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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센토 Nov 22. 2021

새로운 눈

@ Olympic Park


어린 물고기 두 마리가 물 속에서 헤엄치고 있다. 그러다 맞은편에서 헤엄쳐 오는 나이 든 물고기 한 마리와 마주친다. 그는 어린 물고기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넨다. “안녕, 얘들아? 물은 어떠니?(How’s water?)” 


어린 물고기 두 마리는 잠깐 동안 헤엄치다, 한 마리가 다른 물고기를 바라보며 말한다. “대체 물이 뭐야?(What the hell is water?)” *




두서없이 시작해본다. 어디로 향하리라는 방향도 없이, 정해놓은 결론도 없이. 어디서 시작하면 좋을까. 지난 글에서 인용했던 문장 중 "새로운 눈(New eyes)"이란 표현에서 시작해 보면 어떨까. 


새로운 눈이란 무엇일까? 눈의 역할은 보는 것이니 아마도 새롭게 본다는 뜻일게다. 새롭게 본다는 건 이전과는 다르게 본다는 말이리라. 우리는 말을 배우기 시작한 순간부터 우리가 본 것들에 이름을 붙여 간다.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 것들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모호한 것들은 하나의 의미로 포착된다. 


이렇게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를 '라벨 붙이기'라고 해보자. 우리는 주변의 어떤 것들에 라벨을 붙이게 되면 너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주변의 다른 것과 분리된다. 그렇게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라벨을 붙이면서, 사물에 경계를 지으면서, 서로 다른 것을 구분(사리분별)하고 정의내리면서 우리는 세상을 배우고 어른이 되어간다.


아마도 아이들이 어른보다 창의적인 듯 보이는 이유는 사리분별이 잘 안되거나 기본적인 배경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일 게다. 아직 경험이 부족하고, 미리 붙여놓은 라벨이 부족하니 그 듬성듬성한 틈새에서 아직 이름을 가지지 못한 것들이 새롭게 발견되고, 연결되고, 또 다른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러니 아이들은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세상 모든 것이 새로운 발견이고 새로운 풍경이리라. 굳이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날 필요도 없이. 그러니 발견의 출발점은 우리 눈에 들어오는 것에 이름을 붙이는 당연한 습관을 잠시 멈추는 것일지 모른다. 


지금 창 밖에는 키 큰 나무가 서있고 4차선 도로 건너편에는 높은 빌딩이 불을 밝히고 있다. 초저녁에는 초승달이 예쁘게 떠있었으나 지금은 시야를 벗어나 보이지 않는다. 도로 위에선 차들이 양방향으로 달리고 있는 여느 때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저녁 풍경이다. 


창 밖을 보는 이 과정을 다시  한번 복기해보자. 우선 멈춰 있는 풍경 - 나무와 도로 - 을 배경으로 움직이는 것들 - 사람과 자동차 - 을 보다가 무언가 새로운 것 - 가령 초승달 같은 것을 찾다가 '여느 때와 크게 다를 것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흥미가 사라지는 패턴이다. 


지극히 평범한 창 밖 풍경을 새로운 눈으로 보는 방법은 무엇일까. 일단 모든 것의 이름을 제거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나무는 더이상 나무가 아니고, 빌딩은 더 이상 빌딩이 아니라면, 움직이는 차와 사람과 자전거와 산책나온 개가 더 이상 원래의 이름이 아니라면 창 밖의 풍경은 거대하고 모호하고 기괴한 얼룩과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으로 변모한다. 우리의 의식은 필사적으로 어떤 패턴을 찾아내기 위해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린다. 


이처럼 '새로운 눈'은 내가 당연하게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의 이름을 제거함으로써 눈으로 들어온 이미지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과 판단을 멈추는 것에서 시작된다. 눈으로 들어온 것과 내가 아는 것 사이의 간격을 최대한 넓힐 때 그 속에 비로소 어떤 사 - 이의 풍경이 펼쳐지리라. 


마그리트는 우리에게 물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그럼 대체 무엇인가? 













*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이것은 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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