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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틂씨 Aug 19. 2021

빌런이 나타났다!

[미술관 노동자의 관찰일기] 03. 세상 어디에나 있다는 그 이름,





길가에 있는 레스토랑이나 카페, 바(bar) 혹은 다른 상점들에 비한다면 미술관은 아무래도 진입장벽이 조금은 더 높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벽을 뚫고 가끔은 빌런(villain; 악당)이 나타난다. 



술에 취한 사람 

작품을 (몰래/혹은 대놓고) 만지려고 시도하는 사람 

비치용 안내서나 작품의 일부를 굳이 집어 가는 사람 

직원에게 선 넘는 말을 시도하거나 따로 연락을 시도하는 사람 등등

 




지난 주말이었다. 


핑크색 피케셔츠에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은 꽤 키가 큰(더치 사회에서는 평균인) 흰머리의 더치 할아버지가 성큼 미술관 정문으로 들어왔다. 입장을 마쳐야 할 시간이 한 시간도 남지 않은 시간에 굳이 돈을 내고 방문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종종 있는 일이라 상관없었지만, 그에게는 특이점이 있었다. 얼굴이 상의로 입은 핑크 셔츠 색만큼 불그스레하고, 그와 나의 거리는 얼핏 봐도 그리 가깝지 않은 거리였음에도 어마어마한 술냄새가 훅 풍겨왔다는 것. 삐요삐요. 비상사태다. 겉으로 표현을 하지는 않았지만, 경계 모드가 된다.


관람객을 대하는 다양한 방식의 프로토콜이 있지만, 이런 경우는 들은 적이 없다. 당장 행패를 부리는 것도 아니라서 대응할 수 있는 다른 방식도 없었다. 일단, 눈을 떼지 않고 그를 쫓는다. 여차하면 어딘가에 신고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작품 관람은 하지 않고 한동안 어떤 직원에게 10분을 넘게 횡설수설을 하더니, 위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프론트 데스크에서 위층에 있는 직원에게 무전을 했다. 

- 지금 술 냄새가 엄청 나는 핑크색 셔츠를 입은 나이 든 남자가 올라갔는데, 혹시 모르니 조심해. 특별히 공격적(aggressive)이거나 아직까지 별 문제는 일으키지 않았는데, 그래도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다고 답한 동료의 무전이 끊기자마자, 금세 다시 무전이 왔다. 그 남자가 작업의 일부인 프린트물을 찢었단다. what?!? ...이런 젠장. 


일단 그를 말리고 옆에 있던 관람객용 안내문을 쥐어 내려보냈다고 했다. 곧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그는 다시 한참을 주절주절 동료에게 더치로 컴플레인을 하다가 겨우 문 밖을 나섰다. 이럴 때가 돼서야, 이 나라 말을 조금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남자는 그날의 마지막 관람객이었다. 그만 아니었으면, 모두가 평온하게 정시 퇴근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위층에 있던 직원이 찢어진 프린트물 두 페이지를 양 손에 들고 황당한 표정을 하고 걸어 내려왔다. 모두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 물음표가 가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동료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작업물 앞에 서서 당당하게 두 페이지를 찢었단다. 미처 말릴 새도 없이. 그래서 그 행동을 저지했더니, 그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가져가지 마시오'라고 안 쓰여 있던데? 그래서 가져가도 되는 줄 알았지. 

어이가 없던 동료가 이렇게 답해줬다고. 

- '가져가도 됩니다'라고도 안 쓰여있잖아요.  




주말 저녁의 어처구니없는 빌런의 침입으로,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볼 기회가 생겼다. 

내부인의 안전을 위해 술에 취한 사람의 입장을 미리 막을 수는 없는가? 하지만, 누가 그것을 판단(judge)할 것인가? 어느 정도는 되고, 어느 정도는 안된다고? 그리고 위험성의 여부는 누가, 또 어떻게 판단하는가? 그는 술냄새를 풍기기는 했지만, 공격적인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대응했어야 하나. 이것이 최선인가. 더 나은 대응책은 없었나. 주말의 비상연락망은 어떻게 운영되는가. 혹은 어디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나. 


최근 비상 상황(알람) 매뉴얼에 대한 직원 워크숍이 있었다. 강도 알람, 화재 알람, 비상용 알람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의 시나리오를 담은 안내였다. 하지만, 그중에 어느 알람도 울리지 않아도, 미묘하게 불편하거나 이상하게 안전하지 않게 느껴지는 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직원에게 성차별/성희롱적인 말을 던지는 사람도 종종 있다.(물론, 이런 일은 주로 여성에게 벌어진다. 21세기 유럽에서도) 사실, 이런 일들은 아무리 이론적으로 교육을 받아도 한 번에 머릿속에 각인되지 않는다. 직접 경험해봐야, 그리고 그 상황을 마주쳐 보아야 해결책을 가늠하게 된다. 사례를 나누고 더 나은 시나리오를 제시하는 일 보다 더 적극적인 대응 방법은 없을까. 




빌런은 어디에나 있다. 그리고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다. 


고상하고 지적인 무엇으로 치장되어 있을 것 같은 공간에도 그렇다. 

이번 기회로 길가에서 상점을 여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들은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면, 랜덤한 사람들의 방문(위험)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어있는 것 아닌가. 요즈음 나는, 사람들의 다양성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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