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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센토 Jun 11. 2020

스트로베리 쇼트 케이크

@바워리 키친(Bowery Kitchen)

 


“무엇으로 할까?” 아빠의 질문에 여자 아이는 메뉴판을 이리저리 돌려본다. 그러다 테이블 너머 아빠의 표정을 잠깐 살피고는 다시 메뉴판으로 시선을 돌린다.


“으-음,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도 먹고 싶고, 쵸코렛 무스도 좀 땡기고.... 아빠는 뭐가 좋아?”


“음, 뭘로 하면 좋을까?” 망설이는 듯 메뉴판을 들여다보는 아빠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는 아이는 그 순간, 잠시 아빠의 눈이 되어 버린 듯 했다.


무언가에 몰입한 아이의 표정에 이끌려 옆 테이블의 남자는 자신 앞에 놓여있던 똑딱이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실내라서 광량은 부족했고, 그 사소한 장면이 과연 사진으로 담아낼 수 있는 무엇이었는지는 그 순간에도, 이후에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대학교 1학년 커뮤니케이션 개론 시간에 섀넌과 위버(Shannon & Weaver)의 커뮤니케이션 모형을 배웠다. (당시에는 분명 흘려들었을테지만) 그 모델에 따르면 의사 소통은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진행된다. 

발신자(Sender)와 수신자(Receiver)가 서로 메세지(M)를 주고 받기 위해선 매개 수단이자 통로인 채널(Channel)이 필요하다. 발신자는 인코딩의 과정을 통해 정보를 전달하고, 수신자는 해석(디코딩)을 통해 정보를 수신한다. 이러한 일련의 커뮤니케이션 과정과 외부 잡음(noise)의 강도 정도에 따라 정확한 메시지의 전달 여부는 결정된다.  


이는 이후 수많은 커뮤니케이션 연구의 모태가 된 단순 명쾌한 모델이지만,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일종의 통로가 있는 듯한 오해을 불러 일으키는 도식이기도 하다. 우리는 삶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된다. 명확한 이론과는 달리, 일상의 커뮤니케이션은 늘상 오해되기 마련이다. 


칠레의 생물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에 따르면 “생명이란 ‘구조적으로 결정화’된 체계이다. 때문에 외부와 직접적으로 소통할 방법은 원칙적으로 없다.” 그의 말을 부연하자면 기본적으로 모든 생명체는 직접적인 상호작용이 불가능한 닫힌 상자와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또한 생명이 살아있기 위해서는 외부와 상호작용하고 끊임없이 구조 접속해야 한다. 이처럼 모든 생명은 하나의 세포가 그러하듯 자기 완결적으로 닫혀 있어야 존재할 수 있지만, 동시에 숨쉬고, 먹고, 배설하는 것처럼 외부와 접속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 


생명이란 이처럼 구조적으로 닫혀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열려 있는 신비한 모순의 존재이다. 산다는 것 자체가 이러한 모순을 견딘 결과이며, 타인과 환경에 대한 끊임없는 구조접속과 상호작용은 각자에게 자신만의 독특한 주름을 형성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처럼 서로 같은 듯 다르지만, (변화하기 위해선 생명체로서의 내적 일관성과 환경의 외적 요청에 동시에 응해야 하기에) 쉽게 변하지 않는, 어쩔 수 없이 나일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여기에 ‘현실의 내’가 있다. 저기에 ‘꿈꾸는 네’가 있다. 여기와 저기 사이의 막막한 간격을 건널 수 있는 방법은 서로 오해를 주고 받는 것, 끊임없이 시도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는, 얼핏 무모하게 보이는 시행착오 뿐일지 모른다. 너와 나 사이를 잇는 정해진 길은 없다. 다만 서로 주고 받는 과정이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드러나듯 길을 만들어 나갈 뿐이다. 


“우리에게 깊은 성취감을 가져다주는 ‘대화’라는 것은 ‘말하고 싶은 것’과 ‘듣고 싶은 것’이 먼저 있어 그것이 두 사람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말이 왔다갔다하고 나서야 비로소 두 사람이 ‘말하고 싶었던 것’과 ‘듣고 싶었던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


우리는 과연 소통할 수 있을까? 


여기에 내가 생각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그러니 이를 다른 이에게 정확히 설명할 방법 또한 없다. 남은 소통의 가능성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것에 나름의 형태를 부여해 나가는 것이다. 이 과정(이처럼 요령부득要領不得인 글을 쓰는 것과 같은)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을 보다 더 이해하게 되고, 이것이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의 통로가 된다.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나는 보다 나에 가까운 내가 되어간다.


다시 움베르토 마투라나는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감으로써 살아가는 세상을 내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바로 그것을 해야합니다.” **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 자신의 세계를 만들고 당신에게 보여주는 것, 오직 그 뿐이다. 




* 우치다 타츠루, <스승은 있다>


** 움베르토 마투라나, <있음에서 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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