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연인> 박효신
쉽게 위로하지 않고,
서둘러 웃지 않아도,
고요히 물드는 눈빛으로 알 수 있는
이렇게 너와 나
아마도 우리는, 연인
가끔 하나에 꽂히면 그 노래 하나만 반복해서 듣게 된다. 요즈음 가장 많이 들은 노래는 박효신의 연인이다.
LOVERS: Where is your love? 콘서트 인트로였던 그 노래는, 영상으로만 봐도 만렙의 내공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이미 그가 얼마나 뛰어난 가수인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컨셉, 영상, 조명, 구조, 동선, 그리고 화룡정점을 찍는 그의 보컬과 피아노 반주에 그 순간의 감동이 영상을 찢고 나왔다! 아이의 눈동자 속에서 그가 피아노 치던 장면을 실제로 본 사람들은 어땠을까 하는 부러움이 절로 든다. 보랏빛의 어떤 환상의 세계를 잠시 훔쳐본 기분이다. 음악을 듣는 동안은 잠시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몽환적인 느낌에 한동안 머물러 있고 싶어 진다.
무엇보다 가사가 좋다.
쉽게 위로하지 않으며, 서둘러 웃지 않아도, 눈빛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이라니.
얼마 전 D의 생일날, 십 수명이 초대되어 떠들썩할 것 같던 날에 우리는 조촐하게 고작 세 명이 모여 앉아 도란도란 술도 없이 차를 마시며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각자의 인생이 얼마나 불완전하며 고작 작은 것들에 얼마나 흔들리는지에 관해 이야기하다 문득, 데이팅에 대한 이야기로 주제가 넘어갔다. 그동안 살아남기 바빠 다른 일에 관심을 둘 여유조차 별로 없었다는 말에, D가 마지막에 만난 그 사람을 사랑했어? 하고 물었다. 음, 좋아했으니까 만났겠지? 그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몰라도.
'사랑해'의 힘을 믿지 않는 편이다. 누군가를 만나는 동안에도 그렇게 달큰한 마음만을 담아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의심이 담긴 마음으로는 나도 그렇다는 답도 쉽게 할 수 없었고. 말한다고 옅어지거나 닳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입에 와 닿은 적이 없던 말들.
단어와 의미에 회의적이다. 그렇지만 쉽게 위로하지 않고, 서둘러 웃지 않아도, 눈빛으로 알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름을 붙여주어도 괜찮겠지. 말처럼 쉽지 않은 관계다. 가깝다고 생각하는 친구나 가족에게조차 우리는 쉽사리 위로하려 하고, 서둘러 웃어 주고, 가닥가닥까지 눈빛만으로는 알 수 없는 관계인 경우가 많으니까. 애쓰지 않아도 함께 있는 시간이 불편하지 않고, 말과 말 사이의 행간을 채우려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이란 얼마나 어려운가.
애초에 잘 맞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사람은 대체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 맞지 않는 사람들끼리 만나 어떻게든 합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힘겨워보였고, 그런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어려운 점이라면 경험 없이 어떻게 맞는 사람을 만날 수 있겠느냐는 것. 사람들은 많이 만나고 겪어봐야 사람 보는 눈도 생기는 거라고 했다. 이십 대의 나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혹은 좋은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나와 꼭 맞는 것은 아닌 사람들과 연애를 했다. 돌아보며 이야기하자면, 사람을 만나봐야 알게 되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 경험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으니까.
그렇지만 또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믿음도 여전하다. 어떠한 단점도 없는 완벽한 사람을 찾고 있지는 않다. 나조차 그렇지 못하니까. 다만, 스스로 감내할 수 없는 부분이 어떤 것인지는 명확히 아는 것이 좋겠다. 자신을 위해서도, 상대를 위해서도. 스스로를 객관화하여 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남을 아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언젠가부터 열정만으로 덤비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열정에는 결국 끝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너무나 잘 알아서. 애쓰는 노력에는 한계가 있고, 언젠가 지치면 그 안에 있는 본연의 모습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동안의 다양한 쉐어하우스 생활 속에서 깨달은 점은, 좋은 사람 혹은 좋은 친구가 되는 것과 좋은 하우스메이트가 되는 일은 완전히 다른 별개의 일이라는 것이다. 생활을 공유하는 것은 사소하지만 너무 중요한 일이라 많은 것에 영향을 끼친다. 아무리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라도 설거지를 오래도록 늘어뜨려 두거나 매일 머리카락을 하수구에 남겨두는 사람과는 도무지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을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서야 알았다. 나는 제 한 몸은 멀쩡해도 집을 난장판을 만들어 두고 사는 사람과는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다.
타국 생활은 꽤나 익숙해졌다. 굳이 무엇인가를 더 원한다면, 하루의 끝에 일상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 정도 일까. 연인이든, 친구이든, 하우스메이트이든 어떠한 형태/이름의 관계이든 상관없는 것 같다. 호기심과 호감으로 만나 서로를 알아가는 단계를 넘어서서, 상대를 이해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관계. 그리고 상대의 의지를 믿고 서로의 신뢰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 오래도록 서로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적당한 선의 배려와 기본적인 매너를 탑재하고서, 때때로 맥주나 와인을 마시며 저녁을 함께하기도 하지만 각자의 시간과 공간을 보장받는 관계. 무엇보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말보다 까다로운 이 관계의 설정은 아마도 또 이상향일 뿐이라서, 영원히 가질 수 없는 허상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