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을 밤의 꿈, 아름다운 어촌 마을 미미쓰
한 가을 밤의 꿈, 미야자키 미미쓰
10월의 어느 날. 원고 마감을 앞두고 펜을 들었으나 한 글자도 못 뗐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운전석에 올라 규슈 이남으로 향했다. 4차선 고속 도로를 시작으로 이 마을 저 마을, 모르는 동네 여러 곳을 지나 굽이진 해안 도로에 진입했다. 사시사철 변덕을 부리듯 꼬불꼬불한 도로 옆, 지루할 정도로 단조로운 해안선을 따라 250km 가량 더 달린 후 바다 옆 언덕 위에 자리한 주택 앞에 멈췄다.
“1박 2800엔”
차를 세우고 들어간 건물 로비는 서핑 도구들과 고풍스러운 잡화가 가득했고 그 위로는 그윽한 블루스가 울러 퍼졌다. 그리고 부엌에 서 계신 백발 성성한 주인 할아버지는 콧노래를 부르며 커피를 내고 있었다. 인기척에 고개를 내민 할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내가 오늘 유일한 숙박객이란다. 오, 2,800엔에 집 한 채 빌렸네.
형식적인 체크인을 끝내고 주인 할아버지께서 내준 커피 한 잔 음미하며 철썩철썩 몰아치는 파도 소리에 귀 기울였다. 아득한 그리움과 사무친 추억 위로 짙은 한숨을 내뱉자 해거름이 내려앉고 어스름이 밀려왔다. 홀로 남은 외딴 방에 기대 창틀 틈으로 드러난 하늘을 응시했다. 반짝반짝 빛 나는 별을 헤며 지난 추억을 그리자 적막한 밤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이 나를 보듬었다.
이윽고 날이 밝았다. 뜬 눈으로 지새워 축 처진 몸을 이끌고 집을 나섰다. 차 엉덩이를 향해 손 흔드는 할아버지를 뒤로하고 20분 정도 달리자 자그만 어촌이 등장했다.
‘역사 보존 지구 미야자키현 미미쓰’
도착을 알리는 간판을 발견하고는 마을 초입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가 만난 항구 가편 공터에 차를 댔다. 공터 바로 맞은편으로는 이곳이 일본 해군의 발상지임을 알리는 탑이 우뚝 서 있었고, 근처로는 전통 가옥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이들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가자 관광 안내소 역할을 하는 미미쓰 마치나미 센터(美々津町並みセンター)가 등장했다.
그 옆으로는 전통 건축물인 미미쓰켄(美々津軒)이 있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옛 상인의 세간살이로 가득한 공간이 등장했다. 그리고 건물 한쪽에서는 관리인으로 보이는 할머니가 청소하고 계셨다. 삐걱대는 문 소리에 몸을 돌린 그녀는 환한 미소로 나를 맞이했다.
어디서 왔는지, 아침은 먹었는지, 이 시골 마을에는 무슨 일인지 등 추석 아침, 고사리 손으로 할머니 집 문 두들기는 손주 반기듯 다가온 당신께서는 ‘글 쓰는 일을 한다.’라는 내 말에 청소 도구를 내려놓곤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
당신 말씀에 의하면 메이지 후기에 탄생한 이 2층짜리 건물은 상업으로 큰돈을 번 야노 가문의 저택을 복원한 결과물이라고 한다. 당시의 세간살이가 남은 가운데 미미쓰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교실’로도 활용하고 있다.
현재는 1층만 공개 중이나 특별히 2층을 보여주시겠다는 손짓에 이끌려 삐걱대는 나무 계단을 밟았다. 빛바랜 다다미와 짙은 목조 내음새 뒤섞인 2층에서 그녀는 또 다른 이야깃주머니를 꺼냈다.
77년, 할머니의 일생은 마을과 쭉 함께였다. 어릴 적, 할머니의 어머님께서는 문창지 붙이는 일을 하셨는데 돈 벌라, 집안일하라, 자식 키우라 손이 성할 날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 어머니의 희생에 힘입어 교편을 잡은 그녀는 퇴직 후 어깨너머 배운 기술로 마을 전통 건축물 문창지 붙이는 일과 전통 체험 교실을 진행하고 있다. 가만히 당신의 삶에 귀 기울이다 마을 전경이 내다보이는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참 예쁜 마을이지? 얼마나 많은 삶과 추억이 다녀갔는지 몰라. 상인의 삶, 어부의 일상, 엄마들의 생애, 수많은 이방인의 그림자. 그리고 50년도 훨씬 전, 간사이 학원 대학 학생들이 마을에 들러 마을 내 초등학생들 공부를 도와준 희미한 여름 그 어느 날.
길면 길다 할 수 있는 삶의 여정 속에서 그 대학생들이 기억에 남아. 새까맣게 탄 아이들을 모아서 공부와 노래를 가르쳐주던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해. 그리고 하루는 어디서 구했는지 인력거를 가져와서는 미미쓰역과 마을을 왔다 갔다 하더라고.
내가 어릴 적만 해도 역과 마을을 오가는 인력거가 몇 대나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벌이가 안 된다는 이유로 종적을 감췄어. 정말 아쉬웠지. 근데 주민들이 인력거 달리던 풍경을 그리워하는 말을 접하고는 인력거를 몬 거야. 소싯적 희미한 기억으로 남은 풍경이 외지인들 덕에 되살아난 그날 모두가 웃었어. 봉사활동 마지막 날, 마을 공터에서 연 작은 콘서트에서는 모두가 행복했고.
“그때 생각했어 마을 모든 사람들이 즐기면서 재미있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세찬 도시화에 이 조그만 마을이 무슨 수로 살아남겠어. 먹고 살잡시고 하나 둘 고향을 등졌고, 지금은 노인만 남아 동력을 잃었어. 마을을 살리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긴 했지만 이렇다 할 대안은 없었지.”
이렇게 점점 쪼그라 들어가는 마을임에도 들러 주는 여행객 한 명 한 명에게 고마워. 그래서 항상 반갑게 맞이해줘. 자네에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질문도 던지고, 마을 주민밖에 모를 이야기도 들려주고. 그리고 항상 많이 웃고 동네 사람들과 다양한 행사를 열기도 해. 우리들이 즐겁게 살면 마음에 즐거움이 묻어나고, 그런 즐거운 동네를 찾아준 여행객들 마음속 깊이 우리 마을이 남을 테니까.
근데 우리 마을 사람들은 수줍음이 많은 지 참여율이 낮아. 세상 구경 별거 없는데 말이지. 외지인들이 여는 공연 보러 가고 찾아준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안부 묻고. 그렇게만 해도 참 좋을 텐데. 이럴 때 아니면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언제 허물 없이 소통하겠어? 더군다나 나는 이제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은 노인네라 일분일초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해도 모자랄 정도라고. 여하튼 나는 그래.”
멀찍이 창가 앞에 서서 옛 추억과 마을을 향한 애정을 푼 할머니는 말을 많이 했더니 커피 한 잔 마시고 싶다는 말로 나를 붙잡았다.
“이 근처에 맛있는 커피집이 있어. 같이 안 갈래?”
때마침 피곤하기도 해서 할머니를 따라 옛 건축물을 개조한 ‘유메노 카타치 프로젝트’라는 카페로 향했다. 톡톡 튀는 재즈 음악으로 가득한 실내 한쪽에는 예쁜 그림이 줄줄이 걸려 있었고 좀 더 안으로 들어가니 아기자기한 예술품과 심플한 인테리어가 조화를 이룬 공간이 등장했다. 우리는 실내 가장 구석, 널찍한 자리에 앉아 커피와 샌드위치를 시켰다.
‘할머니, 오늘은 또 다른 친구분 데려오셨네요?’
익숙하다는 듯 인사를 건네는 여성은 카페 오너인 야스코 씨였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호리호리한 인상의 그녀는 꽤나 야무진 손을 가졌는데 아니나 다를까 일러스트레이터일도 한단다. 그 덕에 그녀가 디자인한 작품이 곳곳에 전시되었고 사이사이레 여러 작가들의 작품이 어루어져 밝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응, 여행 왔다는데 글 쓰는 일을 한다고 하네? 그래서 나 혼자 신나서 열심히 떠들다가 여기까지 데려왔어.’
‘오, 그러시구나. 무슨 글 쓰세요?’
할머니 소개로 야스코 씨, 가게 일 도와주시는 분과 이야기 꽃을 피웠다. 2015년 오픈 이래로 카페는 물론이고 예술과 대인 소통으로 교류하는 이곳은 마을 주민들의 안식처이기도 하다. 오늘 오후에도 조그만 체험 교실이 열릴 예정이라 꽤 바쁜 눈치였다. 직원들이 분주히 일하는 사이 할머니가 다시 이야기꽃을 피웠다.
‘미미쓰역 근처에 전통 종이 공방이 있어. 오래전, 동네 주민들이 마을을 살려보겠다고 공방 장인과 협업해서 체험 공방을 열까 했는데 장인 할아버지 건강 문제로 없던 일이 됐지. 참 아쉬웠는데 여러 공연과 체험이 가능한 이 카페가 생겨서 참 좋아. 저기 걸린 그림들, 전부 야스코짱이 그린 거야.’
잠시 후 주문한 커피와 샌드위치가 나왔다. 테이블에 커피잔을 두며 내게 시선을 맞춘 야스코 씨가 말문을 열었다.
‘이 동네까지 어떻게 오셨어요? 기차편도 마땅치 않은데.’
‘4시간가량 운전하면서 바다 풍경도 보고 틈틈이 명소에 들러 자연경관도 보고 왔지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본인도 여행하는 걸 좋아한다면서, 그런데 본인보다 더 드라이브를 즐기는 분이 계시다면서 할머니를 가리켰다.
‘나? 그렇지. 내 인생에서 여행을 빼면 안 돼지. 나는 이 나이에도 홀로 운전해서 여기저기 다니는 게 즐거워. 작년에는 야마가타(山形)까지 다녀왔어. 나이가 나이라 하루에 수 백 킬로씩 이동하기는 힘들고 조금씩 이동하면서 지인도 만나고, 온천도 들르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현지 사람들 하고도 이야기 나눴지.
나는 그래. ‘삶’은 사람에게서 배우는 거라 생각하거든. 여행 중에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면서 배우는 게 참 많아. 이 나이 먹어도 알고 싶은 게 무궁무진해.’
상기된 표정으로 이야기 꽃을 피우는 할머니 말에 귀 기울이면서 ‘내 삶에 있어 여행이란 무엇인지.’ 고찰했다.
주머니 가벼운 대신 시간이 남아돌던 대학원 시절에는 제한된 금액으로 다양한 지역을 돌며 견문을 쌓는 데 집중했다. 그러니 식비나 교통비를 최대한 아끼는 게 가장 중요했다.
반면 직장인이 되고 나서는 지갑이 빵빵해진 대신 여유 시간이 줄었다. 격무로 얻은 스트레스도 엄청났다. 그러니 하루를 여행해도 제대로 즐기는데 집중했다. 신칸센을 타고 고급 여관에서 묵거나 비싼 음식 사 먹는 것에 거리낌 없었다. 바꿔 말해 지난 여행이 시간으로 ‘돈’을 아끼는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돈으로 시간을 확보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할머니와 함께 하는 이 시간이 즐겁고 행복했다.
짧은 만남, 기약 없는 이별, 새로운 여정
세 시간 가까운 담소를 끝내고 카페를 나왔다. 옹기종기 모인 전통거리 사이로 난 거리 끝에서부터 적당히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지금 우리가 밟고 있는 보도를 이시다다미라고 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주민들이 만든 거야. 사람들이 걸을 때 아프지 말라고 해변가에 있는 부드러운 돌을 가져와 보도로 만들었어. 나도 우리 마을 사람들도 누군가의 배려로 탄생한 이시다다미를 밟으며 살아왔어. 그리고 오늘은 자네의 배려 덕에 수다도 떨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네. 노인네한테 시간 내줘서 참 고마워. "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세 시간이나 빼앗아버렸는걸요.’
‘빼앗긴?! 일이야 내일 또 하면 되지만 인연은 매일 찾아오는 게 아니니까. 괜찮아.’
"참, 글이 잘 안 써진다고 했지?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또 놀러 와. 바다가 보이는 조그만 방에서 바닷바람 맞다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좋은 문장들이 찾아 올거야"
에도 시대, 항구 마을로 번영한 미미쓰(美々津)
만남을 뒤로하고 여행자의 입장으로 돌아와 마을을 돌기 시작했다. 수많은 이의 추억이 남은 거리 양옆으로 크고 작은 전통 건축물이 줄 이은 가운데 오랜 우물 몇 개가 남아 있었다. 이렇듯 옛 정취가 고스란히 남은 미미쓰는 에도 시대 초기(1699-1703)에 형성된 항구 마을로 3만 석의 소출을 받던 타케나베(高鍋)영주의 지배권에 속했다.
이 시기 에도 막부는 지방 영주의 세력을 통제하기 위해 참근교대(参勤交代) 제도를 실시했다. 참근교대 제도란 지방 영주가 1년 단위로 영지와 에도(도쿄)를 오가는 일종의 반란 억제 정책이었다.
이때 영주는 아내와 자식을 도쿄에 볼모로 남겨야 했고, 매년 영지와 에도를 오가는 이동비로 큰 비용을 지출했다. 즉, 지방 영주들이 이동 비용에 큰돈을 치르게 함으로써 이들의 세력 확장을 막고자 한 것이다.
한편 영주들이 지나는 각 지역 길목은 선박업과 숙박업, 무역업으로 번영했다. 타카나베 영주의 참근교대 출발지인 미미쓰 또한 숙박업소와 선박 수리 공장, 무역 창고로 가득했다.
이런 인프라에 힘입어 千石船(센고꾸부네/쌀 천 섬을 실을 수 있는 큰 운송선)를 보유한 지역 운송업자들은 고장에서 생산된 목재와 목탄 등을 오사카까지 옮겼고, 돌아오는 길에는 간사이 지역의 특산물과 미술 공예품, 사치품 등을 구입해 미야자키 지역 상류층에게 판매하였다.
여기에 세토우치 해(瀬戸内海)에 속한 시코쿠(四国), 츄고쿠(中国, 히로시마 오카야마 야마구치 등), 간사이(関西)지역에서 온 교역선까지 몰려들어 크게 번영했다.
하지만 300년 가까이 유지한 영광은 근대화의 파도에 밀려 산산조각 났다. 한때는 미미쓰 현청이 들어설 정도로 번영했지만 세상이 급변하는 가운데도 구시대적인 항해 법과 운송 제도만 고수하다 정체했다. 여기에 20세기 초, 규슈 전역을 관통하는 철로 닛포혼센(日豊本線)이 등장하면서 목조 선박 대신 철도가 물류 중심에 섰고, 그렇게 마을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이렇듯 하루아침에 ‘항구 기능’을 상실하자 마을의 산업 근간이 무너졌고 인구 감소가 발생했다. 이는 앞서 만난 미미쓰켄 옆에 있는 미미쓰 마치나미 센터(美々津町並みセンター)에서도 확인 가능했다.
집에 전시할 엽서와 장식품을 사기 위해 공예품 몇 개를 집어 들자 건물을 관리하는 할머니가 아쉬움을 토로했다.
“다들 이게 마음에 드나 봐, 그런데 그걸 만든 사람이 작년에 세상을 떠난 바람에 자네가 집은 게 마지막이야. 후계자라도 있으면 명맥이라도 유지할 텐데, 돈도 안 되고 힘만 드는 일을 누가 하겠어.’
마을 초입에 자리한 전통 종이 공방을 운영하던 사사키 씨도 문을 닫았어. 100년도 넘은 가게였는데 후계자가 없으니 어떡하겠나.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지.
*18세기 중엽, 다카나베 가문(미미쓰 일대를 다스리던 영주 가문)은 산업진흥책의 일환으로써 종이 만들기를 장려했다. 이후 재료 공급과 판매에 최적이었던 미미쓰 지역에 크고 작은 종이 공방이 들어섰다. 19세기 초에는 다카나베 가문의 모든 공식 문서는 미미쓰 산 종이로 쓸 정도였으며, 헌상품으로도 인기를 끌었다.
근대화의 영향으로 전통 종이 수요가 감소한 1927년에도 14곳의 공방에서 연간 19톤의 종이를 생산할 정도로 위세를 자랑했으나 지금은 유일하게 남은 사사키 씨의 공방마저 문을 닫았다.
산업 근간의 붕괴가 낳은 노령화와 저출산으로 지역 사회가 무너지는 현상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후계자’가 없어 수백 년을 이어온 전통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현실을 눈앞에서 보니 가슴이 먹먹했다. 나름 전통문화 보존에 힘쓰는 이 나라도 이런데 내 조국 대한민국은 어떨까?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 둘 사라지는 무형 문화재와 전통 산업을 떠올리며 씁쓸함에 빠졌다.
엽서 몇 장을 구입한 후 무거운 발걸음으로 터벅터벅 걷다 큼직한 전통 건축물에 다다랐다. 오래전, 운송업 사무소 역할을 한 카와치야(河内屋))를 복원한 미미쓰 역사 민속자료관이다.
선박을 거꾸로 뒤집은 듯한 지붕 모양이 압권인 외간을 쓱 살핀 후 입장했다. 이곳은 상업 장소와 응접실, 오카베 가문이 거처하던 가정, 정원이 하나의 조합을 이뤘다. 이 시기만 해도 2층짜리 집을 지을 수 없었던 탓(신분이 낮은 자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게 막부에 대한 도전이라 여김)에 건물을 높게 지은 다음, 다락방 형식의 2층을 마련했다. 이때 1층과 2층을 잇는 계단을 가쿠시 계단(숨은 계단)이라 불렀고, 2층은 물건을 보관하거나 밀담을 나누는 장소로 활용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이 남은 실내로는 여러 자료 및 전시품이 남았다. 등유 램프와 상인의 물품 보관 상자, 주판, 오랜 간판 등 여러 물품이 자리한 가운데 마을 정취를 소개하는 모형이 시선을 빼앗았다.
마을 모습을 작게 복원한 모형 옆으로는 형성 과정과 발전상을 알리는 글귀가 보였다. 오래전, 신무 일왕의 출항 기록이 남은 동시에 항구 도시로 번영한 마을에는 남북을 잇는 큰 가로(街路) 2개가 있다.
마을에 큰 폭의 도로를 두 개나 둔 이유는 ‘화재 방지’와 연관한다. 예로부터 일본 사회에서 화재(火災)는 호환마마에 필적하는 무서운 사고였다. 가뜩이나 목재로 지어 화재에 취약한데 집마다 다닥다닥 붙은 탓에 작은 불로 마을 하나가 송두리째 불타는 일이 속출했다. 그러니 마을 곳곳에 소방 시설을 두는 한편, 다세대 주택에는 공동 부엌을 둘 정도로 불 관리에 민감했다.아울러 마을을 관통하는 두 개의 도로도 적당한 거리를 둠으로써 불이 번지는 걸 막고자 했다.
이렇듯 화재를 대비해 설계된 도로 중 동쪽 도로 주변에는 크고 작은 창고와 선박 사무소, 운송업자 도매 사무소 등이 들어섰다. 그리고 서쪽에 자리한 가로에는 상가와 숙박업소, 유락 시설 등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모형과 자료 등으로 마을의 변천과 옛 생활상을 파악한 후 다시 거리로 나왔다. 아까 오전에 먹은 샌드위치로는 부족했는지 허기가 졌다. 배라도 채울 겸, 마을 초입에 자리한, 옛 선숙(뱃 사람들이 머물던 숙소)을 개조한 식당 겸 잡화점인 히나타야(ひなた屋)에 들어갔다.
2년간 세계 여행을 하고 고향에 돌아온 부부가 160년 넘는 고민가에 차린 식당 겸 보금자리에서 꽤 맛있는 식사로 배를 채우며 체력을 회복했다.
이후 다시 거리로 나와 이곳저곳 살폈다. 옛 우체국 건물과 이런저런 사연 가득할 건물을 지나는 사이 시곗바늘이 숫자 3과 4사이에 멈췄다. 넉넉잡아 2-3시간이면 충분할 동네에서 여러 좋은 인연을 만난 덕에 한나절 넘어 보냈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네.’
몹시 즐거운 나머지 일말의 아쉬움 없는 하루를 뒤로 하고 차가 있는 공터로 향했다. 그러다 또 한 번 발걸음이 멈췄다. 1836년에 완공한 전통 건축물을 개조한 카페 TAMANOYA다.
가게 입구 마루에 손님 둘이 앉은 가운데 안쪽 실내에서 여러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호기심에 안으로 들어가니 우직한 인상의 사장님이 환한 웃음으로 맞이했다.
‘어이쿠, 오늘 마지막 손님이시네. 다행이여. 1분만 늦었어도 못 만날 뻔 했잖수. 반가워요. 어서 들어와.’
사장님의 안내로 가게 가장자리에 앉아 타피오카 음료 한 잔 주문했다. 음료가 나오기까지 실내 곳곳을 엿보다 손님 몇 명과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조리실에 들어간 사장님은 음료를 주문하는 동안에도 손님들과 대화에 분주했다. '언니들, 방금 전에 들어온 청년은 어때? 한 10년만 젊었어도 대시했겠지? 어쩜 저렇게 곱게 생겼을까?' 와 같은 짓궂은 농담을 내뱉는가 하면 마을과 관련한 이야기 앞에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바닷사람 특유의 우락부락하면서도 다부진 인상 한편으로 사근사근하면서 유머감각이 엿보이는 바다 사나이였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내 몫의 음료를 갖고 온 사장님은 내게도 이런저런 대화를 시도했다.
‘이 건물이 말이요. 1836년에 지어진 곳인데, 마을 중요 건축물로 지정되어 있어.’ 아까 신발을 벗던 처마 아래쪽에 완공 시기를 증명하는 국가 인장이 남아있어. 나중에 나가실 때 한 번 확인해보셔. 그나저나 어디에서 오셨는가?’
‘고쿠라에서 왔습니다.’
‘멀리서 오셨네? 실은 내가 말이여. 30년 넘게 운수업에 종사했어. 차를 몰고 일본 전역을 오갔지. 규슈와 혼슈를 잇는 그 동네는 셀 수 없이 많이 지났어. 그때 한 번씩 들르던 식당들이랑 역 앞에 있던 코렛토 백화점은 잘 있나 모르겠어.
‘아, 다른 식당은 모르겠는데 코렛토는 오래 전에 문을 닫고 대신 다른 업체가 입점했어요.’
‘허. 그려? 가뜩이나 후쿠오카가 성장하며 기울어가던 동네인데 커지면서 코렛토 마저 망했구먼.’
짧은 탄식으로 아쉬움을 토로한 아저씨는 밝게 웃으며 화제를 바꿨다. 영업시간이 4시까지지만 좀 더 있다 가셔도 되. 나는 좀 다른 일이 있어서 잠시 실례 좀 할게. 오늘 프랑스인 여성 3명이 내가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에 오거든. 그래서 준비할 게 많아. 간간이 아시아권 손님은 와도 유럽 쪽 손님은 드문 일이라 마을에서도 화제야. 허허. 그럼 놀다 가시게!’
활기찬 작별에 수줍은 인사로 답하며 내 몫의 음료를 쭉 빨아들인 후 이제 정말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하루 여정에 종지부를 찍었다.
'자. 이제 집에 가자.'
여행 전, 내 삶은 꽤 다사다난했다. 하지만 과감히 떠난 일 박 이 일, 짧은 여행 중에 만난 여러 인연으로부터 위로 받으며 한층 단단해졌다. 특히 할머니와의 만남에서 많은 생각을 남겼다. 77년, 수많은 파도와 역경을 이겨낸 할머니의 인생사에 있어 나란 존재는 사소한 편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에게 사소할 지도 모르는 다정한 한 마디에 나는 무수한 세월이 지나도 즐겁게 그릴 행복을 얻었다.
"찰나로 남았을 하루가 억겁의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잘 놀다 갑니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