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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틂씨 Aug 16. 2019

한 점 의심 없는 행복이라니, 좋겠다

feat. <행복이 거기 있다. 한 점 의심도 없이>, 정지우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면, 어떡하지. 글을 쓸때마다 자주 그런 부분에 대해 생각했다.

걱정한다고 딱히 당장 고치거나 나아질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좋은 글은 좋은 사람에게서 나는 향기 같은 거라고 믿었다. 경험에 의하면, 좋다고 느끼는 글은 대게 유려한 글이 아니라 솔직한 글이었고, 그렇게 솔직하게 민낯을 내보이는 사람이 나쁜 사람일 리 없다는 단순한 생각을 하곤 했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겠지. 틀림없이 그렇겠지. 사람을 단순히 좋은/나쁜으로 일반화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연스럽게 그런 결론을 내리곤 했다.


그렇게 따지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없어졌다. 나는 좋은 사람인가. 그래서 사랑받는 사람인가. 따져본다면 그렇지 않은 편에 가까운 것 같았으니까. 나는 까다롭고, 예민하며, 호불호가 명확한 사람이다. 둥그렇게 누구와도 잘 지내는 사람은 아니다. 사람을 보고 첫인상과 두어 번의 대화의 기회 속에 어떤 관계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으면 가까이 가지 않는 편이다. 세상 사람 모두가 좋은 사람일 거라고 믿고 일단 웃어줄 수 있는, 그러다 가끔 그 희망을 깨 부수는 사람이 나타나더라도 다시 안 보면 그뿐인 사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은 어쩌면 나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편한 사람. 그래서 일단 경계부터 한다. 저 사람이 안전한 사람일지 아닐지는 두고 볼 일이다. 시간이 지나고 어느 정도의 확신이 생길 때쯤에서야 먼저 웃을 수 있는 용기도 생긴다. 물론 그 시간과 확신이 100% 옳을 것이라는 보장은 여전히 없지만.






이제 페이스북의 시대는 갔지만, 정지우 작가가 페이스북에 매일 쓰는 글을 좋아한다.

어떻게 그 글을 처음 발견하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AI의 알고리즘을 통해 우연히 한 꼭지의 글을 보고 나서 그를 팔로우하기 시작했다. 매일 육아와 밥벌이를 하는 중에 짬을 내어 잠깐씩 쓴다고 했다. 지난달 <하루 20 나는 한다> 공동 매거진에 참여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마침 정지우 작가가 매일 쓰는 글을 보고 나서 받은 영향이었다. 아, 나도 저렇게 매일 조금씩 쓸 수 있을까, 아무거나 생각나는 대로. 물론 매일 쓰는 것은 생각보다 더 어려웠다. 나는 여전히 낯 모르는 독자에게 투명하게 속을 내 보이기는 어려운, 경계심 짙은 아마추어니까. 


그의 글에서는 은근하게 사람 사는 온기나 따뜻함 같은 것이 늘 뿜어져 나왔다. 어떠한 것에 대한 일방적인 공격이나 편견 대신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선 채, 그렇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강요나 설득 없이, 그저 나는 이렇습니다 라고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것. 그 작가의 신작이 나왔다. 제목부터 그런 분위기가 묻어나온다. <행복이 거기 있다, 한 점 의심도 없이>. 그가 썼던 글에 나온 문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른 작가의 추천사에도 그의 글은 따뜻하다고 쓰여 있으니, 그 온기가 나만 느끼는 것은 아니었나 보다. 그의 글을 보고 나면, 그의 문장처럼 그 사람 근처에 머무르던 행복을 몰래 훔쳐본 느낌이 들었다.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 마음이 따뜻하지 않을 리가 없지. 그런 생각을 자주 했다.


그러던 어느 날엔가, 사실 편집자들이 작가를 만나다 보면 글과 사람이 늘 같지만은 않더라 하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아아,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을 수 있다니, 굳건하게 믿어온 어떤 믿음이 깨지는 기분이었다. 너무 순진했던 걸까. 생각해보니 그것은 내가 추구하는 가치였을 뿐이다. 아마추어로서, 글로 남기는 생각에 대한 최상의 가치. 솔직함. 사실 내가 쓴 글은 나의 일부이지만, 글이 나의 전부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니까.




블로그에 대단치 않은 일기를 쓰면서도 언젠가 시스템에 오류가 생겨서 모든 비공개 글들이 어느 날 공개적으로 오픈되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십 대엔 일기장을 모든 부정적 감정과 힘든 마음을 쏟아내는 감정 쓰레기통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이십 대에 와서 온라인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는 나중에 다시 글을 읽을 수 있게 되니 그때의 폭풍 같은 감정들이 그대로 전해져 와서 결국 거의 지워버렸다. 그 감정을 계속 기억하는 한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아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렇게 날이 서고 정제되지 않았던 글들은 조금씩 두리뭉실하게 주어나 구체적인 지칭 언어가 없으면 완벽하게는 알아볼 수 없는 추상적인 언어들로 바뀌어갔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울 수 없는 인간이 되긴 글렀으니, 언젠가 사과집님의 글 속 사후 자기결정권에 대한 단상 처럼 비밀번호가 털려서 누군가 그 글을 본다고 해도 아주 정확하게 특정할 수 없도록.


그게 아니면 좋은 마음일 때만 적었다. 좋은 기억들은 간직하고 싶으니까. 언젠가 힘든 날 돌아보면 맞아, 그때 그런 기분이었어, 힘이 났지. 하고 되돌려 보거나 곱씹을 수 있게. 그런데 그렇게 좋은 것만 적는 것도 한계가 있더라. 이제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생기는 날, 그게 무엇이든 적는다. 생각을 정리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글을 읽다 보면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다. 엄마 이야기를 쓰고 싶다. 어린 시절의 어느 부분을 복기해서. 그런데 막상 새 창을 띄우면 다른 이야기를 쓴다. 엄마 이야기는 더 잘 적고 싶어서. 그래서 또 밥벌이처럼, 멈춰 서게 된다. 잘하고 싶다는 마음은 늘 기를 먼저 죽인다. 더 이상 잘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를 때쯤 되면 행복할까? 그렇지도 않을 것 같은데. 엄마로 한정지어둔 카테고리가 주제만 덩그러니 적힌 채 서랍에 빈칸으로 쌓여간다. 이렇게 무엇인가 부담감에 치여 버둥댈 때면 모두가 입을 모아 얘기했다. 욕심과 에고(ego) 때문이라고, 네가 특별하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꼭 뭐든 다 천부적으로 잘해야 할 필요는 없는 거라고. 안다. 너무 잘 아는데, 그런데 잘 버려지지 않는다. 아마 마음 어느  구석엔가는 그래도 내가 잘할  있을 거라는 희망을 놓칠  없는 욕심이 남아 있어서 인가보다.






여튼 요는, 나도 마음의 여유가 넘쳐서 남의 손을 쉽게 잡아 줄 수 있고, 선뜻 먼저 웃어줄 수 있으며, 글을 쓰면 따뜻한 내면이 드러나는 사람이고 싶다는 것이다. 재벌이나 천재보다는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서 마음이 여유로운 사람이 그렇게 부럽다. 그런 사람에게는 불안도 슬쩍 비껴나갈 것만 같다. 불안이 끼어 주인공 자리를 차지할 만큼의 큰 틈이 없지 않을까. 그냥 생각하는 대로 글을 써도, 딱히 우울하거나 비판적이지 않고, 그저 약간의 따뜻함과 인간적인 매력만 남는 사람. 이라는 것도 실은 존재하지 않는 허상 같은 것이겠지.


그냥, 지금의 나는 그저 부러운 것 같다.

행복이 거기에 있다니,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런 삶이라니. 좋겠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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