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에 매우 진심이라서요
그러니까, 저는 약간 해바라기 같은 사람입니다.
햇빛을 좋아해요. 아주 많이.
그래서 오늘은 기분이 좋습니다. 제 작은 공동 작업실은 남향이고, 오늘은 흔치 않게 빛이 좋은 날이거든요. 가만히 창가의 책상 앞에 앉아만 있어도 햇빛이 잔뜩 들어와 눈을 찌르네요. 사람에 따라서는 이렇게까지 눈을 찌르는 햇빛은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좋아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해바라기 같은 사람이라.
종종 삶에 쉼표를 찍을 때마다 도서관에 갑니다. 어떤 이에게는 지루한 곳이겠지만, 제게는 도서관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여러 권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는 것이 일종의 스트레스 해소거든요. 한국에서 살던 곳에서는 근처에 남향의 큰 창이 있는 도서관이 새로 지어진 덕분에 오후에 원하는 만큼 햇빛을 실컷 받을 수 있었죠.
얼마 전에, 친구들과 여행 이야기를 하다가 시애틀 여행 이야기가 나왔어요. 어땠냐고 묻는데, 딱히 기억에 남는 일이 많지 않더라고요. 날씨는 서부답게 흐렸고, 유명한 마켓은 보는 재미는 있었지만 실제로 제가 뭔갈 사서 요리를 해 먹은 것도 아니고요. 스타벅스 1호점은 그냥, 그렇구나 했고, 스페이스 니들은 가보지 않았습니다. 중고차를 사서 캠핑을 하며 미국을 여행하는 친구들을 따라 캠핑장에서 며칠을 보내는 동안, 장작패기라는 새로운 재능을 발견한 것 말고는 특별한 기억은 없어요. 시애틀은 어떤 특색이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좋은 기억이 하나 떠올랐죠. 거기 렘 쿨하스가 지은 도서관이 있는데 정말 좋았어! 그런 독특한 공간은 그땐 처음 경험해봤거든. 친구는 Nerdy 하다며 웃었고요. 사실 그런 반응이 나올 것 같았죠, 도서관이라니. 하지만 그땐 건축학도였으니까 공간에 관심이 있었던 건 당연한 거야. 게다가 그땐 한국 도서관에서 그런 지루하지 않은 공간을 보기 정말 어려웠다니깐, 너희는 잘 모르겠지만. 답했어요. 하루 종일 그 도서관에서 놀았거든요. 이쪽 햇빛을 보고 저쪽 공간을 보고, 이 소파에 앉아 있다가 저쪽에 가서 책을 보고, 또 내부의 서점에서 책도 몇 권 샀고요. 좋은 공간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거든요. 그것만으로도 정말 근사한 하루였죠.
저는 왜 아직도 대화의 공이 내게 넘어오는 것이 이리 쑥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너는 어땠어? 하고 모두가 내 얼굴을 주목하는 순간이 싫은 건 아닌데 긴장이 돼요. 가끔은 맥락과 전혀 상관없이 귀가 빨개지기도 하고요. 그렇게 부끄러울 일은 아닌데. 렘 쿨하스가 지금도 유명한 건축가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요즈음의 건축 트렌드가 어떤지 업계를 떠난 저는 알지 못하니까요. 한때 네덜란드의 건축이 전 세계의 최신 트렌드였던 적이 있거든요. 어쩌다 보니 렘 쿨하스와 가까운 동네에 살게 되었지만, 이 동네 사람들은 이 도시가 네덜란드의 다른 도시들에 비해 현대적인 건물이 많은 것을 자랑스러워하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못생겼다고 생각하지. 같은 이야기도 화자나 청자에 따라 엄청나게 다른 각도로 보일 수 있다니, 신기하죠.
어쩌다 이야기가 저기로 갔지. 아, 도서관에서 햇빛 받던 이야기.
그래서, 도서관에 갈 때면 커다란 나무로 된 블라인드를 굳이 한껏 열어젖히고 햇빛을 받았죠. 눈이 따가워서 제대로 뜰 수 도 없는데, 그냥 창가에 앉아 있었어요. 가만히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그대로 있어도 좋았지요. 그땐 그게 왜 좋은지도 모르고 그냥. 최근에 와서야 현대인의 정신 건강에 햇빛과 산책, 운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지식으로 알게 되었지만, 저는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 같아요. 이 빛을 받으면 기분이 나아지고, 왠지 산뜻한 마음 들고, 그래서 뭔가를 할 수 있는 원동력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요. 그렇게 저는 광합성하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진짜 빛이 없으면 시들었거든요. 지금도 햇빛을 받으면 없던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요. 꼭 굳이 정면에서 온몸으로 빛을 받죠. (그렇다고 눈으로 빛을 바라보는 건 아닙니다) 광합성을 해야 하니까. 엽록소가 에너지를 만들어야 하니까. 정말 저는 제 몸의 어느 세포에 엽록소가 있는 것 같아요. 소설을 써 보면 어떨까. 엽록소를 가진 인간. 아마 찾아보면 이미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광합성을 하는 순간은 너무 행복해서, 그때만큼은 두뇌의 회로가 매우 효율적이고 빠르게, 게다가 창의적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보통 밖에서 산책하며 햇빛을 받을 땐 뭔가 적을 수 없잖아요. 지금 이 느낌이 너무 강렬하고 좋은데, 지나가면 그뿐인 게 너무 아쉬웁달까요. 기억하고 싶은데, 건물 안으로 들아와 노트북 앞에 앉으면 광합성할 때 생성되던 수많은 에너지와 아이디어 같은 것들이 또 순식간에 사라지거든요.
유럽은 지난달부터 두 번째 lockdown이 시작되었고요, 지금은 curfew(이름하야 야간 통행금지)도 함께 진행되고 있습니다. 밤 9시부터니까 생활에 큰 영향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는데, 생각보다 많이 답답해요. 어떤 형태든 금지나 제한의 선언은 마음에 무엇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그나마 해가 점점 길어지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나날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