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인채 Feb 16. 2024

_오리엔테이션


  그곳으로 가는 오리엔테이션이라 가보니 신고식이 한창이었다. 딱 질색이다. 당신 차례가 되어 일어나 간단한 인사와 소개를 마친 뒤 앉으려는데, 누군가 등 뒤에서 외쳤다.

  “노래해! 노래해!”

  은근슬쩍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음울한 노래로 좌중을 피로하게 만드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초면에 차마 못할 짓이었다. 당신이 손사래를 치며 극구 사양하고 자리에 앉자 여기저기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에이…….”

  이런 건방진 녀석 봐라 하는 선배들의 따가운 눈초리도 느껴졌다. 분위기를 망쳤으니, 좋은 첫인상은 물 건너간 셈이다. 하지만 그건 당신이 기꺼이 감수해야 할 부분. 딱히 유별나게 굴 생각은 없지만, 오해가 있다면 시간이 해결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그럭저럭 넘어간 건 다음으로 호명된 동기 덕분이었다. 상당한 걸물이었다. 관심은 곧 그쪽으로 쏠리고, 당신으로 인해 삐걱거린 분위기도 되살아났다. 다부진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한 그는 곧이어 앞날의 계획과 포부까지 밝혔다. 모두들 조용히 그의 말을 경청했다. 더러 감동받은 듯 고개를 끄떡이는 사람들도 보였다.

  당신도 눈을 번쩍 떴다. 또래로부터 그처럼 확고한 인생 계획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최소 삼수는 하지 않았을까 의심해 보았지만, 그건 얼토당토않은 음모론이다. 그는 그런 값싼 시기와 질투 따위엔 굴하지 않겠다는 듯 말했다.

  “졸업하면 신학교를 거쳐 그곳에서 선교 활동을 할 생각입니다.”

  그러더니 담담하게 노래까지 부른 뒤 자리에 앉자 모두들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누군가는 다른 종교를 믿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종교에 무관심하겠지만,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에게 어울리는 박수갈채였다.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가 지도를 펼쳐 보이듯 인생 계획을 들려준 순간, 여태껏 생각해보지 못한 질문 하나가 당신 앞에 떨어졌다.

  앞으로 뭘 하고 살아야 하지?


  어떻게든 여기까지만 오자는 것이 지금껏 당신이 가진 계획의 전부였다. 그런데 그 끝은 또 다른 시작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 다음은 더욱 아득해 보였다. 물론 당장 크게 걱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아직 오리엔테이션일 뿐, 시간은 당신 편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믿을 수 없다. 손에 쥐었다고 생각한 순간 속절없이 빠져 나가는 모래알과 같다. 그러므로 시간이 지나도 다를 바 없다. 아득함에서 깨어나지 못한 당신은 여전히 오리엔테이션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이제 더는 시간도 당신의 편이 아니라고 여길 때, 조급함을 느끼며 떠밀리듯 빠져 나가는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긴다.

  일단 어디든 가보기로 한다. 거기가 어딜 지, 거기서 뭘 해야 할지는 모른다. 다만, 가본다는 행위 자체가 차선의 계획이 된다. 그 끝에 그곳이 있을까? 모른다. 그건 뚜렷함 없이 살아온 당신이 택할 수 있는 운명이 아니다.


  또 시간이 흐른다. 이제 당신은 어디든 가보기로 한 곳에 와 있다. 어디든 가보기로 한 곳에서 당신은 그 친구를 떠올린다. 걸물이었던 동기. 가끔 그곳 어디선가 그와 우연히 마주치는 상상을 한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계획대로 그곳에 갔는지조차 당신은 알 수 없다. 신학교에 갔다는 소식은 들었다. 하지만 그 다음은 모른다. 한때는 종종 마주치며 안부를 물었지만, 시간의 섬과 섬을 잇는 사이 서로 오가는 길이 달라졌다. 그럼에도 어디선가 문득 그가 생각날 때면 당신은 진심으로 바란다.

  부디 세상의 변덕으로부터 예외이기를.


  하나 덧붙이면, 선배들은 그날 오리엔테이션 뒤풀이에서 기어이 당신이 노래를 부르게 했다. 취기를 빌린 당신은 당신이 아는 가장 우울한 발라드를 불렀고, 부르다가 가사를 잊었으며, 이어지는 기억 또한 잃어 버렸다.

  또 한 가지 덧붙이자면, 그 후로 이어질 모든 신고식에서 당신은 그냥 시키는 대로 노래를 부른다.

이전 08화 _모전 설화 母傳 說話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