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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채 Feb 06. 2024

_연필로 쓰세요


  자료집의 긴 목록을 훑다가 눈에 띄었다. 우연히 눈길이 멈췄을 뿐인데, 룰렛 게임처럼 거기 그곳이 있었다. 한동안 까마득히 잊고 있던 설렘, 무언가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 아무것도 모르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다. 크림과 설탕을 황금 비율로 섞은 것 같은 달달한 만남이랄까, 당신은 그곳에 가기로 다짐했다.

  어떤 선택이란 정말이지 순식간에 결정되곤 한다. 물론 그땐 모든 일이 좀 더 단순했던 것이다. 그냥 끌렸고, 설령 틀리더라도 좀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무언가를 선택한다고 그것으로 끝은 아니라고 여기며 마음이 동했다.


  거기에 불을 붙인 것은 그였다. 진학을 앞두고 그와 상담 일정이 잡혔는데, 상담이라고 해야 사실 뜨뜻미지근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만한 게 지난 일 년 동안 제대로 된 대화 한번 나눈 적이 없는 사이였다. 게다가 이미 빤한 대로 지원서를 작성해 가면 순서대로 들어가 동의를 얻는 것이 전부인, 그냥 의무적이고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이제 와서 누군가의 앞길을 논하기엔 늦었지.’ 순서를 기다리며 당신은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차례가 되어 들어가 보니 그는 뚱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하긴 누구 부모가 찾아왔다고 할 때를 빼고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경우는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만큼, 좋은 게 좋은 것이었다. 무난하게 넘어가길 바랐다. 괜히 고집을 부린다거나 해서 굳이 심기를 거슬릴만한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당신은 조심스레 준비해간 지원서들을 그에게 내밀었다.

  지원서는 그가 납득할 만한 것과 당신이 원하는 바를 나름 잘 버무려 놓았다. 과연 그도 처음엔 “음 그렇지.” 하며 제출한 원서들을 한 장 한 장 무심하게 넘길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는 주춤하며 이미 내려놓은 지원서 한 장을 다시 주워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거기에 그대로 시선을 떨군 채 당신에게 물었다.

  “그곳에 가겠다고?”

  당신은 가만가만 눈치를 살피며 답했다.

  “네.”

  그러자 그는 쓰읍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달그락 달그락 손가락으로 연신 탁자를 괴롭혔다.

  “그곳이라…….”

  딱히 대꾸를 원하는 것 같지 않아 당신은 가만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계속 지원서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뭔가 설명을 덧붙여야 할까?’하고 당신이 의문표 없는 질문을 두고 잠시 고민하는 사이, 그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빤히 당신을 바라보았다. 마치 지금 이 놈이 나한테 장난을 치고 있는 게 아닌지 살펴보려는 듯.

  그처럼 오래 그와 얼굴을 마주 본 건 처음이었다. 당신이 머쓱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그는 뭔가 말을 꺼내려다 삼켰다. 순간 입 꼬리를 희미하게 씰룩였던 것도 같은데, 의중을 알기엔 난해한 표정이었다. ‘혹시 비웃는 걸까…….’하는 생각에 미칠 즈음, 마침내 그가 당신이 제출한 원서들을 한데 모아 몇 차례 탁자에 두들기며 말했다.

  “그래, 한 군데 정도야 뭐. 다른 데도 지원하니까.”

  이번에도 역시 당신의 대답을 원하는 것 같지 않았다. 상담이라기보다는 모노드라마였다. 그는 두드려 달랜 원서들을 탁자 위에 놓더니, 당신이 미리 연필로 기재해둔 글자를 하나씩 볼펜으로 덮어쓰기 시작했다. 그런 식으로 가필하면 허락이 떨어진 것이었다. 이제 됐다 싶은데, 그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아 참, 혹시 모르니까…… 여긴 가서 분위기 보고 고쳐 쓰려면 고쳐 쓰라고!”

  그러더니 그곳만 연필로 쓴 그대로 남긴 채 지원서 더미를 당신에게 내밀었다. ‘고쳐 쓰려면 고쳐 쓰라고?’ 그런 말을 듣자 어쩐지 기분이 언짢았다. 그래서 당신은 상담을 끝내고 나오자마자 가지고 있던 가장 진한 볼펜을 꺼냈다. 그리고 이제 아무도 고칠 수 없도록, 아직 연필로 쓰여 있던 ‘그곳’이란 글자 위를 덮어썼다. 자꾸 덧칠한 글씨가 비정상적으로 굵어질 만큼.


  지금도 가끔 당신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래서 정말 그곳에 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본다. 인연이란 그런 것이니까. 문득 한때 유행했던 가사가 떠오른다.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 사랑을 쓰다가,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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