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되자 비는 그쳤고 음울한 기운이 도는 몰리나세카를 빠져나온다. 조금 걸어서 도착한 폼페라다에서 아침을 먹기 위해 카페에 들어갔다. 작은 마을에서 순례자가 대부분인 알베르게나 바에서 아침을 먹다가 북유럽 감성의 깔끔한 카페에 들어가니 왠지 어색하고 정 없는 느낌이다. 카페콘라체를 시키니 라테아트가 된 카페콘라체가 나온다. 시골의 바에서는 이런 기교는 부릴 여유도 부릴 생각도 없다. 토스타다의 빵도 얇은 식빵, 이게 아니잖아, 난 투박하고 두껍고 버터가 발라져 있는 시골 빵이 먹고 싶다고!
아침을 먹고 보니 이 카페는 템플 기사단 성 바로 앞에 있다. 12세기에 지어졌다는 이 성은 수도기사단의 수사들이 세운 곳으로,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중세 기사들이 말을 타고 내려올 이 곳의 외벽은 크고 견고해 보이며 늠름하다. 흐린 날씨에 황톳빛과 잿빛이 섞인 성벽 안에는 대단한 비밀이 숨어있을 듯하다.
폼페라다의 구도심을 벗어나 신도시를 빠져 나와 몇 개의 마을을 지나 흙길, 포도밭 사이의 언덕을 걷는다.
이곳에서의 나의 옷차림은 하루의 시간을 알 수 있게 한다. 출발 전에 보았던 손미나 유튜브에서 산티아고에는 하루에 모든 계절이 있다고 했는데 완벽하게 실감 중이다. 아침에 출발할 때는 쌀쌀한 아침 공기에 바람막이 점퍼 위에 걸친 기모 티셔츠까지 걸치고 겨울 모드로 길을 나선다. 아침을 먹고 나면 기모 티셔츠가 벗겨지고, 점심 전 구간에서 주스를 마시고 나면 바람막이 점퍼, 점심을 먹고 나면 얇은 긴팔 후드티까지 벗게 된다. 점심 이후는 계속 반팔 티셔츠 차림이다. 햇살이 너무도 따가워 한국에서는 아줌마의 상징이라 여겨져 잘하지 않던 팔토시까지 장착하면 오늘의 허물 벗기는 끝이 난다.
반팔 티셔츠는 목적지의 반 이상을 걸어왔다는 걸 의미한다. 반팔 티셔츠 모드로 진작 변경되었는데 길은 가도 가도 끝나지 않는다. 부지런히 걷는다고 걷고 있는데 느린 발걸음에 어느샌가 또 앞뒤로 사람이 없다. 햇살은 더욱 찬란해지고 넓은 들판과 말라비틀어진 듯한 작은 포도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언덕길에는 그늘조차 없지만, 파란 하늘에 선명한 구름은 참 멋지다.
이쯤하면 고만하지 라는 생각이 드는 언덕과 산길이 미워질 때쯤 빌라프랑카에 도착했다. 이곳은 스페인 하숙을 촬영한 곳이다. 스페인 하숙을 괜히 이곳에서 촬영한 게 아닐 만큼 이 마을은 작지만 크고 아름답다. 내가 선택한 알베르게는 모던한 외관으로 교외의 좋은 커피숍을 찾은 것 같다. 그리고 일층 침대로만 되어 있어 이층 침대에서 움직이며 내는 소리와 작은 움직임에도 같이 느껴지는 진동에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늦게 도착한 내가 오늘 이용자의 마지막인 듯 한데 열 개의 침대가 있고 나까지 세명이다.
처음 출발할 때는 많은 사람들로 알베르게가 가득 찬 곳이 대부분이었는데, 순례자 사무실에서 나누어 준 가이드 루트에서 시간이 갈수록 각자 몸 상태와 스케줄에 맞게 걷는 구간이 달라지다 보니 초반만큼 사람이 많지 않다. 특히 가이드 루트에서 벗어난 곳에 머무를 때는 한산한 알베르게가 많다. 사람이 너무 북적이는 게 싫을 때는 일부러 정식 루트를 벗어나 숙박을 하는 것도 요령이다.
간단하게 정리를 하고 광장에 나가보니 노란 가로등 불에 비친 모습을 평화롭고도 아름답다. 고즈넉한 밤,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