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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룰루랄라 Oct 24. 2022

산티아고에는 어떻게 오셨어요?

레온에서 오피탈 드 오비고

여느 아침과 같이 알베르게의 부산스러운 아침 기운에 잠이 깬다. 여덟 시가 되어야 시골에서는 해가 뜨지만 이곳 레온은 도시이니만큼 여덟 시 전에 길을 나서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다. 알베르게 앞 카페에서 진한 커피와 버터향 가득한 크루아상으로 기분 좋은 아침을 먹고 오늘의 여정을 시작한다.


날래 보이는 걸음의 세명 뒤를 부지런히 따라 걷는다. 마라톤의 페이스메이커처럼 나보다 적당히 빠른 앞사람 뒤를 따라 걷다보면 속도로 좀 더 나고 표시판을 따로 보지 않아도 되니 좀 더 편하기도 하다. 배낭에 걸린 아기 신발이 귀엽다. 아마도 아이와 함께 왔다 생각하며 걷는 것이리라. 신발과 함께 다니는 게 슬픈 사연은 아니기를 바라며 적당한 거리를 두고 걷지만 이들의 발걸음은 경쾌하고 충분히 빨라 이들은 곧 나의 시선에서 유유히 사라진다. 지난번 길 위에서 봤던 수수한 여자 모자를 배낭에 매달고 걷던 할아버지 생각이 난다. 그 뒷모습만으로도 이 길에 오른 사연이 그려져 눈물이 났던 할아버지. 지금도 잘 걷고 계시겠지?   



산티아고에는 어떻게 왔어요?


알베르게에서 만나면 많이 받고 하게 되는 질문이 산티아고에는 어떤 계기로 왔는지이다. 이 질문은 각자의 사연을 담고 있기도 하고 한없이 깊어질 수 있는 질문. 


#더 늙기 전에 인생을 돌아보기 위해 온 노년 유럽인

#오래전부터 버킷 리스트였기에 2년을 준비하여 한 달 휴가를 내고 온 미국 간호사

#한창 일하며 생각 많은 프랑스 직장인의 생각 비우기 장소

#중국 교포 2세로 당차게 살고 있는 똑소리나는 스물아홉 엔지니어의 퇴직 여행

#오십 대 중년 여인의 내 이름 찾기

#중 2 딸과의 더 크기 전에 하는 모녀 여행

#명퇴 충격 치유

#버킷리스트 3대 여행 

#비행 소년 반성 여행

#매 년 휴가를 이 길을 세번째로 나누어 걷는다는 유럽 직장인

#자전거 동호회의 칠순 모임

#반백살, 육 실살 기념, 결혼기념일 축하 등등 


길 위에서 치유와 위로, 인생의 답, 추억, 사랑을 기대하며 찾는 곳. 그래서 이 길 위에는 설렘과 웃음과 함께 쓸쓸함, 묵직함이 있다. 시끌벅적 떠들며 걷는 사람보다 조용히 걷는 사람이, 그룹보다는 둘이 또는 혼자 걷는 사람이 많은 길. 여러 명과의 불편한 잠을 일부러 청하는 곳. 무릎, 발목, 어깨 통증과 물집, 발톱 빠짐, 베드 버그로 잘 못 드는 밤이 있는 곳. 어제의 밤 못 드는 불편함에 내가 왜 이 고생을 사서 하지 하면서도 아침이 되어 길을 걸으며 다시 행복해지는 길. 그리곤 오후에는 마치 어제 일을 잊은 듯 다시 알베르게로 들어가게 되는 길.

 

레온의 관광객으로 들어찬 구도심의 아름다운 성당, 바, 거리를 빠져나오면 신데렐라의 마차를 타고 건너온 것처럼 진짜 생활이 눈앞에 펼쳐진다. 바쁜 출근길을 재촉하는 사람들, 수많은 차, 구도심과 같이 멋스럽지 않은 평범한 사각 박스 모양의 집, 학교 가는 아이, 쓰레기, 알 수 없는 낙서 스프레이가 가득한 벽. 도시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진짜 삶이 가득하다. 공단 옆을 지나고 차가 쌩쌩 다니는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시골길을 걸을 때처럼  평온함은 없고 공기는 따갑고 사람은 차갑고 소리는 부산스럽다. 커피와 케이크로 당 충전도 해보지만 이 길은 적응이 안 된다.

옵션 길이 있었는데 빠른 길로 간다고 짧은 길을 골랐는데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시끄러운 도로 이다. 이런 길은 빨리 지나가는 게 상책, 이어폰 음량을 최대로 높이고 파워붐붐한 운동할 때 듣는 음악을 켜고 전 속력을 내어 걸어본다. 작은 마을과 도로 길을 지나 오늘은 꽤 먼 길을 걷는다. 늦은 오후에는 다들 걷기를 마치고 들어갔는지 사람도 없어 더 힘이 든다.  


지루했던 길 끝으로 보상이라도 하듯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중세 돌다리로 유명하다는 오비고 다리가 멋진 자태를 보인다. 중세의 마을로 들어가는 기분으로 긴 다리를 건너 키 크고 인상 좋은 아저씨가 나를 맞이하는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오늘 어땠어?"

"아주 피곤했고 힘들었어."


아저씨는 나의 피곤함을 이해한다는 듯, 두 명만 사용하는 방을 배정해 준다. 지쳐서 도착했는데 아기자기한 정원과 깔끔한 알베르게, 두 명만 사용하는 방에(결국 그 방에 다른 사람은 배정하지 않아 독실을 사용하게 되었다!) 제로썸 원칙이 떠오른다. 샤워하고 빨래를 널고 정원에 앉아 있으니 이리 또 행복한 걸 보니 행복이 별게 아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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