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인채 May 03. 2019

‘숱’ 사자를 만났다

아름다운 뒤통수

일본 오사카 신세카이


어느 날 '숱' 사자를 만났습니다.


깊은 밤, 도심 속 정글을 당황하며 더듬다가 고개를 드니 바로 코앞에 후드를 쓴 채 두 눈 부릅뜨고 서있는 것입니다. 그런 그는 킁킁 냄새를 맡으며 능청스럽게 다가와 말합니다. 

넌 숱이 좀 없구나.

겁을 집어먹고 뒷걸음치던 전 변명하죠. 

원래 그런 건 아니라고, 풍성했던 시절도 있다고, 활짝 피어난 봉우리도 결국 오므리게 되는 법이라고, 무섭지 않다고, 난 괜찮다고(?)…


필요 이상으로 주절거리자 씩 이빨을 드러낸 그는 오히려 반색하며 말합니다. 

아냐 괜찮아 숱이 많아도 여간 귀찮은 게 아니야. 털 많으면 이빨에 끼고 맛도 없거든.

그래 넌 많다는 거지 싶은데, 그는 풍성한 머리털 속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건넵니다. 

자, 전동 이발기야. 넌 ‘아저씨’가 아니지만… 이왕이면 먹기 좋게 싹 밀어.

생애 첫 전동 이발기를 숱 많은 사자에게 받을 줄은 몰랐습니다. 잊고 있었지만 어릴 적엔 위잉 거리는 게 하나 가지고 싶었습니다. 정작 그땐 쓸 일 없던 물건이지만. 


숱 많은 사자가 어떻게 이런 걸 가지고 있을까 싶긴 해도 전 전동 이발기를 받아 들어 전원을 넣습니다. 

하지만 첫 삽 뜨기가 새삼 어렵습니다. 전 망설입니다. 옅은 숱 속에 사는 내면의 목소리가 만류하듯 속삭이죠. 자기 머리 자기가 자르면 팔자 사나워, 지금이라도 얼버무리며 내빼…  

지켜보던 '숱' 사자는 마치 그런 마음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재촉하며 말합니다. 

자, 어서! 요즘 인싸들은 혼자서도 곧잘 하더라. 그리고 인간은 정작 자신이 잘 안다고 생각한 걸 의외로 모르잖아? 진정 자신을 알려면 스스로의 뒷머리를 잘라봐야 하는 법이야.

그럴듯하지만 궤변입니다. 맛있게 먹다가 이빨에 털이 끼면 불쾌하니까 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조금 움찔합니다. 익숙한 기억이 위잉… 바람에 일렁이듯 머리를 스쳐 지납니다. 그리고 입을 앙 다물며 전동 이발기를 들어 오른쪽 구레나룻에서 관자놀이까지 시원하게 어퍼컷을 날려버립니다. 


항상 찾는 단골 미용실이 있습니다. 최선은 아니지만 그나마 무난하다는 느낌의 미용실입니다.

그곳 선생님은 머리를 다 자르시면 마치 갈무리하듯 항상 이렇게 말씀합니다. 

참 뒤통수가 예뻐요. 이런 예쁜 뒤통수를 놔두고 왜 자주 오지 않으세요? 이 뒤통수는…

돌이켜 보면 어쩐지 찜찜했지만, 처음엔 왜 유독 뒤통수, 뒤통수 거렸는지 몰랐습니다. 무척이나 따뜻한 말투이기도 했습니다. 세상엔 그런 사소한 칭찬도 드물어졌습니다. 그러다 한참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발하니 너무 잘 생겼다거나 두상이 참 예쁘다고 한다는 것을. 


왜 하필 나만 뒤통수라고 할까…  

그러고 보니 어느 미용실을 가도 그랬던 것 같은 기분입니다. 어차피 영업 멘트지만, 뒤통수가 예쁘단 건 어쩐지 찝찝하고 의미심장합니다. 설마 정말 특별한 뒤통수일까요? 솔직히 그냥 섭섭해서 삐진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가는 곳마다 제 입으로 뒤통수 대신 저도 잘 생겼다, 두상이 예쁘다고 해달라,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 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다신 뒤통수란 말을 듣고 싶지 않고, 그러기 위해선 이렇게 제 뒤통수는 제가 매만질 줄 알아야 될 것입니다.


그런 생각에 잠긴 사이, 어느새 저는 스스로의 뒤통수를 향해 거침없이 어퍼컷을 날리고 있습니다. '숱' 사자는 가르친 보람을 느낀 스승처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설마 바로 먹어버리지 않길, 맛있는 건 자린고비처럼 걸어둔 채 천천히 음미하길… 아무쪼록 옆머리는 비교적 쉽지만 뒤통수는 어렵습니다. 뒤통수는 제 것이지만 눈과 손 모두 잘 닿지 않습니다. 과연 '숱' 사자의 말대로 인간은 자신의 뒤통수를 모르는 법일지 모릅니다. 아무나 ‘아저씨’가 되긴 어렵습니다. 그토록 남의 뒤통수는 잘 보이더니.


그나저나 신나게 자르다 보니… 끝이 없습니다. 거울을 향해 묻습니다.

어디서 멈춰야 할까?


거울 속의 제가 답합니다. 뭐 괜찮아. 그래 봤자 삭발이잖아. 그래 봤자 '숱' 사자 이빨에 낄 뿐일 테니까.

작가의 이전글 258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