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통신사가 다녀간 그 곳, 시모카마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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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줏대감 마냥 세상에 눌러앉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 9월 중순, 히로시마 버스 센터를 출발해 1시간 40분 넘게 달린 버스가 미토시로(見戸代) 정류장에 멈춰 섰다. 후텁지근한 대기 위로 철석 대는 파도 소리와 구슬픈 매미 울음, 풀 냄새 흐르는 외딴 건물 앞에 서서 물 한 모금 마신 후, 앞서 건너온 아키나다 대교(安芸灘大橋)를 등진 채 인적 없는 국도를 따라 걷길 5분여, 도로 한 쪽으로 넓은 마당을 낀 가게가 등장했다.
‘구레야키 전문점 키시나(呉焼専門店きしな)’
키시나(きしな)라는 상호를 건 가게는 시모카마가리 마을 내에서 몇 안 되는 식당이자 지역 명물인 구레야키(呉焼き)를 파는 곳으로 섬을 드나드는 이들과 주민들에게만 알려진 숨겨진 맛집이다.
패망 이후 굶주림에 시달리던 히로시마 주민들이 미군으로부터 받은 밀가루 반죽을 철판 위에 얇게 편 다음, 그 위에 숙주와 파, 양배추, 면 등 여러 재료를 올려 구운 데서 비롯한 히로시마 오코노미야키(お好み焼き)는 먹는 이의 취향에 맞춰 고기와 굴과 같은 색다른 재료를 가미하며 지역 주민들의 ‘소울푸드’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독특한 오코노미야키도 등장했는데 그중 하나가 구레시(呉市)에서 탄생한 구레야키였다.
철판 위에 구운 재료를 납작하게 눌러 먹는 히로시마 오코노미야키에서 한층 진화해, 노릿하게 구운 재료를 얇게 구운 반죽으로 덮어 오므라이스처럼 먹는 구레야키는 등장 당시 ‘맛’을 고스란히 유지하며 주민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키시나 또한 구레 시민들의 추억을 자극하는 맛집으로 연일 단골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역시나 오늘도 실내에는 행복한 표정으로 식사를 즐기는 손님들로 가득했다. 가게 앞 간이 대기실에서 먹으면 10분, 안에서 먹으려면 20분 이상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전자를 택한 후 간이 좌석에 앉아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서 있기만 해도 땀이 나는 무더위에 에어컨 바람 없는 곳에 앉아 뜨거운 철판 요리 먹을 생각에 잠시 걱정했으나 건물 뒤편 바다에서 들려오는 뱃고동과 파도 소리, 이따금 부는 바닷바람 덕에 버틸 만했다.
이번이 두 번 째인 구레야키는 쫄깃쫄깃한 면발과 바삭한 야채, 반원형으로 감싼 반죽 덕에 씹는 맛이 좋았다. 또한 반죽 위에 올라간 달달한 소스덕에 풍미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양이 많지 않아서 젓가락질 몇 번에 식기 바닥이 드러난 건 아쉬움으로 남았다.
식사 후 앞서 걸어온 길 반대편, 평지와 완만한 언덕이 이어지는 국도 옆 보도 1km 거리를 넓지도 좁지도 않은 보폭으로 내디뎠다. 파릇파릇한 꽃과 나무, 커다란 농업 상점을 지나 언덕 정점에 이르자 가쁜 숨결이 터져 나왔다. 속에 쌓여 있던 뜨거운 한숨이 흩어지는 방향으로 푸른 물결이 일렁이었다.
‘바다다.’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시원해지는 바다를 향해 걷다 경사 길 3분의 2 지점에서 가옥 몇 채와 낡은 버스 정류장, 건물 두 채로 구성된 중학교를 만났다.
‘오랜만이네, 시모카마가리 중학교... 근데 왜 이리 조용하지?’
예상 밖의 적막함에 굳게 걸어 잠근 정문 틈으로 고개를 들이 밀자 창문에 ‘시모카가마리 중학교, 감동과 미소를. 고마워’라는 글귀가 붙어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두리번 거리니 오른 편에 2020년 3월, 73회 졸업생을 끝으로 폐교되었다는 안내문이 보였다.
‘아, 완전히 문을 닫았구나…이곳도 도시화의 물결을 버티지 못했구나.’
주인을 잃고 황량함만 남은 학교 앞에 선 채 씁쓸함을 느끼던 찰나, 건물 뒷산에서 불어온 시원한 바람이 운동장을 휘감았다. 이에 작은 모래바람이 일더니 그 위로 지난 2017년 10월, 학교 운동장을 들썩이게 한 추억의 부스러기가 고개를 들었다.
조선통신사가 거쳐간 마을, 시모카마가리(下蒲刈)
1592년, 대륙 정복이라는 헛된 야욕을 품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침략했다. 부산 땅을 밟은 일본군은 맹렬한 기세로 조선 관군을 격파하며 한양까지 올라가는데 성공했으나 이순신 장군을 필두로 한 조선 수군과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의 활약, 명나라의 조선 구원으로 혼란에 빠졌다. 이로부터 7년간 크고 작은 소모전과 정전을 반복하던 ‘왜란’은 전쟁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나서야 막을 내렸다.
이후 열도를 손아귀에 넣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조선과의 관계 회복을 통해 국내에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고자 했다. 같은 시기, 기나긴 전란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국토가 황폐화되는 등 어려움을 겪던 조선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경 북쪽에 살던 여진족의 급속한 성장세에 위협을 느꼈다. 그러던 찰나, 일본에서 사신이 건너왔다. 침략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화친을 제안하는 일본 측이 괘씸했으나 국경 양쪽에 적을 둘 수 없었기에 마지못해 손을 잡았다. 그리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보낸 서신에 대한 ‘답신’ 겸 전란 때 일본에 끌려간 피로인을 구출하기 위한 사절단을 보내는데 이를 회답 겸 쇄환사라 부른다.
세 차례에 걸쳐 일본 땅을 밟은 회답 겸 쇄환사 일행은 에도 막부(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창출한 정권)가 조선을 침략하지 않을 것임을 확인한 동시에 1,716명의 피로인(왜란 당시,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을 데려오는 등 소정의 성과를 거뒀다. 일본 측도 조선 측 사절단을 통해 에도 막부의 권위를 세우는데 성공했다. 이를 계기로 막부는 조선에 비정기적으로 사절단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이를 받아들인 조선은 앞선 세 차례 회답 겸 쇄환사를 포함해 1811년까지 총 12차례, 뜻을 통하는 사절단이라는 의미의 조선 통신사를 보냈다.
한양을 출발해, 부산, 대마도, 시모노세키, 오사카, 교토 등을 거쳐 에도(도쿄)에 이르기까지 약 2,000km 거리를 짧게는 8개월, 길게는 1년 이상 이동한 통신사 일행은 일본 땅 곳곳을 누볐고, 이때 이들 일행을 맞이하던 곳 중 하나가 시모카마가리(下蒲刈)였다. ‘통신사 일행을 극진히 대접하라.’ 라는 에도 막부의 명령 하에 히로시마 영주는 시모카마가리에 접대소를 설치해 조선 통신사를 모셨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날, 마을 주민들은 이러한 역사를 기억하고자 매년 가을,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하는 행사를 연다.
코로나19가 발발하기 전까지 총 17차례 열린 행렬 재연 행사에는 매년 마을 주민 300여 명과 재일교포, 한국 측에서 파견된 공연단과 내빈 등 약 500여 명이 참가했다. 한복과 기모노를 입은 참가자들은 밝은 표정으로 마을 한 바퀴를 돈 다음 시모카마가리 중학교로 이동, 이후 학교 운동장에서 춤과 노래, 각종 전통 공연을 선보이며 축제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그리고 지난 2016년과 17년, 한일 양국 시민이 손에 손을 잡고 흥겹게 강강술래를 추던 모습을 기억하는, 시모카마가리 중학교 학생 참가자들의 작은 실수에 웃음 짓고 격렬한 춤사위에 환호하던 표정을 생생히 목격한 내게 개미 한 마리 안 보이는 운동장 풍경은 유독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목 놓아 부르고 회상해도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을 과거를 끄집어 내봐야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쉬움을 묻고는 텅 빈 운동장에 머물러 있던 시선을 돌려 남은 언덕을 마저 걸어 내려갔다. 잔잔한 바다 옆 해안 도로를 지나 마을에 하나뿐인 찻집 maruya cafe에 들러 목을 축인 후, 간란가쿠 (観欄閣)라는 근대 건축물과 작은 파출소를 통과했다. 거기서 몇 보 더 걷자 이시다타미(石畳)라 부르는 납작한 돌바닥길에 진입했다. 조선 통신사 일행이 걸었을 풍경을 재연한 돌바닥을 지나 삼사백 보 가량 더 지나자 도로 왼편 아래로 기다란 돌계단이 보였다. 후쿠시마 간기(福島雁木)라 부르는 이 계단은 1600년대 초, ‘조선 통신사 일행을 모시라.’라는 막부의 명을 받은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만든 것으로 통신사 일행은 이 계단을 밟아 섬에 착륙했다고 한다. 건설 당시 총 길이 113미터, 11단(층) 규모였던 돌계단은 현재는 55m 가량만 남아 있으나 이 정도만으로도 ‘통신사’의 흔적을 따라잡기에는 충분했다.
조선 통신사 상륙에 앞서 일본 측이 이용한 인솔 선박
한편, 돌계단이 끝나는 벽 위로는 통신사 일행이 탄 선박을 모실 때 썼던 복원 선박이, 배 오른쪽으로는 대마도에서부터 통신사 일행을 인솔한 대마도주가 숙소로 쓴 혼진(本陣)을 복원한 산노세 고혼진 예술 문화관(三之瀬御本陣芸術文化館)이 자리했다.
일본 서양화의 중역 스다 쿠니타로(須田国太郎)를 비롯해 일본 미술계에 발자취를 남긴 화가들의 작품을 한데 모은 문화관은 사실 큰 흥미를 못 느꼈다. 하지만 오사카의 상징 중 하나인 도톤보리 글리코 사인의 모기업인 글리코의 역대 표지와 관련한 기획전이 열린데다 이곳 접수처에서 판매하는 통합권으로 조선 통신사 자료를 한데 모은 쇼토엔(松濤園)을 비롯해 마을 내 모든 자료관 견학이 가능하다고 해서 통합권을 구입한 후 실내에 전시된 작품을 샅샅이 살폈다.
이어서는 웅장한 외관을 뽐내는 란토각 미술관에 들렀다. 이곳은 일본화를 비롯해 유채화, 판화 등 소장 작품 2,200여 점 중 수 백 점을 ‘시기’에 맞춰 내건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 부는 실내 1,2 층에는 많은 예술품이 전시되었는데 하나하나 살피는 과정에서 피로를 느꼈다. 깊고 그윽한 미술의 세계를 느끼기에는 내가 가진 내공이 부족함을 체감하며 전시실 밖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후 다시 힘을 내 전시품 몇 점을 더 살핀 후 밖으로 나와 미술관 뒤편에 있는 하쿠세츠로(白雪楼)로 들어갔다. 에도 말기, 지역을 대표하던 부호이자 한학자였던 야마지 키고쿠(山路機谷)의 발자취가 남은 이곳은 그의 조부가 교토에서 운영하던 기코우테(奇好亭)라는 유각을 옮겨온 것으로 그는 이곳에 머물며 한학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 기울였다.
허름한 대문 뒤, 작은 정원을 낀 목조 건물 1층. 벽 군데군데 세월의 손 때가 묻은 실내 한 쪽에 마련된 안내소에는 여성 관리인이 앉아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손부채질로 더위를 달래며 라디오 소리에 귀를 쫑긋 거리던 그녀는 외간 인기척에 고개를 내밀어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날씨가 덥네요. 저기 복도 따라서 계단을 올라가시면 2층이 나오는데 거기가 시원해요. 한 바퀴 둘러보신 다음에 재차 여기로 와 주시면 차 한 잔 내 드릴게요.’
짧은 인사, 요금과 입장료를 주고받은 후 비좁은 복도를 지나 2층으로 올라갔다. 큼직한 창으로 삼면을 두른 건물 앞 옆으로 소소한 마을 전경이 펼쳐졌다. 뻥 뚫린 창문에서 이따금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옷깃을 흔들었다. 잠시 신선놀음이라도 할 겸 다다미 바닥에 엉덩이를 두고 양옆으로 두 손바닥을 길게 뻗친 후 양 다리를 쭉 뻗은 채 목을 젖혀 천정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중국 북송의 문인 소식(蘇軾)의 글귀가 쓰여 있었다. 노란 천정을 빼곡히 매운 흰색 한자를 넋 놓고 바라봤다.
한 획 한 획,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글자를 따라 읽다 왼쪽 볼에 부딪치는 바람이 흘러오는 창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유유자적 흘러가는 물결 위에 뜬 배 한 척. 그 뒤로 옹기종기 모인 평화로운 어촌 풍경을 훑다 사색에 빠졌다.
그렇게 10여 분, 세월아 네월아 하며 멍하게 있다 1층 와실(和室)로 내려갔다. 도코노마((床の間・ 족자를 걸고, 꽃이나 장식물을 두는 공간) 맞은편 다다미 바닥에 짐을 놓고 앉자 관리인이 말차와 화과자를 가져왔다.
‘맛있게 드세요.’
음식이 담긴 쟁반을 바닥에 놓자마자 제 자리로 돌아가려던 그녀가 잠시 멈칫하더니 무슨 생각에서 인지 도코노마 옆에 위치한 벽에 손을 가리켰다.
‘이 벽(도코 와키.床脇)은 돈덴가에시(どんでん返し)라는 이동식 벽으로 지금 앉아 계신 다실과 2층을 잇는 역할을 해요. 평소에는 벽으로 쓰다가 2층으로 올라갈 때는 이렇게 밀어요. 그러면 지금 보시는 것처럼 통로가 드러나지요. 다만, 지금은 노후화로 인해 문을 연 상태로 고정해 뒀어요.’
문을 여닫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며 미안한 표정을 짓던 그녀는 두 손으로 문을 돌리는 시늉을 한 후 비로소 방을 떠났다.
이후 다시 홀로 남은 와실. 짚 냄새 흐르는 방 중간에 놓인 말차 그릇을 두 손으로 쥔 다음 입으로 가져다 댔다. 차 싹 생육 기간 중 일정 기간, 빛을 차단하여 기르는 ‘차광재배’를 통해 생산된 말차는 달달한 화과자를 곁들여 마시는 게 일반적이다.
송나라에서 차를 들여온 것 계기로 승려들이 정신 수양 차원에서 마시기 시작했다고 하는 말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다도 스승이었던 센노 리큐에 의해 정립된 다도 문화의 한 축을 이끌었다. 이후 상류층과 상인 사이에서 고급문화로 향유된 다도 문화는 오랜 세월을 거쳐 ‘일본인의 생활 깊숙이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런 일본인들조차 편의점이나 카페에서 마실 음료로 말차를 주문하거나, 집에서 타 마시는 정도에 그친다. 따라서 이들에게도 꿉꿉한 다다미 냄새와 고즈넉한 분위기 흐르는 다실에 앉아 말차 한 잔에 화과자를 곁들이는 건 색다른 경험으로 다가온다. 당연히 오랜 일본 생활로 이들 사회에 익숙해진 내게도 이 순간이 오래전 일본스러움을 느끼도록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조선 통신사의 기록과 자료가 여기 한 자리에, 쇼토엔(松濤園)
떫고 쓴 말차 한 잔을 깨끗이 비운 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하루 일정 중 3분의 2를 소화한 만큼 좀 더 쉴 만도 했으나 지금부터 방문할 쇼토엔에서 보고 느낄 게 많기에 서두르기로 했다. 출발 1분여 만에 도착한 쇼토엔은 조선 통신사와 관련한 자료를 비롯해 도자기와 등불 등 옛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전시품이 있는 ‘역사 자료관’이다.
관내에는 타지역에서 옮겨 온 전통 건축물 세 채와 역사적 자료를 참고해 복원한 건물 한 동이 있다. 먼저 매표소 옆에 붙은 도자기관(陶磁器館)은 18세기 중엽, 미야지마 섬 입구에 세워진 키가미 저택(木上邸)을 옮겨온 것으로 내부에는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끌려온 조선인 도공과 그들의 후손이 빚은 도자기를 비롯해 현대 작가들의 작품이 진열되었다. 이들 작품 중 눈길을 사로잡은 건 단연 조선인 도공들이 빚은 초기 이마리 도자기였다. 투박하면서도 담백한 도자기 표면에서 고향을 잃은 자들의 거친 삶과 고국을 향한 그리움이 묻어 나왔다. 다만, 이러한 느낌은 현대 작품에 이를수록 옅어져 18세기 중엽 작품부터는 남의 나라 예술품 티가 나기 시작했다.
낯익음이 낯섦으로 변하며 빨라진 발걸음은 나를 건물 가장 구석, 흰색 벽을 두른 외딴 방으로 이끌었다. 벽 2면에 수채화 마냥 아름다운 전경을 담은 창문이 자리한 방. 창문을 낀 벽과 벽 사이에 우뚝 순 기둥들은 우산 살을 닮은 천정을 지탱했다. 10년 넘게 일본에 살며 여러 지역을 돌라봤지만 우산을 가져다 붙인 듯한 천정은 이번이 처음이라 좀처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왕 신기한 구경을 한 김에, 방 안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사색을 즐겼다. 그 사이 콧잔등과 미간에 묻어 있던 땀방울이 씻겨 내려갔다.
이어서 도자기관 맞은편에 있는 전통 건물로 이동했다. 건물 앞에 큼직한 문인석(文人石 ・왕과 귀족, 양반의 무덤에 자리했던 문신(文臣) 형상의 석물) 두 개를 둔 이곳은 조선 통신사 자료관 고치소 이치방관(朝鮮通信使資料館 御馳走一番館)이다. ‘최고의 접대관’이라는 뜻을 가진 건물 명칭은 통신사 정사(통신사의 최고 책임자) 조엄이 1763년 10월 6일부터 1964년 6월 22일까지 약 9개월간 일본 전역을 돌며 쓴 해사일기에 기록한 ‘시모카마가리에서의 접대가 최고였다.’라는 글귀에서 따 왔다.
도야마현 도나미시에 있던 아리가와 저택(有川邸)을 옮겨온 전시관 내부에는 2017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된 조선 통신사 기록물 중 하나인 조선인 내조 오보에 비젠 접대선 행렬도 (朝鮮人来朝覚備前御馳走船行烈図, 세토내해를 건너던 조선 통신사 일행의 모습을 그린 8M짜리 그림 두루마리)를 비롯해 조선 국왕의 국서를 받든 정사가 탄 제1선단을 10분의 1크기로 축소한 배 모형, 일본 측이 통신사 일행에게 대접한 상차림 등 진기한 자료가 가득하다.
이중 통신사 일행에게 대접한 상차림을 재연한 모형은 일본 측의 정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200여 년간, 12차례에 걸쳐 통신사 일행을 인솔한 대마 도주는 일정에 앞서, 이들 일행이 좋아하는 음식 리스트를 뽑은 후 이들이 머물다 가는 지역 책임자(영주)에게 전달했다. 그러면 영주들은 전 지역을 뒤져 식재료를 구한 후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만들었다.
하루 세 끼 올라오는 상차림은 지위에 따라 달리 제공했으나 기본적으로 진수성찬이었다. 가령 정사와 부사 종사관에게는 아침저녁으로 각각 7,5,3 개의 식전 요리를 제공했고, 점심에는 5,5,3 개의 반찬을 올렸다. 이것으로 입가심이 끝나면 3개의 국과 15개의 반찬을 제공했는데 이때 상 위에는 전복과 도미, 오리, 꿩 요리 등 진귀한 음식이 가득했다. 이러한 상차림은 당시 에도 막부 최고위층이 연회 때 먹던 것보다 화려하고 풍성했던 것으로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지나친 ‘대접’이라 불만을 갖기도 한다. 하지만 ‘에도 막부가 초빙한 귀한 손님’이기에 대놓고 항의하지는 못했다.
이렇듯 귀한 대접을 받은 통신사 일행은 고마움의 뜻으로 시문이나 시화 등을 선물했고 이들이 쓴 작품들은 일본에서 비싼 값에 팔렸다. 때문에 너나 할 거 없이 글귀를 선물 받고자 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때문에 막부는 ‘조선 통신사 일행에게 글귀와 시를 요구하지 말 것’이라 금지령을 선포하기도 했다.
이렇게 지나가는 것만으로 많은 이야기를 낳은 통신사 행렬은 당시 민중들에게도 큰 화젯거리였다. 고베시립박물관에 전시된 ‘조선 통신사 내조도’(朝鮮通信使来朝図)에는 통신사가 에도(도쿄) 니혼바시 거리를 지나는 풍경이 등장하는데 이들 주변으로 몰려든 일본인들의 모습을 통해 통신사를 향한 높은 관심을 엿볼 수 있다.
한편 긴 여정 끝에 에도에 도착한 통신사 일행은 막부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는 큰 선물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명분과 자존심을 내세운 통신사 측은 이들이 건네는 재물을 거부하기에 바빴다. 그런 가운데 앞서 언급한 조엄은 고구마를 조선에 들여와 빈민 구제에 이바지했다. 그는 쓰시마를 지나던 중 고귀위마(古貴爲麻)라 부르는 풀뿌리가 굽거나 삶아 먹을 수 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돌아가는 길에 고구마 종자를 조선에 가져갔다.
이렇듯 지난 200여 년, 한일 양국의 친선 우호의 흔적이 남은 이야기와 이를 뒷받침하는 사료들이 남은 전시관 구경은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즐거웠다. 이번이 첫 번째 방문이 아님에도 들를 때마다 색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되니 설레는 게 당연했다. 따라서 이후로도 한참 동안 실내 곳곳을 둘러보고 나서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고치소이치방관에서 1시간 넘게 시간을 보내는 사이, 건물 옆으로 그림자가 짙게 늘어졌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싶어 손목시계를 확인하니 현재 시간 오후 3시 50분, 버스를 타기까지 1시간 남짓 남았다. 그리하여 조금 서두르기로 했다.
에도 시대, 시모카마가리는 세토나이해(瀬戸内海・규슈와, 시코쿠, 간사이를 잇는 바닷길)의 주요 무역 거점으로 마을 내에는 물자 관리와 수송, 해상 경비를 도맡은 관청인 ‘고반쇼’(御番所)가 설치되었다. 이를 현 고치소이치방관 바로 옆에 복원해 놓았는데 건물 앞마루에 앉아 바라보는 바다 전경이 실로 예술이었다.
그리고 고반쇼 옆에는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 지역의 거상 ‘요시다 가문’의 발자취가 남은 ‘요시다 저택’을 이전해 만든 ‘아카리노관’이 있었다. 기원전에 만들어진 테라코타 램프부터 석등과 기름 램프 등 세계의 진귀한 램프가 일으킨 형형색색 불길은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매력이 있었다. 빨갛게 노랗게 피어오른 램프에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깊은 감상에 젖어 들기에는 내게 주어진 시작이 부족했다. 두 번째 여행지인 미타라이 마치에 들어가는 버스가 도착하기까지 20분도 안 남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쇼토엔을 나와 앞서 지나친 구멍가게에 들러 과자와 빵, 음료수를 구입 후 빠른 걸음으로 정류장에 도착해 저 멀리서 다가오는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