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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채 Feb 09. 2024

_놈의 거울


  어느 날 밤, 놈에게서 전화가 왔다.

  놈과의 악연은 길다. 당신은 어려서부터 놈의 만행을 봐왔는데, 도저히 가까워질 수 없는 끔찍한 놈이다. 만약 아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을 짚어 일면식도 없는 상태로 돌아갈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코 놈을 택할 것이다.

  다만 그런 인연일수록 오히려 질기다. 마치 신이 당신에게 인간관계의 편식을 불허하기라도 한 듯, 소중한 이들이 하나둘 멀어질 때에도 놈만은 계속 당신 주위에 머물렀다. 짧은 인생, 되도록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란 말은 당신에게 해당되지 않는 듯했다.

  놈의 전화는 받기 싫었다. 받고 기분 좋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놈은 받을 때까지 벨을 울리는 놈이었다. 당신은 눈을 감은 채 끈질기게 울리는 벨 소리를 외면하며 끝까지 버텨야할 이유를 되새겼다.

  ‘이기적이고 시기심 많아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걸 싫어하고 위하는 척 주변 사람들을 이용해 먹는 가식적인 놈.’

  문득 찔리는 기분이 들었다. 대체 지금 누가 누굴 얘기하고 있는지…… 어떤 말들은 부메랑처럼 당신에게 돌아왔다. 눈을 뜨자 정면에 당신을 비추고 있는 거울 하나가 보였다. 썩 예감이 좋지 않지만, 놈의 전화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놈은 특유의 뻔뻔한 말투로 간 보듯 이런저런 당신의 근황을 물어왔다. 상대에게 진심인 척 어딜 가서 무얼 하고 있는지 세세하게 관심을 기울이며 묻지만, 실은 훤히 다 알고 전화했을 게 분명했다. 이럴 경우 놈의 꿍꿍이는 따로 있었다. 가만히 듣다가 당신의 이야기가 다 끝나면 품평하듯 한 마디 가시 돋친 말을 얹는 것이다.

  “그래서 그곳에 간다고?”

  “응.”

  “그런 델 왜 가냐?”

  전화 받은 걸 후회했다. 이제라도 대강 둘러대며 끊는 편이 좋을 듯했다.

  “근데 나 지금 좀 가봐야 해서…….”

  어떻게든 마침표를 찍으려는데, 놈이 그러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밤에 어딜 가.”

  “아니, 뭐…….”

  “그나저나 너 걔 소식 알아?”

  “누구?”

  “리처드 파인먼, 우리 만능 반장님 말이야!”

  “왜?”

  “별 일이야. 걔 낙방했대. 미끄러졌단다. 그 잘난 녀석이 말이지.”

  순간 당신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다신 놈의 전화를 받지 않을 생각이었다.

  늘 그랬다. 가만히 있으면 입이 근질근질하기라도 한 것처럼 남을 험담했다. 시기와 질투로 두툼해진 입으로 꼬집고 비틀며 상처 입혔다. 그렇게 배배 꼬인 놈은 또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결국은 자신이 더 낫다고 안도하는 것일지도 모르나, 그렇게 얻은 자족과 우월감이란 곧 열등감의 데칼코마니일 뿐이다.

  ‘일절 무시해 버려야 돼.’

  자꾸 상대하니까 괴로운 것이었다. 하지만 전화를 끊어도 놈은 계속 당신의 머릿속을 울려 댔다.

  ‘안 된 일이긴 하다만, 좀 고소하지 않냐?’

  놈의 말은 무척 아프다. 때론 당신을 꿰뚫는 것 같다. 누구도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한 적 없지만, 놈을 대할 때마다 당신을 맴도는 말이 있다.

  ‘지금 곁에 남은 친구를 보면 너 자신을 알 수 있어.’


  다시금 벨이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은 무시하고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대로 눈과 귀를 베개 사이에 파묻고 밀려오는 감정을 질식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잠시 뒤, 당신은 의외로 몸을 다시 일으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은 맞은편 벽에 걸린 거울 속에 고스란히 비춰지고 있었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자 거울 속의 당신이 수화기를 귀에 댄 채 비열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거봐, 너도 궁금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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