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열심히 걷다 보니 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걷는 그녀와 자주 마주치다가 같이 걷는다. 아일랜드에서 헬스케어 업에 종사한다는 그녀는 산티아고 길을 매 년 휴가 때 열흘씩 나누어 네 번에 거쳐 걷을 계획이라 했다. 비가 많고 햇빛이 귀한 아일랜드에 사는 그녀는 이번이 세 번째로 마지막 한 코스는 일부러 남겨놓는다 한다. 숙제처럼 걷는다면 완주할 수 있건만 일부러 마지막 길을 남겨놓고 기대를 남겨 놓는 것이다.
"맞아, 우린 너무 숙제처럼 걷고 있어. 몇 킬로 걸었고 몇 킬로 남았고, 중요한 건 그게 아닌데"
뜨거운 햇살 아래 메세타 길을 걸을 때였다.
"중요한 건 과정이야. 빠른 속도로 빨리 결승점에 가는 게 길의 목적이 아니잖아, 이 길도 인생도. 빨리 가면 놓치는 게 많아져. 천천히 아름다움을, 사람을 즐기면서 이 길을 걷자. 아름다운 풍경, 좋은 사람, 음식에 행복해지는 하루하루를 즐기고 만끽하고 아파하고 눈물도 흘리며 이 과정을 즐기라고.
오늘 아프면 내일은 괜찮고 오늘 멋진 풍경이 있으면 맛없는 음식이 기다려도 괜찮고, 멋진 풍경도 없고 음식도 별로였으면 알베르게의 행운이 기다리고 있고, 계속 나쁜 것도, 계속 좋은 것도 없어. 결국 중요한 건 길 위에 있는 과정을 오롯이 받아들이며 즐길 줄 아는 여유를 갖는 것, 현상 자체는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으며, 현상을 해석하는 나의 생각, 태도가 중요한 거지. 그게 모여 길 자체가 되고."
흔한 말이지만 남의 말, 책에서의 말이 아니라 나의 문장이 되어 내 마음에 쿵하고 들어왔다. 이거였구나, 마이 카미노는. 이 얘기를 내뱉기 위해 이 길이 나를 부른 것이었구나.
경쟁에 익숙했고, 남의 평가가 중요했고, 칭찬에 목말라했던 직장인 나는 빠른 속도에 익숙해져 있었고 남들보다 느리다 생각하면 긴장했고 재촉했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곳이 어딘 지도 모른 채 그냥 옆에서 달리는 말보다 빨리 달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결승점에 빨리 도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달리고 있었다. 이 길이 나를 부른 이유는 회사라는 경기장은 벗어났지만 아직도 어디론가든 달려야 한다는 의식이 나를 휘감고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었다.
메세타에서의 그날은 아주 특별한 순간이었고, 그날 이후로 나는 몇 킬로 남았다는 표지판을 찍는 횟수가 현저히 줄었다.
그녀와의 만남은 이 길의 완주에 대한 개념을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완주는 무엇일까, 끝까지 가는 것? 나를 만나는 것? 이 길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 질문은 나의 화두가 되어 며칠을 같이 하게 되었다.
오세브레이로까지 가는 길은 오르막길로 되어 있다. 그녀와 오르막이 시작되기 전 마을의 멋진 풍경을 가진 곳에서 파스타와 함께 하는 근사한 점심을 먹고 오르막길을 시작한다. 평지는 그녀가 나보다 훨씬 잘 걸었는데 오르막길은 내가 더 잘 걷는다. 경쟁은 아니지만 그래도 잘 걷는 구간이 있다는 것에 뿌듯해진다. 숙제가 아닌 데 나는 또 막 잘하려고 하는 게다, 자 심호흡! 하지만, 그간 이 길에서 남들보다 앞 선 적이 없다고! 그러니 들뜰만하다.
언덕길을 오르다 거의 마지막 구간에 있는 알베르게 바에서 오렌지주스를 마시기 위해 잠시 쉰다. 커다란 드럼통이 테이블인 야외 자리에 나와 그녀, 그 옆에 이탈리아에서 온 그녀, 이렇게 셋이서 한 드럼통씩을 꿰차고 앉아 쉬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온 그녀는 오세브리오에 숙소를 구하지 못해 이곳에 오늘은 머문 다한다. 나도 오세브리오에 숙소가 없어 리나레까지 더 가기로 했다고 하니 오르막 구간에 지쳐 자기는 더 이상 못 갈 것 같은데 내게 대단하다고 한다. 오늘 계 탄 날인지 잘 걷고 대단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또 또 비교 금지, 남의 평가에 휘둘리는 것 금지!
오세브레이로에서 하루 걸음을 같이 한 아일랜드 그녀와 헤어지고 1시간을 더 걸어 리나레의 유일한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어제와 같이 깔끔하고 작은 규모이다.
시간이 가고 길에 익숙해지면서 순례자들은 각자 성향에 맞는 알베르게를 고른다. 많은 사람과 모여 함께 하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은 대형 규모의 알베르게를 찾게 되고, 조용한 시간을 선호하는 사람은 작은 규모의 알베르게를 찾게 된다. 나는 조용하고 작은 규모를 선호하여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주로 작은 곳을 고른다. 리나레에는 알베르게가 한 곳이기에 선택의 여지는 없었지만 소떼가 넓은 산을 집으로 삼아 풀 뜯어먹는 풍경과 소 목에 달린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리는 이곳이 마음에 든다.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숙소에서 종종 자주 마주치는 사람들이 생긴다.
샤워와 빨래를 하고 공용 주방에서 쉬고 있는데 몇 번 길에서 만난 적이 있는 어린아이가 있는 부부가 보인다. 이십대로 보이는 그녀가 먼저 말을 건다.
"우리 몇 번 길에서 본 적 있지. 어느 나라에서 왔어?"
"한국. 너는?"
"뉴질랜드"
"어린아이가 둘이나 있던데 어떻게 여기에는 왔어?"
"우리 시부모님이 여길 와보고 싶어 하셨어. 그래서 우리가 함께 하기로 했지"
"정말! 괜찮아?"
"천천히 가고 있어서 할만해."
대단하다. 갓난쟁이에 가까운 어버버버하는 어린아이 둘과 시부모와 함께 이 길을 걷다니! 극한 도전에 가까울 듯한데 선한 얼굴로 미소 짓는 그녀가 존경스러울 뿐이다.
장난기가 가득하고 해맑아 보였던 귀여운 이 집 아이는 갓난쟁이와 함께 밤새 번갈아가며 울며 평화로운 알베르게에 복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