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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테리어브라더스 Oct 17. 2019

키예프와 서울


어떤 이들은 방랑벽(wanderlust)이 핏속에 있다고 한다. 방랑벽은 정한 곳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기 좋아하는 버릇이라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돌아다니다라는 의미의 원더(Wander)와 깊은 욕망을 의미하는 러스트(Lust)가 합쳐진 영어 단어가 전하는 뉘앙스가 마음에 와닿는다. 여행지를 정하고 홀로 특별한 목적 없이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마주하는 익숙한 풍경과 낯선 풍경을 감상하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습관이었다.


뉴질랜드, 호주로 떠났던 배낭여행은 눈에 담기 어려워 현기증이 나는 듯한 자연풍경을 접하게 해주었고 학업으로 영국에 머무는 동안에는 유럽 여러 도시를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한국에서 디자인 스튜디오를 시작한 후로는 제법 빠른 비즈니스 사이클로 인해서 업무차 가게 된 일본과 미국으로 대신하곤 했다. 여행 도중 남겼던 기록과 경험은 자연스럽게 다양한 공간 디자인 프로젝트의 자양분이 되기도 하고, 도전을 던져 주기도 했다. 


상업공간 프로젝트는 공간의 목적, 위치, 사용자를 비롯한 여러 조건을 고려해서 구조를 결정하고 재료를 선정하여 특정 분위기를 전달하는 유형의 것이 된다. 이러한 접근법을 ‘줌 아웃’해서 도시를 바라보면 도시가 커다란 하나의 프로젝트가 된다. 마찬가지로 각 도시도 때로는 주어진 환경에 맞추어, 때로는 조건에 반하여 공간을 형성하고 그곳에 머물던 사람들이 남긴 흔적이 축적되어 문화를 이룬다. 


여행 중 나를 설레게 하는 공간에서 이 공간을 작업한 이들은 어떻게 접근하고 고민했을지 상상해본다. 이미 작고한 이들의 프로젝트는 그들이 남긴 책과 영화를 통해 가늠하고, 동시대 작업하는 디자이너는 이런 호기심을 통해 친구가 되기도 했다. 


1950~70년대 초반까지 융성한 브루탈리즘 양식은 콘크리트가 노출되어 요새처럼 보이는 건축물이 많다


작년 이맘때 우연히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몰도바, 불가리아에 해당하는 동유럽 사회주의 시기의 유산을 보존, 보호하기 위해서 학술적인 아카이브를 만들고 있는 B.A.C.U.의 건축 사진집을 보게 되었다. 이런 원더러스트(Wanderlust)의 성향이 좋은 핑곗거리가 되어 동유럽 도시를 방문했고 우크라이나 키예프의 공간과 스타일을 공유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현재 키예프의 매력은 소련의 해체가 가져온 정치·경제적 변화에서 비롯된다. 해체 직후 우크라이나는 자본주의 부동산 경제모델을 장려했고 대형 쇼핑센터, 아파트 복합단지 형태의 건물이 세워졌다. 높지 않은 인구밀도와 비용의 이유로 굳이 옛 건물을 허물 필요가 없어서 CCCP(옛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지배 아래 세워진 브루탈리즘(Brutalism) 건축물은 구소련의 잔재를 보여주는 버려진 건물이 되었다. 


현대적인 건축 양식으로 디자인한 대형복합쇼핑몰 오션플라자


UFO 비행접시를 닮아 소서(Saucer)라는 별명을 가진 우크라이나 과학기술부 건물은 현재 관리가 되지 않고 텅 비어있지만, 유리와 LED 조명으로 현대적인 디자인을 보이는 대형복합쇼핑몰 오션플라자와 나란히 붙어 있다. 마찬가지로 브루탈리즘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키예프 전쟁기념박물관, 호텔 살루트, 우크라이나 과학기술부, 키예프 화장터는 자본화 과정을 거치며 메트로폴리탄적인 도시로 변화 중인 키예프의 심장부에 묘한 이질감을 주면서 섞여 있다. 


졸로티 보로타(Zoloti Vorota)와 우니버시텟(Universytet) 지역은 비교적 젊은 감각을 가진 디자인 스튜디오의 프로젝트와 키예프의 상업공간 디자인 트렌드를 보는 데 좋다. 벽돌과 아치 형태의 구시가지 건물에 젊은 세대가 찾아오는 바, 레스토랑, 카페나 영화관이 생기면서 여기에 맞는 공간디자인이 나왔다.


건축을 통한 소련 정권의 프로파간다가 짙게 남아있는 도시이기 때문에 카페, 레스토랑 인테리어가 여느 서유럽 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되려 인상적이었다. 내부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굳이 키예프적인 이미지로 구분할 수 없다. 문화적으로 고립된 이전 세대와 다르게 키예프의 젊은 디자인 스튜디오는 시기적으로 소련 해체 이후 자유와 인터넷의 발달로 서구문화를 소비하며 성장했다. 


벽돌 마감과 아치형 디자인의 구 시가지 건물


이 점을 잘 보여주는 디자인 스튜디오가 AKZ architectura(https://akz-architectura.com/)이다. 이들은 카페, 레스토랑, 의류매장 등 상업공간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유럽의 디자인 트렌드 전반에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굳이 키예프적인 이미지에 제한받지 않는다. 


도시로서 서울에 피로감을 느끼던 시기였기 때문에 서울을 떠나 여행을 하고 싶었는데, 막상 여행을 하니 다니는 곳마다 서울을 연상하는 나를 보게 되었다. 구소련의 잔재와 서유럽의 경제문화가 뒤엉키면서 생긴 새로운 키예프는 오히려 서울을 떠올리게 했다. 서울 역시 디자인을 비롯한 모든 지점에서 고속성장의 대가를 내기 시작하고 있다. 흔히 외국인이 기억하는 서울은 옛것과 새것의 조화, 고궁과 현대적 건물이 어우러진 모습이다. 


어느 도시를 가도 비슷한 이미지의 거리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서울에 살아가는 우리가 인지하는 이미지와 체감하는 변화, 속도는 전혀 다르다. 보급형 한옥이 많았던 서촌의 공간을 개조하여 만든 레스토랑, 소위 메가트렌드에 강박적인 집착으로 디자인 요소만 나열된 카페, 브랜딩 경험을 우선하여 어느 도시를 가도 똑같은 플래그십스토어가 한 데 섞여 있다. 사실 누군가 나에게 서울을 묻는다면 이러한 혼합 그 자체라 말하고 싶다. 즉 서울은 특정 이미지를 가진 도시라기보다는 현상에 가깝다. 


그간 공간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그러한 변화는 이러 이러 해야 한다’는 당위가 마음에 생겼던 모양이다. 예 것과 새 것이 섞여 조화로운 공간과 기형적인 공간으로 동시에 변화하고 있는 키예프에 있던 시간은 서울을 다시 호기심을 가지고 하나의 현상으로 바라보게 해주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글 | 이우남 대표(마이네임이즈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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