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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센토 Oct 12. 2024

어떤 예감

@Ueno


손을 놓쳤다. 곧 불꽃놀이가 시작될 도심의 거리는 혼잡했다. 모두가 조금이라도 불꽃놀이를 보기 좋은 자리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고, 지정된 관람 장소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차 경찰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그는 어딘가 군중 틈으로 사라졌고, 습도 높은 한 여름의 열기로 땀범벅이 되어 셔츠는 흥건히 젖었다.  저 멀리서 두둥, 하는 폭음과 함께 낮은 저녁 하늘 위로 작은 불꽃 하나가 피어 올랐다. 한여름밤의 꿈처럼, 가을의 예감인 듯 불꽃놀이는 시작되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밀물처럼 인파에게 끝없이 떠밀려가느라, 밤하늘을 끊임없이 수놓는 불꽃은 나무와 구조물들에 가려 보이다 보이지 않다 했다. 혼잡한 군중의 어깨 너머로 그를 찾느라, 가끔 사람들의 함성에 이따금씩 하늘을 올려다보느라 정신을 못차리고 있을 때 누군가 다시 내 손을 잡았다. 허탈함과 안도감이 교차하는 혼란스러운 여름 밤, 다행히 불꽃놀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시 한번, 시작하지 않으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대체 시작이란 무엇인가? 


"<설문해자>에 따르면 시始는 여지초女之初, 즉 ‘여자의 처음 상태’이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로 처음(初)를 말하는가? 처음(初)은 또 옷감과 가위가 합쳐진 글자이다. 여자가 옷감을 자르려고 가위를 대는 작업이 바로 ‘처음’의 의미이다.”*


철학자 최진석의 설명에 따르면 가위와 옷감이 만나는 순간, 갈라지는 틈이 생기는 찰나, 즉 그 교차점이 시작이다. 가령 100m 달리기 경주를 할 때, 선수들은 ‘제자리에(On your mark) - 차려(Set) - 출발(Go)’란 신호와 함께 출발하게 되는데 이 때 ’탕’이란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와 ’달리기’ 사이의 어떤 순간이 시작이다. 서로 다른 성질과 상태, 질감, 형태, 느낌을 지닌 무언가가 교차하는 순간이다.


이처럼 시작이란 어떤 완성된 형태를 지닌 단계나 구조물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길바닥의 갈라진 틈새, 시간의 엇갈림, 일상의 균열과 같이 미묘하고 사소한 것이다. 어쩌면 한여름 무더위가 한창인 8월 초저녁, 가을의 예감처럼 목덜미를 스치는 한줄기 서늘한 바람과 익숙한 세상살이에 잊혀졌으나, 제 안의 그리움을 이기지 못해 문득 터져나온 빨간 석류 알갱이 같은 욕망과 한바탕 진눈깨비가 흩뿌리기 전 잔뜩 찌푸린 하늘에 가까운 것들일 지 모른다.


허나 우리는 우리가 가닿을 수 없는 가상의 완전함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곤 한다. 멋진 책 한 권을 뚝딱 써낸다거나, 세상을 놀라게 할 영화를 제작한다거나, 혹은 꽉 막힌 변기처럼 답답한 조직을 바꾸고 싶다거나,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을 변화시킨다거나 하는 일들. 그렇게 우리는 서슬 퍼런 뱀 앞에서 얼어붙은 한 마리 개구리처럼 지레 겁을 먹고선, 시작도 하지 못한 채 진이 빠져 버린다. 게다가 이왕이면 완벽하게 하겠다는 거창한 욕심이 출발하기도 전에 발목을 붙잡는다.  


무엇보다 나의 시작을 가로막는 것은 “재능에 대한 환상”이었다. 무언가를 표현하는데 관심이 있었음에도 최선을 다해 그림을 그린 적도, 사진을 찍은 적도, 단편 영화 한편 만들어 본적도 없다. 정작 가장 하고 싶은 일들은 자꾸 뒤로만 미루고, 남이 보기에 모나지 않고, 무난해 보이는 일만 하고 있다. 좋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는데도 그 곳에 가닿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못난 마음과 비겁한 타협의 결과가 바로 어중간한 직장인의 삶을 살고 있는 지금의 나이다. 헤르만 헤세가 말했듯이 "아, 이제야 나는 안다.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로 나아가는 것만큼 이 세상에서 더 하기 싫은 일이 없다는 것을." **


좀 더 가벼운 마음을 떠나자. 시작은 어떤 예감과 함께 다가온다. 만일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순간에 대한 그리움이 없었다면, 여기저기 끄적였던 글들에 하나의 형체를 부여해보리라는 희망이 없었다면 이 노트는 만들어지지 않았으리라. 어떤 것은 그렇게 시작된다. 여기와 저기 사이의 낮은 목소리에서, 작은 조짐들***과 가슴 떨리는 어떤 예감으로부터, 어렴풋이. 그렇게 사소한 우연에서 새로운 인연으로, 그렇게.





* 최진석,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 헤르만 헤세, <데미안>


***

合抱之木(합포지목) : 아름드리나무도

生於毫末(생어호말) : 아주 작은 싹에서 나오고

九層之臺(구층지대) : 구층 높은 누각도

起於累土(기어루토) : 한 줌 흙이 쌓여 세워지며

千里之行(천리지행) : 천릿길도

始於足下(시어족하) : 한 걸음 발 밑에서 시작된다.


- 노자, <도덕경> 64장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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