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센토 Sep 23. 2020

너와 나 사이

@ 통영


내 생의 첫번째 기억은 이사를 하는 날이다. 햇살이 비친다. 이삿짐을 가득 실은 파란 트럭이 달린다. 나는 차의 앞 좌석, 아버지의 무릎 위에 앉아 있다. 넓은 차칭으로 햇살이 뽀얗게 번져 들어온다. 엉덩이는 따뜻하고, 가슴은 왠지 모를 흥분에 콩닥거린다. 


늘 바라보던 앞바다를 건너, 섬과 육지를 잇는 다리 위를 지나는 짧은 순간, 햇살에 부딪혀 반짝이는 바다가 눈부시다. 눈을 가늘게 뜨면 작은 얼굴을 비추는 희부윰한 햇살이 출렁이는 물결처럼 얼굴을 간지럽힌다. 지금의  난, 어딘가 새로운 곳으로 가고 있다. 




기억이란 게 서툰 초고의 글귀처럼 끊임없이 수정되고 각색되는 것이겠지만,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첫번째 기억은 차창으로 비치는 햇살을 받으며 다리를 건너가는 것이다. 아마도 이사하는 날의 설렘과 햇살의 따스함이 인상에 남았으리라.


새로 이사를 온 언덕 위의 집 옆엔 작은 공터가 있었다. 바다가 보이는 풀밭에서 천방지축으로 툭툭 튀어 오르는 메뚜기와 맵시 좋게 쭉 빠진 방아깨비를 잡곤 했다. 입 안에 넣으면 작은 알갱이들이 톡톡 터지는 새까만 까마중 열매를 따먹기도, 연두빛 유채꽃 줄기를 벗겨 먹고, 뒤뚱뒤뚱거리는 오리의 뒤를 따르고, 퐁퐁 흐르는 작은 웅덩이에서 올챙이를 잡으며 놀기도 했다. 


노란 유채꽃 핀 언덕 위에서는 늘 강처럼 흐르는 파란 바다가 보였고, 육지와 건너편 섬 사이에는 다리가 놓여 있었다. 가끔 커다란 배들이 뿡, 하는 거대한 뱃고동 소리와 함께 온 동네를 뒤흔들며 지나갔고, 다리 너머에는 작은 섬 하나와 초록색과 빨간색 등대가 두 개의 점처럼 떠 있었다. 


빨간 지붕집엔 작은 창문이 있는 다락방이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가방을 던져 놓고 엄마가 씻어 준 포도를 들고 다락방을 올랐다. 삼각형 지붕의 다락방에서 작은 창으로 바다를 보면서 포도를 먹다가, 지루해지면 배를 깔고 엎드려 책을 읽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다 깜빡 잠이 들었을 때였을까. 잠결에 얼핏 ‘내가 먹은 포도 씨앗들이 뱃 속에서 자라나면 어떡하지?’하는 쓸데없는 걱정도 했던 듯 하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니 어쩌면 나는 아직 창 밖으로 세상을 보던 그 때에서 크게 변함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인간 관계는 서툴기 짝이 없고, 혼자 있는 게 마음 편하다. 세월의 때가 묻어 약간은 둥글어졌을터이나 모나고 예민한 성격도 변함없다. 다락방의 그 아이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어쩌면 나는 여태 마음 속의 그 풍경을 찾아 다닌 건지도 모른다. 처음 다리를 지나던 그 순간처럼, 너와 나 사이에 놓여진 다리 같은 것을 찾아 아직도 헤매는 중이다.



작가의 이전글 서문序文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