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길에서 시끄러운 소음으로 고생했던 어제를 기억하며 오늘은 두 가지 갈래길 중에 흙길을 선택한다. 조금 걷다가 발견한 바에 들어가 아침을 시킨다.
"알로! 카페콘라체, 에, 토스타다"
한국보다 적은 양의 카페라테와 토스트 빵을 시키고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는다.
진한 에스프레소에 고소한 우유를 섞어주는 카페콘라체와 딱딱한 시골 빵을 무심한듯 쓱 썰어 버터를 발라 토스트한 빵은 적당한 포만감과 따뜻함으로 아침을 기분 좋게 열어주는 즐거움 중의 하나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아침 출근길에 모바일앱으로 주문해 픽업해 가던 24oz의 대용량 사이즈와는 진하기와 고소함이 다르다. 그래도 이 쪼그마한 컵에 담긴 카 페콘 라체를 아껴먹고 있으면,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느낌의 대용량 커피가 그립기는 하다.
넉넉한 인상을 가진 아저씨가 손바닥만 한 토스타다와 카페콘라체를 가져다준다. 방금해 따뜻하면서 두툼한 빵은 공장의 츤데레 부장님을 닮았다. 툭툭대며 말하지만 거짓부랭이 없고 뒷통수치지 않고 무심한 듯 도와주고 무슨 일 있으면 걱정해주고 안 보이면 안부 묻던 부장님이 문득 그립다.
두툼한 빵에 버터와 잼을 듬뿍 발라 먹고 있으니 아침부터 마구마구 행복하다.
언덕길을 가는 데 언덕 위 작은 집에서 평화로운 음악이 흘러나온다. 딱 한량 같아 보이는 주인과 길바닥에 누워있는 개 한 마리는 전 딱 이 정도면 돼요라고 얘기하는 듯하다.
아기자기한 흙길과 과수원, 숲을 지나 오르막길 끝에 돌 십자가가 나오고 그 아래로 이름도 예쁜 아스트로가의 풍경이 내려다 보인다. 돌 십자가 아래 벤치에 앉아 한숨 돌리며 보니 출발할 때는 안 보이던 빨간 나뭇잎이 보인다. 이곳에도 가을이 내려앉고 있다.
물이 주는 기쁨
언덕 아래 물 마시는 순례자의 조각상은 뜨거운 길 위에서 마시는 한 모금 물의 즐거움이 느껴진다. 아주 리얼한데 저게 물병이 아닌 술병이라면 병원 가야한다.
우연한 행운, 점심
아스트로가의 마요르 광장에서 점심 식사를 위해 야외 테이블이 있는 식당에 앉는다. 주말을 맞아 광장은 현지인들로 가득 차 생기가 넘친다. 어제도 만났을 듯한 두 명의 멋쟁이 할머니는 와인 2잔을 앞에 두고 무언가를 끊임없이 떠들어낸다. 그 옆을 지나던 할아버지는 아는 사람인지 쪽쪽 양볼 인사를 하고는 지나친다. 이제는 분명 이 할아버지에 대해 떠들고 있을 거라 상상한다. 노부부, 젊은 부부, 아이가 모인 삼 대 가족도 보인다. 아이는 뭐라 뭐라 떠들고 노부부는 무한 사랑이 담긴 눈빛으로 젊은 부부는 걱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본다. 만국 공통 표정이다.
평화로운 주말 오후 소도시의 여유를 만끽하며 주문하려 보니, 이곳은 아메리칸 캐주얼 식당이다. 스페인에서 아메리칸이라니 다른 곳으로 갈까 하다 광장의 햇살 좋은 곳의 테이블이 좋아 그냥 치즈버거를 주문했다. 앗, 너무 작다! 정말 이게 5유로라고 이런 사기꾼.
아껴먹고 있는데 진짜 치즈버거가 나온다. 내가 쪼잔했다. 아까 그건 서비스였다. 이곳에도 서비스가 있다니 그건 생각 못했다.
버거인데 빵이 바게트이다. 많이 걸어 배가 고프기도 했고, 광장의 따스한 햇살, 토요일의 생기가 맛을 더하기도 했지만, 바게트 버거는 아주 환상적으로 맛있었다. 고기 패티는 두툼했고, 야채는 신선했고, 치즈는 적당히 고소했고, 그 위아래는 덮고 있는 바게트 빵은 버거는 미국에서 왔을지 몰라도 여기는 유럽이야라며 소리치는 듯했다. 그간 길에서 먹었던 수많은 점심 중에 최고의 점심이다. 아침에 이어 점심까지 오늘은 음식운이 아주 좋은 하루다.
머리 굴리며 이리저리 잔재주 부리고 계산하고 계획하던 일상에서 아침에 눈뜨면 걷고 보고 먹는 것이 전부인 일상이 되니 잘 걷고 잘 먹고 좋은 것을 보는 것 중에 하나라도 성공하면 기분이 좋다. 행복이 뭐 별거 있나, 오늘도 맛있게 먹고 잘 걷었으면 된 거지, 오늘은 이미 성공이다!
기분 좋은 점심을 먹고 일어나니 광장 중앙에 있는 시청 건물에서 두 개의 인형이 종을 친다.동화 같은 종소리에 또다시 행복지수가 올라간다.
자신 없는 것은 본질이 아닌 것으로 승부한다.
이 도시에는 스페인의 그 유명한 건축가 가우디가 초기 설계했다는 아스트로가 주교관이 있다. 상세히 찾아보니 초기 설계는 가우디가 하였지만 교구와의 갈등으로 초기 단계에서 공사를 포기했고, 대부분을 현지 건축가가 진행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건물이 언뜻 가우디를 연상케 하기는 했으나 바르셀로나 가우디의 건축물을 보았을 때 느꼈던 천재적인 느낌과 압도감은 없다. 그래도 가우디 광장, 가우디 주교관이라는 이름을 앞세운다.
주교관 옆의 산타마리아 성당은 5유로의 관람료를 받고 오디오 가이드를 제공한다. 1번부터 순서에 따라 번호를 누르며 성당을 관람하는 데, 설명은 거창한데 별 게 없다는 느낌이다. 5번 정도부터는 아예 설명을 듣지 않게 된다. 한 바퀴 도니26번도 보인다. 질보다 양으로 승부하는 모양. 굳이 입장료를 내고 들어올 필요 없이 외관만 보아도 될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