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스를 빠져나와 오늘은 30킬로 넘게 걷는 날이다. 이미 온타나스 알베르게에 예약을 해 놓았기에 작정하고 걸어본다.
부르고스를 지나 레온까지의 200킬로 구간은 스페인 중북부 고원 지대인 메세나 구간이다. 양쪽 옆으로 들판만 가득하고 나무도 없어 흔히 마의 구간이라 부르는 구간이다. 평상 시 쉽게 못 보는 앞뒤좌우가 뻥 뚫린 구간이라 뜨거운 햇살에 등짝은 뜨겁지만 마음은 시원해진다. 어찌 이리 하늘도 파랗고 예쁜지 기분이 한없이 수직상승한다. 이렇게 햇살이 내리쬐는 쨍한 그늘도 없는 길을 모자도 선글라스도 없이 걷는 서양의 젊은 애들이 보인다. 얘들아, 태양 좋지? 그렇게 좋다고 아무 것도 안 하고 걸으면 금방 주름지고 백내장 온단다!
하늘 반 땅 반, 걸어도 걸어도 지평선이 사라지지 않는 길을 걷다 생각하니 벌써 15일째, 이 길의 중반을 넘어가고 있다. 처음 이 길에 들어섰을 때 아름다운 풍경과 처음 만난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과 설레임으로 가득했다. 풍경과 사람에 대한 설레임과 관심은 점점 중반으로 가면서 나에게로 향하는 듯 하다. 그간의 일들이 넓은 메세타 지역을 지나면서 조금씩 슬라이드처럼 지나가고 나는 누구이고 어떻게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이 깊이 있게 스며들기 시작한다. 계속 걸어도 같은 풍경이 되풀이되다보니 풍경에 쏠리는 관심이 적어져서인듯 싶기도 하다.
그렇게 끝이 없는 지평선을 보며 광활한 길을 걷다 보니 오늘 예약한 알베르게가 보인다. 사막 끝의 낙원처럼 보이는 이 알베르게는 아주 예쁜 정원을 가지고 있고 나무 냄새가 향긋하게 나는 리조트 같은 곳이다. 알 수 없는 발 냄새, 땀 냄새로 가득하던 알베르게에서 고급 리조트같은 알베르게에 오니 호텔이 부럽지 않다. 이 곳에는 주방이 있어 부르고스에서 중국슈퍼에서 사 온 신라면을 끓여본다. 물 조절 실패로 유럽스러운 맛의 신라면이지만 이 곳에 와서 처음 먹는 나름 한식이다. 어울리지 않을 줄 알았던 화이트와인과도 물조절에 실패해서인지 꽤 어울린다. 숙소 앞 언덕에 올라가 처음으로 석양을 봤다. 매번 씻고 빨래하고 다음 날 예약하고나면 해 진 저녁이기도 했고 석양을 볼만한 장소도 없었는데 오늘은 메세타 구간이다보니 알베르게 정원 앞의 언덕에서 해지는 게 정면으로 보인다. 석양마저 아름다운 멋진 메세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