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nza
1656년 7월 27일 네델란드 암스테르담의 탈무드 토라 유대인 공회당, 언약의 궤 앞에서는 다음과 같이 무시무시한 내용의 선언문이 낭독되었다.
“그들은 스피노자 본인을 파문하고 그를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쫓아내기로 결정했다. (…) 이 신성한 두루마리 앞에서, 우리는 바뤼흐 드 스피노자를 파문하고, 추방하고, 저주하고, 비난한다. (…) 여호수아가 예리코를 저주했던 그 저주로 그를 저주한다. 엘리사가 소년들을 저주했던 그 저주로 그를 저주한다. 율법책에 쓰여 있는 모든 징벌로 그를 저주한다. 그는 낮에 저주 받을 것이며, 밤에도 저주받을 것이다. 그는 누워 있을 때에도, 서 있을 때에도 저주를 받을 것이다. (…) 누구도 저자에게 호의를 베풀지 말라. 하나님께서 저자의 이름을 하늘 아래에서부터 멸하실 것이며, 율법책에 의거하여 저자에게 하늘의 모든 저주를 내려 이스라엘 민족에서 쫒아내실 것이다."
이 같은 무거운 저주와 함께 이제 23살의 청년이었던 스피노자는 유대인 공동체에서 파문당했다. 왜 그들이 그토록 극단적인 적대감과 분노를 가지고 한 청년을 추방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정작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잃게 된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담담하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오히려 잘됐다. 그들은 내가 수치를 당할까 봐 두려워서 자발적으로 할 수 없었던 것을 행하도록 내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그 길을 원하기 때문에, 내가 떠나는 것이 옛날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나왔던 것보다 더 결백할 것이라고 위로하면서, 나는 나에게 펼쳐진 그 길로 기쁘게 들어간다.”
어느 오후의 도서관이었다. 무심코 책장을 넘기다 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탄식이 흘러나왔다. '내가 이렇게 희망과 절망의 쳇바퀴를 돌고 있는 것이구나.’ 때로 진실은 단순하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그 단순한 진실을 보지 못한 채 인생을 착각하고 허비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는 무지하기 때문에 불행하고, 잘 알지 못하기에 시작하지 못한다.
때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에 들떠 보기도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건 그저 자신의 착각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곤 한다. 그리고 그 뼈 아픈 진실을 어설프게 덮어둔 채 다시금 살아간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말한다. “인간은 항상 정념(passio)에 필연적으로 예속한다. 또한 자연의 공통된 질서를 따르고 그것에 복종하며, 사물의 본성이 요구하는만큼 그것에 적응한다.” 즉 인간은 감정(정념)에 종속된 존재이다. 그 한계를 명확하게 인식할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다음 단계로 향할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을 자유롭다고 믿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그러한 의견은 단지 그들이 자신의 행동은 의식하지만 그들로 하여금 행동하게끔 결정하는 원인을 모르는 데에서 성립한다. 그러므로 그들 자신의 행동의 원인을 모른다는 것이 그들의 자유의 관념이다.” - 2부 정리35 주석 *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책이다. 그러나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자유 - 가령 자신의 의지로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과대 망상 같은 - 가 아닌 진정한 자유에 이르기 위해서는 신, 정신, 감정 등을 중심으로 우리를 예속하는 것들을 철저히 살펴보고, 이를 벗어날 수 있는 지성의 힘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거의 필연적으로 수학적이고 기하학적인 논증을 이 책의 서술 방식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들뢰즈가 말했듯이 ‘철학자들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철학을 공부하지 않은 일반인도 접근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철학자이기도 하다. 스피노자는 유대인 공동체에서 파문당한 뒤 생계 유지를 위해 렌즈를 세공했다. 불투명한 유리알을 깍아내어 환한 빛의 길을 발견하듯이 그는 명쾌한 지성으로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혼란스러운 감정을 세가지의 개념으로 벼려냈다. 그것이 바로 기쁨과 슬픔, 그리고 코나투스이다.
"모든 정서는 욕망, 기쁨 또는 슬픔에 관계된다. (…) 기쁨과 슬픔은 그것을 통해 각자가 자신의 존재에 머무르려는 능력이나 코나투스가 증대하거나 아니면 감소하고, 촉진되거나 저해되는 정념passion(수동)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존재에 머무르고자 하는 코나투스를, 그것이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하는 한, 충동과 욕망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기쁨과 슬픔은 외적 원인으로 증대되거나 감소되거나, 또는 촉진되거나 방해받는 한에서의 욕망이나 충동 자체, 즉 각자의 본성 자체이다." - 3부 정리 57 증명 **
코나투스는 본질적으로 자기 존재를 보존하고자 하는 충동 혹은 욕구를 뜻한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한다. 따라서 자신의 코나투스를 증대시킬 때 사람은 기쁨을 느끼고, 이 힘이 약화될 때 슬픔을 느낀다. 그러니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유, 즉 행복으로 가는 길은 어찌보면 아주 단순하다. 자신이 지닌 욕망과 능력을 긍정하라.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며 삶에 기쁨을 더하고, 슬픔을 주는 것은 줄여 나가라. 무엇보다 '부정의 방식'이 아닌 '긍정의 방식'으로 나아가라.
*, **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에티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