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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틂씨 Aug 01. 2019

어떤 날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이다

[페미니스트의 탄생 09.] 그러니까 노란 운동화만 기억해야지





노희경의 드라마를 좋아한다. 특히 <그들이 사는 세상> 이후의 드라마는 한 편도 빠짐없이 보았다.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사람과 사람, 혹은 사람과 세상의 관계를 따뜻하게 포옹하는 그녀의 드라마에, 나는 단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캐릭터 하나하나가 각자의 스토리와 삶을 갖고 살아 움직인다. 디테일하다. 그게 때로는 너무 아프고 슬프고 찌질하며 애잔하기까지 하지만, 그래서 보기 힘든 순간도 있지만. 그래도 또 그 힘듦을 껴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저마다의 기쁨과 행복과 위안을 찾아 나서니까. 응원을 할 수밖에.  




https://youtu.be/S1lnIeg96uo

그래도 가끔, 힘들어요. <라이브(Live), 2018>



드라마 <라이브(Live)>에서 한정오(정유미 분)는 성폭행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다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고, 그를 향한 한장미 경감(배종옥 분)의 따뜻한 답에 나는 울컥해야만 했다. 사람들은 피해자에게 피해자 다운 모습을 요구한다. 피해자라면, 더 슬퍼하고 더 괴로워야 한다. 그래 보여야 한다. 피해자는 웃어도, 행복해도 안된다는 편견 어린 시선들. 누가 그렇게 결정했나? 피해자는 피해자다워야 피해자라고? 



- 저는 멀쩡하거든요. 사건을 경험했고, 기억하지만, 대부분의 날은 별 일 없는 것처럼 웃어요.  

- 잘 됐네. 근데 뭐가 문제야? 네가 정상인 게 왜 문제야?

- 그게, 책에서는 그런 일을 당하면 트라우마가 생기기 마련이라고..

- 아니, 트라우마가 꼭 생겨야 돼? 사건 당한 것도 억울한데 꼭 괴롭기까지 해야 해? 그것도 편견 같은데. 넌 그 일을 그냥 받아들인 거야. 사건은 벌어졌지만, 넌 잘못이 없고, 시간은 지났고, 경찰이 되어서 살고 있잖아.

- 그래도 가끔은, 힘들어요.

- 그것도 정상이지. 매일 힘들어도, 가끔 힘들어도, 트라우마가 생겨도, 트라우마가 안 생겨도, 다 정상 아닐까? 모든 사람은 다 다르잖아. 

- 그러네요. 나는 문제없는 건강한 사람이네요. 가끔 사건을 만나면, 나는 감정이 없나, 현장을 보는 것이 무섭지 않은가, 정신이 뭔가 잘못된 건 아닌가 의심했는데, 나는 그냥 잘 견딘 거네요.


사람들이 좀 듣고 깨달았으면 좋겠다. 그 모든 반응이 정상이라고. 아프고 힘든 사람들이 가장 많겠지만, 고난을 이겨내는 사람들도 있으며, 그것을 이겨냈다고 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평소와 다르지 않은 자정 무렵의 가을밤, 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곳곳에 CCTV가 달려 있고, 경비실도 여러 군데 있는 오래된 아파트 단지. 늘 다니던 길이지만 어둠이 무서워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아주 작게 음악을 들으며 단지 안을 걷고 있었다. 한 남자가 내 뒤를 쫓아온다는 인기척을 느꼈을 때에는 이미 그가 나를 뒤에서 무서운 힘으로 붙잡은 뒤였다. 주저앉으며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자, 어느 아주머니가 베란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고, 다행히 그 남자는 금세 도망쳤다. 하지만 단지내의 어떤 경비원도 경비실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경비실은 채 10m도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도. 


부모님을 깨우고 싶지 않았다. 혹시 동네에 소문이 나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을 가장 먼저 했다. 나는 잘못한게 없는데도, 본능적으로 그랬다. 떨리는 손과 울먹이는 목소리로 경찰에 신고를 하고, 집까지 올라가지도 1층에 서 있지도 못한 채, 어느 층의 어두운 계단참에 숨어 경찰을 기다렸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도착했을 때, 나는 아파트 단지 사람들이 깨지 않도록 사이렌을 꺼 달라고 말했다. 경찰차가 오고 나서야 어느 경비원이 경비실 밖으로 나와 물었다.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한 건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의 안위가 궁금했겠지. 그 날, 나는 그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고, 붙잡힌 것 이상의 범죄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그저 모든 상황이 조용히 처리되기를 가장 먼저 바랬다. 당연히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주차장에 달린 CCTV는 실제로 강력 범죄가 '벌어져야' 볼 수 있다고 했다. 바꿔 말하면, 이 정도의 사건은 별 것 아닌 일로 치부된다는 이야기였다.


'별 것 아닌 일'의 직접적인 트라우마는 약 삼 년간 나를 따라다녔다. 해가 지기 전에 무조건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아직 밖인데 비구름이 끼어 하늘이 어둑어둑해지면 심장이 쿵.쿵.쿵. 뛰었다. 차라리 모르는 동네였으면 다신 쳐다보지도 않았을 텐데, 이 십여년 간 산 아파트 앞의 길목을 매일 멀리멀리 돌아왔다. 뜬금없이 엄마에게 단지 내라도 한적한 길은 다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근무태만의 경비원들을 신고하거나 최소한 경고라도 줄 수는 없느냐는 말에 경찰은 아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나는 아직도 '어흥' 하는 놀래키기에 과하게 놀라고, 그런 식의 장난을 아주 싫어한다.







그날의 기억을 바꿔야 했다. 낮에는 어떤 일이 있었더라. 제일 좋아하는 선생님이 신고 오신 노란 운동화가 너무 귀여워서 노트에 그 모습을 그려뒀었지. 노트를 펼쳐두고 한참을 운동화 그림만 쳐다보았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그날의 기억은 그 노란 운동화만 기억하자고 애써 다짐해야 했다.



 




누군가에게 트라우마로 남을 법한 일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별 일 아닌 것으로 지나가기도 한다. 뉴스에서나 나올 법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실제로 주변에서 벌어져 보아야, 남의 일이 아닌 내 일이 된다. 온갖 범죄의 사례가 뉴스에 들끓어도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은 벌어지지 않는 일이 되면, 그 사회는 공감을 잃어버리게 된다. 장담하건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경우의 숫자로, 훨씬 흔하게 유사한 범죄가 벌어진다. 나쁜 일은 그저 터부시 되어 공론화되지 않을 뿐이다. (당신이 남자라면, 당신이 알고 있는 세상과 여성을 상대로 한 범죄가 일어나고 있는 세상은 완전히 다른 세상일 확률이 매우 높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밤 길이 위험하니 여자 친구를 데려다주어야겠다고 생각하는 남자보다, 이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고 믿는 남자가 늘어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사람은 사람이 지킬 수 없으니까. 법과 제도와 사회적 인식이 뒷받침되어야 실질적인 해결 방안이 될 수 있다. 누가 누구를 지켜주지 않아도 모두에게 안전한 사회를 만들도록 노력하는 것이 가장 먼저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나는 아마도 오래도록, 그 날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노란 운동화만 기억하려고 한다. 그날의 기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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