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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틂씨 Sep 07. 2021

우리는 세월을 스쳐 지나가는 중인지도

feat.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우리 집에는 전집이 거의 없었다. 내가 싫어했기 때문이다. 

책을 좋아하던 나와 동생을 위해 엄마가 책 전집으로 사줄까? 하면 싫다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혹시 그럴 돈이 있다면 보고 싶은 책을 하나라도 더 사달라고 했다. 동생의 뜻이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땐 한 살이라도 더 먹은 내 고집이 더 셌다. 위인전의 위인들은 하나같이 어릴 때부터 영특하게 태어나 남달랐다는 말이 의미 없게 느껴졌고, 과학 시리즈의 곤충 해부도는 징그러웠다. 무엇보다 책을 직접 고르고 싶었다. 전집에는 쓸데없는 책이 너무 많다. 친구들의 집 책장에는 종종 각종 전집들이 가득 꽂혀있었다. 그걸 다 읽었느냐는 질문에는 다들 아니라고 답했지만. 


숙제를 하기 위해서는 전과가 필요하던 시절이었다. 집에는 [올 컬러] 학습 대백과사전, 한국 역사 만화(전 30여 권), 우리말 큰 사전(전 2권)과 영한, 영영 사전이 전부였다.(*이름들은 오래되어 정확하지 않다) 당시에 필요하던 거의 모든 지식은 그 안에서 찾을 수 있었으므로 상관없었다. 우리는 대신 있는 책들을 마르고 닳도록 읽었다. 역사 만화는 늘 순서대로, 단군과 고조선에서 시작해서 조선까지 읽었다. 근대사는 어쩐지 재미가 없었으므로 대한 제국 이후의 이야기는 자주 빼먹었다. 백과사전은 우리 남매의 즐거운 놀이로 이용됐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동물이든 사물이든 무엇의 종류가 그려져 있으면 '하나, 둘, 셋!'하고 그중에서 자신의 최애 고르기 같은 게임을 했다.  





대신 보고 싶은 책은 한 권씩 샀다. 주로 엄마가 시장에 갈 때 따라가서 시장 입구의 동네 서점에 들렀다. 학습지와 문제집을 함께 팔던 작은 서점이었다. 엄마는 우리에게 꼭 한 번에 한 권씩만 책을 고르게 했다. 다음에 또 사줄게, 이번에 제일 마음에 드는 거 한 권씩만 골라. 각개전투처럼 동생과 나는 흩어져 서점 안에서 가장 재미있을 것 같은 책을 골라왔다. 때때로 학습 만화나 추천 도서 목록을 선택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소설이 훨씬 많았다. 아무리 두 권이 마음에 들어도 게 중에 더 마음에 드는 한 권을 골라야 했다. 그렇게 각자 고른 책은 집에 오자마자 읽기 시작했다. 궁금하니까, 일단 시작하면 또 멈출 수 없으니까. 나는 공부하라고 책상에 앉혀 놓으면, 새로 산 책이 궁금해서 견딜 수 없어 책부터 펼쳐 드는 아이였다. 엄마는 자주, 숙제 먼저 다 하고 나서, 책 읽어. 를 시전해야 했다.


그렇게 차곡차곡 책을 모았다. 어떤 날엔 공작 책을 사 와서 동생과 신문지나 우유팩, 수수깡이나 나무젓가락과 고무줄로 이상한 탐험 기지 같은 것을 만들었고, 어떤 날엔 퇴마록 같은 장편 소설들을 한 권씩 사 모으기도 했다. 새 책을 사면 각자 주인이 읽고, 서로 바꾸어 보았다. 동생과 나는 연년생이었으므로 수준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우리는 취향이 완전히 달라서, 늘 상대의 선택이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새 책을 다 읽고 나면 집에 샀던 순서대로 책장에 꽂혀있는 가장 오래된 책부터 순서대로 다시 읽었다. 그때 우리에게 책은 한 번 읽고 덮는 존재가 아니라 반복해서 읽는 존재였다.


엄마는 우리가 보겠다고 일단 고른 책들은 뭐든 거의 다 사주었다. 그렇다고 잡지를 사주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고른 책을 매번 검열하거나 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책을 골라오면, 이게 제일 보고 싶어? 묻고는 군말 없이 계산을 해주었다. 그러니까 꽤 오랫동안 스스로 책을 골라왔던 셈이다. 





어느 날 커다란 박스가 배달되었다. 앞으로 공부하는 데 필요한 모든 지식이 다 들어있는 책이라고 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한글판. 전 27권, CD 포함. 크고 무겁고 어두운 색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책 등에는 금색 글자가 번쩍이며 새겨져 있었다. 책 내부는 아주 얇은 종이에 아주 작은 글씨들이 깨알같이 가득 적혀있었다. 책장 한 줄이 온전히 백과사전만으로 꽉 찼다. 그 칸만은 일정한 높이의 남색 책 등이 모여서 커다란 벽돌처럼 보였다. 저것이 지식의 무게인가. 사전을 사게 된 정확한 사정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엄마가 동네에 방문했던 판매 기사의 꼬임에 넘어가서였는지, 부친의 지인 소개 때문이었는지. 다만 책장에 남아있던 묵직한 덩어리 감만 기억난다.


사전을 집에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아 27권 중에 아직 펴보지 못한 책이 더 많았을 무렵, 세상은 www로 시작하는 월드 와이드 웹 서비스가 한참 많은 것들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종이로 된 사전이 없어도, 인터넷에는 온갖 지식이 다 들어있다고 했다. 초고속 인터넷이 보급되고, 뭔지는 잘 몰라도 신명 나는 세계로 모두가 휩쓸려가는 사이에, 거대한 존재감을 가진 브리태니커 사전은 점점 잊혔다. 책장의 중간 칸에 꽂혀 있던 브리태니커는 급기야 맨 밑 칸까지 내려가 아무도 찾지 않는 헌책 같은 존재가 되었다.


요즘 세상에는 대신에 위키피디아라는 것이 있지.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면, 위키피디아뿐만 아니라 수많은 경로의 다양한 정보를 안내해준다. 객관성과 신뢰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어쨌든. 






뜬금없이, 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까지 나왔느냐 하면, 우리 집의 '왜' 시즌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다른 아이들처럼, 우리 남매에게도 '왜' 시즌이 있었는데, 엄마는 동생과 내가 뭘 물어보면 답을 해주는 대신 늘 '사전 찾아봐'로 답했다. 빨래를 하다가도, 설거지를 하다가도, 밥을 하다가도, 질문의 답은 늘 '사전 찾아봐'. 나는 주로 입을 삐죽이며 그냥 가르쳐주지! 엄마는 맨날 나보고 찾아보래. 하며 툴툴댔지만, 엄마는 한결 같이, 스스로 찾아봐야 오래 기억에 남는 거야 답할 뿐이었다. 


그때의 엄마 말은 맞았다. 그렇게 하나씩 깨우쳤던 지식들은 아마도 (지금 당장 생각나지 않더라도) 내 머릿속 어딘가에는 분명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요즈음은 뭐든 다 빠르게 돌아가서인지, 뇌에 남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뭐든 그저 순간을 스쳐 지나갈 뿐이다. 당시에는 습득하거나 이해했다고 믿어도, 뒤돌아서면 잊어버린다. 시대가 변한 건가 내가 나이가 들어가는 걸까. 책도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읽으면 다행이다. 요즘은 책을 속독으로 후루룩 읽고 치워버리니까. 그렇게 읽어도 자꾸 새 책이 나온다. 


가끔 어린 시절을 생각한다. 사전을 찾아 베껴 쓰면서 숙제를 했던, 전과와 백과사전의 출판사에 따라 답이 달라졌던. 나는 언제나 젊어서 첨단의 끝에 뾰족하게 매달려 있을 줄 알았지. 실은 키오스크 앞에서 쭈뼛거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지도 모르는데. 코로나로 가게마다 갑작스레 늘어난 키오스크들에 가득 쓰인 더치(영어 옵션이 없을 때도 많다)를 보며 쭈뼛거리면서, 언젠가 '세상의 최첨단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순간을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어쩌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처럼 그저 세월을 스쳐 지나가는 존재일 뿐 인지도 모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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