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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채 Feb 02. 2024

_거짓말쟁이의 재회


  리처드 파인먼(Richard Fine-man)과 다시 마주친 건 지하철역이었다.

  줄곧 한 동네에서 함께 자란 친구, 어릴 적 친구를 꼽으라면 당신은 가장 먼저 녀석이 떠올랐다. 파인먼도 당신을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모른다. 워낙 인기가 많았던 녀석이다. 항상 반장을 도맡았고, 그러지 않을 때도 어쩐지 반장 같은 느낌으로 다재다능하면서 성격까지 화통해 모두가 좋아했는데, 정말이지 ‘타의 모범’이라고 적힌 명찰을 가슴에 달고 사는 듯했다.

  파인먼과 당신이 멀어진 건 중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뜻하지 않은 일이었다. 여느 때처럼 현관에서 만나 실내화를 갈아 신으며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날따라 당신의 말에 가시가 돋아 있었다. 어쩌면 늘 녀석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고, 자신도 모르게 속내를 드러내고 말았는지 모른다.

  어쨌거나 평소라면 너그럽게 지나갈 일이었다. 하지만 파인먼은 그날따라 유독 크게 실망한 기색으로 당신에게 말했다.

  “우린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넌 날 그렇게 밖에 안 보는구나?”

  오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차 하는 순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당시엔 곧 만회할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결국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인먼과 당신은 각자 다른 학교로 진학했다. 서로 그렇게 멀어진 건 처음이었다. 여전히 한 동네였지만 사이가 예전 같을 수 없었고, 그런 사이 차츰 서로를 잊은 채 지내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대학생이 된 어느 날, 등굣길 전철을 기다리며 서 있는데 누군가 등 뒤에서 당신을 불렀다.

  “어이!”

  파인먼이었다.

  “어, 오랜만.”

  “잘 지내?”

  “응, 너는?”

  “난 뭐, 그냥 그렇지.”

  반가웠다. 하지만 대화는 묘한 어색함 속에 이어지지 못했는데, 마치 앞차와의 간격 문제로 대기 중인 열차 같았다. 간격을 메우듯 파인먼이 당신에게 물었다.

  “학교 가는 길?”

  “어.”

  “학교 어디 갔다고 했지? 여기서 타는 걸 보면……”

  여전했다. 늘 그랬듯 파인먼은 대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 녀석과 당신 사이엔 이미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생겨 버린 듯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하던 친구는 이제 없었다. 물론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이고 다른 의도 따윈 없었겠지만, 당신은 어쩐지 취조 받는 기분이 들었다.

  “……거기?”

  “응.”

  “그럼, 그 과?”

  파인먼은 당신 학교에서 가장 커트라인이 높은 과의 이름을 댔다. 지원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곳이다. 그때 그만 말을 끊었어야 했다. 하지만 전날의 숙취로 당신의 뇌는 한껏 우둔해져 있었고, 공회전하는 머릿속은 ‘이거 자꾸 왜 이러지, 더는 묻지 말아준다면 좋겠는데.’라는 생각뿐이었다. 슬슬 대화가 괴로워지고 있었다.

  “그 과 맞지?”

  “어, 그렇지 뭐.”

  순간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거기서 그만 이야기는 끝내고 싶다는 생각에 엉겁결에 그렇게 답하고 말았던 것이다. 딱히 거짓말할 의도는 없었지만, 수세에 몰린 먹잇감마냥 당신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예전이라면, 뒤늦게라도 바로 잡았을 것이다. 당신은 종종 딴 생각에 빠져 멍청하게 굴 때가 있었으므로 녀석도 충분히 이해해줄 것이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날 당신은 그럴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그러기엔 잔에 담긴 술이 이미 형편없이 엎질러진 기분이었다.

  기다리던 열차가 들어왔고 둘은 빈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환승역까지는 여덟 정거장, 오래간만에 옛 친구를 만나 반가운 마음은 온데간데없었다. 어떡하든 상황을 모면하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하지만 파인먼은 아직 그만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호! 그럼 거기선 뭘 배워? 강의 내용은 어때?”

  당신이 그런 걸 알 리 없었다. 막 입학해 처음 만난 자유랍시고 수업을 등한시하고 술자리나 쫓아다닌 까닭이었다. 반면 파인먼은 당신보다 더 세세히 알고 있는 듯했다.

  대화는 녀석의 ‘이미 답이 정해진 질문’에 당신이 무조건 동의하는 형식으로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에도 당신은 제발 질문의 소나기가 멈추기를 바랐지만, 빗줄기는 갈수록 굵어지기만 했다. 거짓말은 어둠 속 철로를 따라 거침없이 불어나고 있었다. 당신이 전전긍긍하며 답할수록 당신은 당신과 거리가 멀어졌고, 결국 어느 지점에서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당신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파인먼은 한동안 “정말?”, “그래?”, “그렇지 않아?”, “난 몰랐네.” 따위의 추임새를 곁들이며 대화를 이어갔다. 더군다나 녀석의 목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참 우렁찼다. 열차의 다른 승객들이 흘끔흘끔 둘을 쳐다봤다. 얼굴이 붉게 물든 당신은 주변의 눈치를 살피다가 어떤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 사람은 변명하듯 둘러대는 당신이 거짓말쟁이라는 걸 훤히 꿰뚫어 보는 듯했다.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했어야 했다. 간혹 그처럼 애매하게 휘말릴 때가 있다면, 다소 늦게라도 솔직히 말하고 정정하는 편이 그나마 낫다. 일단 거짓이 불어나면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뿐이다.

  물론 마침 그 무렵 당신이 그런 상황에 유독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안다. 학교가 어디고 전공이 무엇인가에 따라 모든 것을 가늠하듯, 다들 부담스럽게 이것저것 따지고 들었다. 특히 당신처럼 일반의 기대와 예상을 다소 벗어난 경우, 의아해 하며 설명을 원했다. 그러나 막상 설명을 해도 그다지 알고 싶지 않은 눈치였는데, 진심으로 궁금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건 당신의 앞날에도 반복될 일이다. 직업이 무엇이고, 직장이 어디며, 연봉은 어떻게 되고, 집은 어디에 사는지…… 계속된 질문이 당신을 짓누를 것이다. 사실 질문하는 사람 또한 늘 그러한 질문에 시달리고 있을지 모른다. 진정 상대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상대와 비교해 자신의 좌표를 확인하려는 불편한 질문이다.

  그렇다고 그냥 입을 닫아버리면, 또 뜻하지 않은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릴 때가 있다. 속이려 했던 건 아니지만 속이게 된다. 어쨌거나 그것은 당신이 짊어져야할 거짓이다. 뜻하지 않았더라도 거짓을 방조한 순간, 어쩌면 당신도 이미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지금 서로의 진실함을 잃게 되었다는 것을.


  마침내 열차는 여덟 정거장을 지나 환승역에 도착했다. 당신은 도망치듯 다급히 ‘움직이는 취조실’을 벗어났다.

  “난 여기서 내려.”

  “응, 또 보자.”

  그런 식으로 허겁지겁 내린 뒤에야 당신은 마음이 찜찜했다. 어째서 당당하지 못했을까. 아직도 녀석 앞에서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질문을 받기만 했을 뿐, 녀석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학교는 어디고 무엇을 배우는지, 당신도 얼마든지 녀석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신은 이래저래 둘러대기만 급급했을 뿐이다. 하나도 궁금한 게 없다니 친구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다.

  애석한 일이었다. 오래 전 이미 한 번 일을 그르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많이 후회했었다. 늘 만회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가능하다면 지금이라도 돌아가 바로잡아야 했다. 하지만 당신이 돌아보았을 때, 파인먼이 탄 열차는 철로를 따라 이미 깊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 뒤였다. 지나간 열차를 되돌릴 순 없다.

  원래의 목적지로 가려면 플랫폼을 옮겨 환승해야 했지만, 당신은 거기 그대로 서서 다음 열차를 기다렸다. 파인먼을 따라가려는 건 아니었다. 그건 불가능했다. 사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그저 찝찝한 기분을 어딘가에 씻어내고 싶었다. 그래야 될 것 같았다.

  다음 열차가 도착하자 그 안으로 몸을 던진 당신은 문가에 기대어 선 채 내리고 싶을 때까지 타고 가기로 했다. 차창 밖은 까마득했고, 비추는 건 확신 없는 당신의 얼굴뿐이었다. ‘난 이대로 아득한 궤도를 돌고 돌 뿐일까.’ 하지만 정작 당신은 아직 이 열차의 종점까지도 가본 적이 없었다. 가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 당신은 차창 속의 당신에게 말했다.

  “다시 만나면 그땐, 좀 더 당당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후로 당신은 파인먼과 만나지 못했다. 우연하게라도 마주치지 못한 것이지만, 지하철을 탈 때면 녀석이 있는지 없는지 조심스레 주위를 살폈다는 사실도 숨길 수 없다. 만나고 싶었던 것인지 피하고 싶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기회가 있었고 그 가능성을 영 퍼센트로 소진시킨 것이 당신이었다. 다시 만나면 거짓 없이 당당해지겠다는 말은, 다시 만나지 않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과 기회는 반비례했다. 그렇게 당신과 파인먼은 서로 교차하지 않는 철로를 따라 끝내 멀어져 갔다.

  이제 진실함은 회복할 수 없다. 어린 시절의 친구는 당신 곁에 없다. “다시 만나면……”이라는 허튼 다짐도 더 이상 내뱉을 필요 없다. 뜻하지 않았던 거짓은 이제 영원한 거짓이다.

  그것이 옛 친구와 거짓말쟁이에 관한 당신의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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