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야, 로 시작하는 당신의 희망에 대한 답
OO아, 어디야
하고 묻는 노오란 메신저 창을 보는 순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이 쿵 하고 떨어졌어.
왜 잘 지내니, 가 아니라 어디야, 일까. 혹시 내가 알아야 할 무슨 일이 생겼나. 그게 장례식 같은 일이면 어쩌지? 너 어디야, 혹시 한국이면 누구누구가 어떻게 되었다는데 와 봐야 하지 않겠니, 같은 말이 이어지면 어쩌나. 하는 마음을 뒤로 숨기고 아직 네덜란드지, 언니는 잘 지내? 하고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답장을 남겼어. 가만히 메신저 창을 바라보다, 2-3분 정도, 옆의 노란색 숫자 1이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고 얼른 창을 닫고 말아.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잠을 자자. 내일 들어도 늦지 않을 거야. 제발 나쁜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침에 일어나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노란색의 메신저 창을 열었어. 밤새 어떤 답이 와 있을까. 한국과 7시간 시간 차가 나는 이 곳에서, 한국에서 막 아침을 시작하려는 찰나에 나는 잠이 드니까. 이제는 익숙해졌어. 이 정도의 시간 차이. 7시간쯤을 미뤄 생각할 수 있게 되었지. 다행히 별 일은 아니었나봐. 아침 출근길 운전 중이었다고, 그냥 보고 싶어서 연락했다는 말로 단어는 멈춰 있었어. 다행이다. 마음을 쓸어내리고 나선, 다시 생각해. 왜 내 생각이 났을까. 벌써 몇 년이 넘게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누군가가 갑자기 생각이 난다는 건 그냥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거든. 분명 어떤 계기가 있었을 텐데, 그게 뭘까. 언니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워킹맘으로서 언니의 피와 땀과 눈물을 갈아 하루를 일궈내는 일에 지칠 때, 그럴 때 반대로 결혼을 하지 않고 먼 나라를 떠도는 내가 문득 생각난 건 아닐까. 아니면, 라디오나 뉴스에서 유럽 얘기라도 나왔던 걸까. 언니가 아는 유럽에 사는 사람이 혹시 나 하나뿐인 걸까. 그렇지만 무엇이건, 왠지 좋은 이유는 아니지 않았을까. 그냥, 그런 생각을 했어.
나는 스무 살에 첫 해외여행을 하고 한동안은 내게 첫 여행과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안목을 터준 캐나다를 오래 그리워했고, 그다음엔 남미의 열정을, 그 이후엔 고생하며 걸었던 산티아고의 순례길을 그리워했거든. 그런 그리움은 일상이 고될 때, 가장 극대화되었던 것 같아. 이제 이렇게 유럽에서의 삶을 시작하고 난 이후엔 더 이상 여행을 그리워하지 않게 되었어. 호기심과 로망 같은 것들은 이미 채워진 지 오래되었고, 여행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자극적인 상황 속에 삶이 놓이고 난 이후로는 여행의 짜릿함이 그리워지지 않더라고. 하지만, 언니의 여행은 캐나다로 멈추었으니까, 여전히 그 시간이 그립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보통 그런 추억들이 그리워지는 이유는, 그때가 지금보다 더 행복했다고 믿기 때문이겠지.
다른 말없이, 한국은 언제 와, 하는 물음이 반갑지만, 그래서 그럼 우리 언제 날 잡고 통화라도 할까? 하며 시간을 맞춰보기를 제안하지만, 나는 언니가 답을 하지 않을 거고, 그래서 우리가 통화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것도 알아. 지난 몇 번의 메신저 대화가 그랬듯이. 아마 언니가 마지막에 흘리듯이 남긴, 그래서 정착은 했고? 하는 말에 단단하고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응, 나 완전 정착했어! 라는 답을 할 수 있었다면 아마 전화가 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우리는 모두 마음 한켠에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이라면' 하는 마음을 품은 채로 타국에서 만났던 사이니까. 그 마음이 뭔지 너무 잘 아니까. 그것이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사그라들지 않는 마음이라는 것도 아니까. 나도 내가 언니에게 좋은 소스를 제공해줄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아. 인생이라는 게 늘 그렇겠지만.
나는 아름답고 신나게 살고 있지 못해. 외국인으로서의 인종차별과 비유럽인이라는 신분의 벽에 자주 가로막히고, 이 곳에서도 저곳에서도 완벽히 뿌리내리지 못하고 부유하는 삶을 사는 것에 좀 지쳤어. 익숙해진 것은 익숙해진 대로 해 나갈 수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매일 기대하지 않았던 장애물들을 피하거나 넘으면서 하루하루 버티듯 지내는 날들이 더 많아. 이것이 내가 원하는 방식의 삶이었다고 한대도, 그것이 늘 상상하던 이상향과 같을 리가 없잖아. 이 땅에서 얻은 거라곤, 유럽에 환상이 있지 않더라 라는 사실뿐이야. 물론 와서 겪어보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었을 사실이겠지만, 그래도 때로는 서글프기도 해. 지금 내가 원하는 자리에,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걸까? 묻고 또 물으면서. 정착은 했고? 라는 말에는 그래서, 이 나라에서 자리 잡고 이민자로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 라는 희망이 숨어있는 거겠지? 미안하지만, 나는 그 질문에 그렇다고 답을 해 줄 수 없어.
무엇이건, 언니가 고단한 어느 날에, 내 생각이 났다면,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해. 이제 어느 시간을 지나 내게는 가족 이외에 한국에서 연락이 오는 사람이 별로 없거든. 그런데, 그래서 연락이 오면 놀라.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이 먼 곳에 있는 나에게까지 연락이 오는 거라면. 한국에 있던 모든 메신저의 단체방을 빠져나온 이유는, 내가 이제는 그곳에 있지 않아서 대응할 일들이 현저히 줄어들었기 때문이야. 어느 순간부터는 공감을 할 수도 없고, 모임에 참여할 수 도 없는데, 의미 없이 그 안에 존재하는 것이 낯설게 느껴졌거든. 나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멤버가 결혼을 했던 것 같은데, 또 결혼할 사람이 남아 있나? 그렇다면 이젠 정말 연락할 일이 남은 건 장례식뿐인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거지. 오랜만에 온 연락이 누군가의 사망 소식일까봐 겁이 나. 그렇게 되어버렸어.
언니, 그래도 타향살이에서 얻은 단 하나의 교훈이, 의미가 없지는 않아. 나는 이제 영원히 '이곳이 아닌 어딘가'를 꿈꾸지 못해 애타는 사람으로 살지는 않을 수 있으니까. 물론, 손바닥을 뒤집으면 언제나 뒷면이 있는 것처럼, 내가 내 나라에서 자국민으로서의 삶에 최선을 다했다면, 남들처럼(그놈의 남들처럼 이 대체 뭔지 몰라도) 안정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면, 그 삶에도 행복이 있었을까 가끔 궁금할 때가 있기는 해. 지금처럼 불안정한 삶에 매일같이 어떤 편견과 불안에 둘러 쌓여 살지 않아도 되었을까. 하지만, 아닐 거야. 어디에서 살아도 나는 그저 나이고, 내 불안은 내 안에 있었으니까. 어디에나 우리 모두에게 각자의 주어진 삶의 몫이 있는 거겠지. 막상 그 안에 있을 땐 쉽게 느낄 수 없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더 이상 캐나다가 그립지는 않아도, 가끔 스키장에서 자연산 눈을 가르며 보드를 타던 그때의 나는 그리워. 밤새 언니 오빠들과 신나게 놀던 시간들도 그리워. 모두에게 사랑받는 사람이었던 언니가 부러웠어. 나는 왜 저렇게 모두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지 못할까 고민했던 날도 있지만, 나름 행복했던 나날들이었다고 생각해. 그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들을 지나왔으니까.
언니, 다음엔, 우리 정말로 통화할까? 그것이 육아의 고됨이나 워킹맘으로서의 고충, 혹은 나 자신으로 살지 못하는 삶에 대한 회의 같은 거라도 나는 좋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