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풍경이 다시 펼쳐진다. 며칠간 비슷비슷한 풍경이 계속되는 이 공간은 일명 마의 구간이라 불린다. 며칠 걷다 보니 그 이유를 알 듯하다. 산티아고 순례길 초반의 산, 언덕, 들판, 마을, 도시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 길은 평지와 작은 마을을 반복하다 보니 오늘 길이 어제의 그 길 같다. 그래서 오히려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때로는 길이 나에게 말을 걸기도 하는 마법 같은 구간이다.
마을 이름도 어려워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흔히 하는 오늘 어디부터 걸었어요라는 질문에 답도 어렵다. 다들 캐리 그 뭐 있잖아 하면 비슷한 길을 걸었기에 서로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특히 오늘은 최장 17킬로 구간 동안 마을도 없이 계속되는 들판 구간이다. 끝이 없는 길을 걷고 또 걸은 끝에 언덕 아래로 드디어 마을이 보인다. 더 걸을까 했지만 더운 날씨에 쉬지 않고 걸어온 탓에 지쳐 오늘은 이곳에서 머물러야겠다.
걸어온 길이 보이는 알베르게 앞의 바에 앉아 언덕 들판을 멍하니 바라보니 끝이 없던 길이 평화로워 보인다. 긴 길의 끝에 있는 언덕을 내려오며 드디어 마을이구나라는 듯 안도의 웃음을 보이는 순례자들이 간간이 지나간다. 저 웃음의 의미를 알기에 엄지 척을 해 보인다.
그런데 야외 파라솔에 파리가 너무 많다. 꼭 여기뿐이 아니라 초반부터 파리가 참 많았는데 이곳 사람들은 크게 개의치 않는 듯하다. 특히 음식점에 있는 파리는 우리로서는 위생상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싶어 파리를 어떻게든 없애려고 하는데 이곳 사람들은 파리도 먹고살아야지 하는 건지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결국 파리 한 마리가 내 와인잔에 빠졌다. 이쯤 되니 전기 파리채를 들고 와서 여기저기 휘두르고 싶은 심정이다. 순례길에 진짜로 전기 파리채를 가져와 휘두른다면 아마 사람들은 경악해서 쳐다보며 길에서 쫓겨나지 않을까 싶지만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후려해지기도 하고 옆에서 경악하며 바라볼 사람들의 반응을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순례자 디너 메뉴를 먹기 위해 알베르게 식당에 가니 한국분이 인사하며 앉으라고 한다. 은행을 명퇴하셨다는 이 분은 백수 생활이 체질에 너무 잘 맞으신다는 데 그냥 하는 얘기가 아니라 진심이다. 회사 생활 얘기를 하며 오랜만에 회식하는 기분으로 와인 과음이 곁들여진 저녁 자리를 하고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스페인 컵라면으로 해장을 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어제 와인을 많이 마셔서인지 컨디션이 좋지 않다. 계속되는 고원 같은 풍경, 내리쬐는 뜨거운 햇살에 걸음의 속도는 더 느려진다.
느린 걸음으로 겨우 사하군에 도착해서는 레온으로 가는 기차를 탄다. 계속된 평지에 지치기도 하고 이 길을 마라톤하듯 고행하러 온 건 아니기에. 4시 30분에 온다는 기차는 결국 오지 않았고 오지 않은 기차에 누구도 불평하지 않는 분위기에 놀라며 5시 기차를 타고 계속되는 평지를 바라보며 저녁 레온에 도착한다.
오랜만에 도시에 도착하니 가슴이 뛴다. 도시가 주는 생동감, 잘 차려진 밥상 같은 느낌, 세련된 사람들의 옷차림. 그간 시골에서 만난 사람의 투박한 옷차림과 얼굴이 떠오른다. 거울에 비친 나는 여행자이다.
도시의 기운을 느끼며 힘차게오늘의 알베르게로 향한다. 각각 칸막이가 되어 있고 수건과 시트도 주는 도시형 알베르게이다. 알베르게의 깔끔함에 신나서 들어갔는데 수영장에서 나는 락스 냄새가 온 공간에 가득하다. 마치 사람마저 소독되는느낌이다. 역한 락스 냄새에 배낭만 놓고 나와서 도시 구경을 한다. 화려한 레온 성당은 도시를 더욱 화려하게 만든다. 그간의 동네는 마을이 작아 밤에 나와서 구경할 것도 없고 어둡기도 했는데 오랜만의 도시는 밤을 바쁘게 한다. 여기저기 구경하고 돌아다니다 보니 발걸음 숫자가 4만이 훌쩍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