왜 호텔 예약했어? 취소 안 되나? 우리 집에서 자고 가. 아니면 밥이라도 먹자.’라며 나를 반겼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이름 모를 들판과 알 길 없는 마을을 지났다. 오후 6시 반. 히라도의 한 어둑한 선착장에서 그와 재회했다. 갈색 장구두에 말끔한 양복 대신 청재킷에 흰 티, 검은 면바지를 입은 그가 나를 반겼다. 뜨거운 악수로 안부를 나눈 후 근처 식당에 들어갔다.
음식 두 개와 음료 두 잔을 시킨 후 말문을 열었다. 내가 회사를 관둔 것과 내일모레 고쿠라를 떠나는 상황을 설명했다. ‘떠난다.’라는 말에 착잡한 표정을 짓던 우에노는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올 초 회사를 관둔 건 고향에 두고 온 소중한 사람들 때문이었다고 한다. 히라도에서 초중고를 졸업한 그에게는 고교 시절부터 함께 한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대학 졸업 후 후쿠오카에 남은 그와 달리 그녀는 고향에 돌아가 유치원 선생님이 되었다.
물리적으로 멀어졌지만 둘의 사랑은 굳건했다. 다툰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15년간 한결같았다. 그런데 결혼 이야기가 오가면서 작은 마찰이 생겼다. 여자친구가 고향을 떠나는 걸 꺼린 것이다.
같은 시기 아버지도 크고 작은 병치레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사랑하는 여자친구와 부모님을 외면할 수 없어 회사를 관두고 시골로 돌아왔다는 그는 지금 아버지를 도와 어업에 종사한다 그랬다.
‘지금 생활에 만족해?’
‘글쎄. 한 번씩 도시 특유의 분주함이 그리워. 그렇다 한들 후회는 없어. 실은 내년 여름에 아빠가 되거든. 그래서 더 열심히 살아야 해. 그리고 고기 잡는 게 일은 고되도 돈은 돼. 그나저나 파꾸파꾸찌는 결혼 안 하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전에 여자친구가 있는지 없는지부터 묻는 게 예의 아니냐?’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가볍게. 주거니 받거니 늦은 밤까지 서로의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오후 10시 반… 앞서 만난 선착장에서 기약 없는 이별을 주고받았다.
‘오늘이 끝이 아니라 생각해. 분명 다시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믿어.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언젠가 다시 만날 테니 그때 까지 행복하게 잘 살아 파꾸파꾸찌. 좋은 사람 만나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히라도의 눈물
아침이 밝았다. 객실 창문 밖으로 내비친 푸른 경치와 마주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짐을 싸고, 씻은 다음 우에노가 추천한 가게 몇 곳을 확인하고는 거리로 나왔다. 여행 전 준비한 자료에 따르면 인구 2만 9천 남짓한 이 섬에는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수많은 이야기가 남았다고 한다. 그리고 몇 해 전, 이를 토대로 탄생한 소설이 있으니 한정영 작가의 ‘히라도의 눈물’이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끌려온 아버지가 목숨처럼 여기는 도공이라는 직업과 백성을 외면한 ‘조선’을 미워하여 사무라이를 꿈꾸기도 했으나 본인의 정체성은 조선에 있다는 걸 깨닫고 도공의 길을 택한 주인공 세후의 삶을 그린 이야기.
‘실제 하지 않는 허구’임에도 이 소설에 감정이입한 것은 억울하게 이 땅에 끌려온 누군가의 이야기이기도 했고, 남의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내 처지와 겹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리 일본 말을 잘하고 꼬박꼬박 세금 내며 살아도 알게 모르게 차별받고 멸시 당하며 제대로 섞이지 못하는 삶. 그리하여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어차피 나는 한국에 돌아갈 거니까. 내 조국이 있으니까. 조금만 더 참자’라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하던 시기에 접한 소설을 '한국으로 돌아가느냐, 일본에 남느냐.'의 갈림길에서 후자를 택하고 새 삶을 준비하는 이 시기에 다시 상기했다.
‘사기장은 그저 그릇을 만드는 게 만드는 게 아니라, 물과 흙과 나무와 불로 조선을 빚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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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말미, 아버지가 세후에게 전한 말이 곳곳에 남은 듯한 마을은 웅장한 뱃고동 소리와 갈매기 울음, 고즈넉한 풍경이 어우러져 평화로움을 자아냈다.
'남의 나라 사는 이방인이 남의 동네에서 또 한 번 이방인이 되네.'
복잡한 마음을 뒤로하고 첫 여정지로 마을이 내다보이는 언덕에 자리한 히라도 성(平戸城)에 갔으나 보수 공사로 출입이 금지됐다. 아쉬운 마음에 마을 외각에 자리한 히라도 네덜란드 상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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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분 정도 걷자 서서히 옛 흔적이 드러났다. 네덜란드 상인이 짐을 싣거나 내리던 석조 계단을 비롯해, 일반 주민들의 상관 접근을 막는 돌담과 우물 등이 등장했다. 그리고 그 근처로 서양식 건축물 하나가 보였다.
‘도착’
히라도 네덜란드 상관은 1639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설치한 무역 시설이다. 16세기 후반, 유럽 각국은 향신료 교역으로 이문을 얻기 위해 세계 각지에 선박을 보냈다.
이 시기, 유럽의 신흥 강자로 부상한 네덜란드도 1602년,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로 유명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를 설립. 동남아시아와 타이완 등에 교역소를 열었다. 이후 중국 진출도 모색했으나 앞서 물꼬를 튼 포르투갈의 방해로 번번이 좌절됐다. 그때 주목한 것이 일본이었다.
하지만 일본 또한 포르투갈 세력이 선점한 상태였다. 1549년, 가고시마에 상륙한 포르투갈인 선교사 프란체스코 하비에르는 규슈 각지에 터를 잡은 지방 영주들에게 화승총과 유럽 문물을 헌상하며 호의를 얻었다. 그 덕에 각지에서 포교 허가를 얻었다. 이후 다른 포르투갈 선교사들도 상륙해 선교 활동을 펼쳤다. 그런 가운데 히라도를 중심으로 한 교역이 번영했다.
포르투갈이 일본에 면직물과 각종 사치품을 팔아 큰 이득을 얻었다는 소식을 접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도 뒤 늦게 일본과의 교역을 도모하고자 에도 막부와 접촉했다.
한편 이 시기, 포르투갈인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이 말미암은 가톨릭 교인 급증에 위기감을 느끼던 막부는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선교 없이 거래만을 원하는 네덜란드 인의 교역을 허가했다. (같은 시기, 영국인도 히라도에 상관을 세웠으나 '상업 수완'이 나쁘다는 이유로 얼마 못 가 쫓겨났다.)
항구 근처, 창고가 딸린 주택으로 시작한 교역소는 중국산 명주실과 피륙(필로 된 베, 무명 비단 등의 총칭) 등을 팔고 일본산 은을 챙겼다. 이후 무역 확대와 함께 교역소도 세를 불렸다. 1639년에는 2만 개의 사암(砂岩)과 사방 48cm 짜리 기둥 여러 개를 써서 석조 창고를 완공하는데 이것이 바로 일본 최초의 서양 건축물인 히라도 네덜란드 상관이다. 하지만 벽 한 쪽에 예수 탄생을 기념하는 서양 연호가 쓰여있다는 이유로 완공 1여 년 만에 파괴 명령을 받는다.
앞서 언급했듯이 17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가톨릭 신자가 급증하면서 여러 사회 문제가 발생했다. 불교계와의 마찰을 비롯해 지방 세력이 가톨릭을 기반으로 한 포르투갈 세력과 결탁하는 일도 생겼다. 그리하여 막부는 ‘안정’을 명목으로 가톨릭 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637년에 가톨릭 신자들을 주축으로 한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乱)이 발생했다. 규슈 일대를 뒤흔든 난을 진압한 후 막부는 포르투갈 선교사들과 상인을 마카오로 추방하는 한편 국내 신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의 연호를 새긴 상관 건물은 눈에 가시였다.
다만, 일찍이 네덜란드 세력이 ‘종교활동’을 하지 않는다 약속 한데다 국제 정세를 파악하기 위한 대외 창구 하나쯤은 남겨둬야 한다는 판단에 상관 건물만 파괴한 후 상인들을 나가사키로 수용했다.
이후 상관은 기존에 포르투갈 상인이 머물던 나가사키 데지마(出島)로 거처를 옮겼고 200여 년간, 활발한 무역을 펼친다. 이로써 히라도는 국제 무역 중심지의 지위를 상실했다. 그리고 오늘날, 짧지만 찬란했던 과거를 기억하고자 370년 만에 상관 건물을 복원, 전시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네덜란드인 전통 의상을 입은 안내원이 있는 실내에는 당시 상관의 규모와 교역 현황, 역사 등을 알리는 각종 자료와 항해 도구, 무역 관계 물품과 같은 전시품이 남았다.
이중 17-18세기에 작성한 지도와 막부의 기항(寄港) 허가서, 네덜란드 인의 일상이 묻은 초상화 등이 눈에 들어왔다. 개인적으로는 양국의 무역 양과 주요 교역품, 역사적 사건을 소개한 자료가 눈에 띄었다.
‘이 많은 자료를 보존하는 것도 대단하지만, 옛 문헌을 토대로 상관을 복원하고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힘도 훌륭하구나. 우리나라도 ‘청해진’과 같은 국제 무역항을 복원하고 국내외로 알리는 움직임이 있으면 좋겠다.’
와 같은 부러움, 아쉬움, 바람 등 여러 감정을 교차하며 전시실 구석구석을 살폈다.
포르투갈인이 소개한, 그러나 포르투갈에는 없는 음식 카스도스(カスドース)
상관을 나오자 맞은 편 바다에서 사정없이 바람이 불어와 머리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짙게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정리한 후 앞서 걸어온 길 끝자락에 자리한 전통과자 노포(老舗)로 향했다. 16세기 중반, 히라도에 입항한 포르투갈 선교사와 상인들은 총포와 담배, 맥주와 페인트, 빵, 서양과자 등을 소개했다. 이 중에는 카스틸라(카스텔라의 원조)와 콘페이토(金平糖・사탕과자), 카스도스(カスドース)등이 포함했다.
한편 히라도에는 400년 전의 카스도스 제조법을 고수하는 화과자(和菓子) 전문점이 있다. 1502년에 창업한 츠타야(蔦屋)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마을 초입에 걸터앉아 터줏대감 노릇을 하는 이 가게는 역대 히라도 영주에게 화과자를 헌상해 왔다. 그 덕에 1845년, 히라도 35대 영주 마쓰우라 히로무(松浦熈)가 만든 화과자 도감 백과지도(百菓之図)에는 가게 명물인 ‘카스도스’와 고보우모찌(牛蒡餅)의 소개 및 상세한 레시피가 실렸다. 그런 의미에서 히라도에 들르면 반드시 츠타야에 들러야 한다.
상관을 출발해 20분 정도 걸어 도착한 가게는 ‘여기가 400년 전통 화과자 집이라오.’ 라 뽐내기라도 하듯 웅장함을 자랑했다. 1600년, 히라도에 상륙한 영국인 항해사 윌리엄 애덤스는 막부의 허가를 얻어 1613년에 히라도에 상관을 열었다. 에도 막부의 무역 고문을 지내기도 한 그가 상관에 들를 때마다 머문 곳이 지금 현재 츠타야가 들어선 안진노칸(按針の館)이었다. 참고로 '안진'이란 윌리엄 애덤스의 일본 이름인 '미우라 안진'(三浦按針)에서 딴 곳이다.
그의 발자취가 남은 터는 이렇듯 츠타야가 들어섰다. 사연 많은 건물 안에서 들리는 잔잔한 음악을 따라 실내로 들어가자 카스도스를 비롯해 여러 화과자가 진열되어 있었다.
그 옆으로는 직원들과 주민들이 허물없는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 뒤에서 카스도스 두 개와 모모노 미즈 다이후쿠(桃の水大福), 한토라 야키, 커피를 골라 실내 구석 휴게실에 앉았다.
에도 시대, 히라도 영주 마쓰우라 가문에게 과자를 헌상할 만큼 화과자(和菓子)로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곳. 창업 이후로 24대 째 명맥을 잇는 이 고즈넉한 공간에서 역사를 음미해 보기로 했다.
이에 앞서 카스도스의 탄생 비화를 소개하자면 히라도에 입학한 가톨릭 사제들이 긴 항해로 딱딱하게 굳은 카스텔라를 일본인에게 전했고, 이를 현지인들이 본인 입맛에 맞게 조절한 게 카스도스라는 설이 남았다.
이는 제조법으로도 어느 정도 유추 가능하다. 가게 측 설명에 따르면 식힌 카스텔라를 길쭉하게 잘라 겉에 계란 노른자를 입힌 다음, 끓는 설탕 시럽으로 익혀 그래뉴당(싸라기 설탕 중 가장 결정이 작은 설탕)을 묻힌 과정을 거친다. 그 덕에 표면이 약간 딱딱한 한편으로 어원(포르투갈 어로 ‘도스’ = 달다)이 의미하는 대로 몹시 달다.
카스텔라의 '카스' + 도스(달다) = 카스도스(매우 단 카스텔라)
때문에 처음 접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호불호가 갈린다. 다만, 설탕과 달걀이 귀하던 에도 시대, 이 두 재료를 아낌없이 쓴 카스도스는 귀족과 부유층 사이에서는 최상급 간식으로 시대상을 반영하는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여하튼 어느 정도의 ‘당도’를 각오하고 한 입 베어 물었다.
‘우와, 진짜 달다.’
예상을 뛰어넘는 당도에 헛 웃음이 나왔다. 달달한 초콜릿 과자에 설탕 시럽을 잔뜩 뿌려 기분이었다. 그런 한편으로 겉표면이 딱딱하고 속은 부들부들해서 식감은 좋았다. 카스텔라를 프렌치토스트처럼 만든 느낌이라 해야 하나. 여러 의미로 몹시 신선한 맛이었다.
이어서 망개떡(맵쌀 가루를 쪄서 치대어 거피 팥소를 넣고 반달이나 사각모양으로 빚어 두 장의 청미래덩굴 잎 사이에 넣어 찐 경남지방의 떡)을 연상하는 모모노 미즈 다이후쿠(桃の水大福)를 집었다.
물에 담근 덜 익은 복숭아를 흰 팥에 싼 다음 부드러운 떡으로 감싼 이 과자 또한 지역을 대표하는 명물이다. 식어도 딱딱하게 굳지 않는 특별한 가루로 만든 떡이 빚은 쫀득쫀득함과 이를 감싼 대나무 껍질에서 흐르는 은은한 향, 그리고 팥 특유의 달짝지근함이 조화를 이룬 게 어르신들이 좋아할 맛이었다.
‘그냥 먹으라 하면 못 먹겠고. 설탕 안 넣은 커피를 곁들여야 괜찮겠다.’
마치 고독한 미식가라도 된 것 마냥 모든 미각을 동원해 음미했다. 여기에 다다미가 품은 세월 냄새와 고풍스러운 장식,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풍경, 그리하여 도처에 낭만이 가득한 순간을 만끽하며 긴장을 풀었다.
일본 기독교의 아픈 손가락 히라도
오후 2시. 앞으로는 가을바람, 어깨 옆으로는 바닷바람이 부는 거리로 나섰다. 크고 작은 건물이 옹기종기 모인 골목을 따라 걸었다. 자전거를 탄 지역 주민 몇몇과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 마을 중앙에 자리한 ‘히라도 온천 우데유 아시유’에 도착했다.
이곳은 손과 발을 함께 담그는 온천으로 누구든 무료로 이용 가능하다. 전국 각지에 족욕탕은 많아도, 손과 발을 함께 담그는 시설은 희소해서 그 존재 자체가 특별했다. 미리 준비 한 타월이 있어서 온천물에 발을 넣고 피로를 풀었다.
이후 온천 뒤편에 위치한 마쓰우라 사료 박물관(松浦資料博物館)에 방문했다. 에도시대까지 히라도를 다스린 마쓰우라 가문은 고려 후기, 한반도 남부 지역을 수시로 침략한 왜구 잔당인 마쓰우라당의 일족이다. 임진왜란 당시 한반도를 침략한 바 있는 이들 가문 자료가 1893년에 완공한 건물 내 전시실에 남아있다.
슬쩍 실내를 돌아 본 다음 발걸음을 재촉했다. 앞서 소개한 대로 16세기, 히라도에는 포르투갈 선교사와 상인이 상륙했다. 이중 일본에 가톨릭을 전파한 프란체스코 하비에르는 1550년부터 3차례 이 땅을 밟았다. 이러한 영향으로 마을에는 크리스트교인이 상당수 존재했다. 하지만 에도 막부의 종교 탄압으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럼에도 신자들은 믿음을 놓지 않았고, 이들의 숭고한 희생에 힘 입어 섬 전역에는 크고 작은 교회가 뿌리내렸다. 이러한 아픔의 역사를 되짚으며 일본에서는 오늘날 히라도를 일본 크리스트교의 성지 순례지 중 하나로 손꼽는다.
그리고 마을 뒤편 언덕 한 쪽에는 에메랄드 색상의 첨탑이 우뚝 선 ‘히라도 자비에르 기념 교회’와 세 곳의 불교 사원이 한 데 자리했다. 두 종교가 조화를 이룬 모습을 두고 현지인들은 ‘사원과 교회가 보이는 풍경’이라 부르는 모양이다. 마을 안내 전단지에도 종종 등장하는 이 풍경을 만나고자 언덕길을 따라 15분 넘게 걸었다.
이끼 서린 돌계단을 밟아 고묘지(光明寺)、즈이운지(瑞雲寺), 돌담 넘어 쇼쥬지(正宗寺) 등 검정 기와가 내려앉은 사원 세 곳을 지나 주민들의 일상 한가운데 우뚝 선 교회 앞에 당도했다.
‘우와, 웅장하다.’
하늘에 닿을 듯 말 듯 우뚝 솟은 첨탑과 에메랄드 색상에 감탄사를 쏟아냈다. 1931년에 히라도 가톨릭교회라는 이름으로 탄생한 교회는 1971년, 자비에르의 히라도 방문을 기념하기 위한 ‘히라도 자비에르 기념 교회’로 이름을 바꿨다.
여타 교회와 마찬가지로 예배드리러 온 주민들과 종교인에게만 제한적으로 실내를 공개하기 때문에 눈 대중으로 실내를 살핀 다음 바깥으로 나왔다.
교회 주변으로는 이 땅에 가톨릭을 소개한 자비에르의 동상과 종교 박해로 순고한 희생자들을 기리는 위령비가 남았다. 그 뒤편으로는 평화로운 마을이 내려다보였다.
신앙의 자유가 없던 시절, 다른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목숨을 빼앗긴 이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십자가를 밟으면 용서하겠다.’라는 회유책에도 신념을 굽히지 않은 순교자들은 어떤 마음으로 죽음 앞에 섰을까?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목숨을 빼앗기거나 박해받는 일이 없길 기원하면서 올라온 언덕을 내려 밟았다.
그리고 차가 있는 주차장으로 이동해 휴대폰을 여는데 우에노로부터 문자 한 통이 와 있었다.
‘정말 오늘 돌아가나? 하루 더 있어도 되는데.’
아쉬움이 묻은 그의 문자에 살짝 마음이 흔들렸으나 이사와 이직이 턱밑인 탓에‘다음’을 기약하며 무겁게 등을 돌렸다.
‘다음에 다시 보자.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