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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채 Feb 20. 2024

그곳과의 동의어 _아샤와의 동행

  마침내,

  문을 열자 그곳이 있었다. 전생의 인연 같은 아련함, 어디든 자유로이 가고픈 충동.

  이후로 가야할 단 하나의 장소를 꼽으라면 당신은 그곳부터 떠올리게 되었다. 한 번, 또 한 번, 다시 한 번 발걸음이 이어졌다. 그곳은 당신에게 배움과 가르침이었고, 일상이자 여행이었으며, 또한 사랑이었다. 좋았던 느낌, 그리운 마음은 당신이 어디에 있어도 거짓말처럼 되살아났다.



  그 시절 당신에게 그곳은 그 사람과 동의어였다. 어디서든 마주칠 것만 같아 발 길이 닿는 곳마다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때 그곳에 그 사람이 있었다. 혹 그런 느낌 알까. 분명 꿈이 아니지만, 상상 속에 꾸며낸 것 같은 장면이 현실에서 이뤄진 느낌. 간절히 바란 순간 그 사람과 재회한 당신은, 이후로도 그곳 어디서든 불현듯 그 사람과 마주치길 기대했다. 당신에게 그곳은 온통 그 사람이었다.


  당신은 그곳으로 가는 길에 처음 그 사람과 만났다. 통로를 사이에 두고 옆자리 앉은 그 사람은 일행 없이 혼자였고, 펼쳐 놓은 여행서와 지도 사이를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주위는 어둡고 다른 승객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유독 그 사람 주위만 밝게 빛나 신비한 분위기마저 자아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당신의 눈길을 대번에 사로잡았다. 꼭 별 헤아리며 어두운 밤바다를 항해하는 모험가 같았다.

  ‘뭐 하는 사람일까.’ 자연스레 호기심이 발동했지만,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당신은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만한 숫기가 없었다. 지레짐작컨대, 지도 위로 두 손을 경쾌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계획 없이 떠난 여행자의 즉흥 연주를 연상케 했다. 범상치 않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더는 엿보지 않는 게 좋을 듯했다. 예의가 아니었다. 궁금증을 억누르며 눈을 감자 간헐적으로 사각 사각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뒤였다. 당신은 살짝 다른 기척에 눈을 떴다. 곁눈질을 해보니 그 사람은 통로 쪽으로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당신 발치에 땅콩 봉지가 하나 떨어져 있는 게 보였다. 당신은 그걸 주워 그 사람에게 건넸고, 둘은 잠시 눈이 마주쳤다. 봉지를 건네받은 그 사람은 고맙다는 눈인사를 했고, 당신도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걸 계기로 대화를 계속 이어갈 법도 했지만, 막상 그러진 못했다. 주위는 너무 고요했고, 당신은 생각이 과할수록 말수가 줄어드는 편이었다. 다시 지도 위로 돌아간 그 사람은 빛 속에, 당신은 어둠 속에 계속 남아있었다.

  먼저 ‘손’을 내민 건 그 사람이었다. 경유지를 하룻밤 거쳐 가는 긴 여정, 어쩌면 그 사람도 말동무가 필요했을지 모른다. 실내가 밝아지고 경유지에 거의 다다를 즈음, 그 사람은 뚫린 땅콩 봉지의 한 귀퉁이를 당신에게로 향하며 그렇게 말했다.

  “땅콩 먹을래요?”

  덕분에 낯을 가리던 당신도 어색함 없이 말을 틀 수 있었다. 이름이 아샤라고 했다. 알고 보니 같은 나이에 당신처럼 그곳으로 가고 있다고 했다. 아샤가 말했다.

  “동갑인데 말 편하게……”

  물론이었다. 아샤는 경유지에서 어떻게 할 건지 당신에게 물었다. 그냥 지루하게 환승을 기다릴지, 밖으로 나가 숙소를 잡고 잠시 돌아볼 것인지. 그날 밤부터 다음날 정오까지 시간 여유가 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아샤가 불쑥 제안했다.

  “나가 볼 생각이면, 같이 다닐래?”

  당신은 뺨이 붉어지며 가슴이 두근댔다. 물론 당신이 상상하는 그런 상황일 리 없었다. 단지 여행의 즉흥연주, 여비를 아낄 겸 같이 다니자는 의미였다. 어쨌거나 당신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자 아샤도 잘됐다며 말했다.

  “어떻게 할지는 생각해뒀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제야 여행서와 지도 사이를 그토록 분주히 헤맸던 이유를 알 듯했다.


  하지만 당신은 그다지 흥미로운 동행자가 못 되었다. 시내로 들어가 도미토리에 짐을 풀고 만 하루를 같이 보내는 사이, 당신은 시종일관 긴장한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일부러 그러려는 게 아니라, 머릿속이 뒤죽박죽 무질서해 꺼낼 말을 찾기가 어려웠다. 아마도 아샤는 꽤나 지루했을 것이다. 그나마 이럴 때마다 당신이 가끔 그러듯 시답잖은 농담을 남발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그나마 좋은 점이라면, 있는 듯 없는 듯 크게 성가시게 굴진 않다는 정도다. 리드하는 쪽은 아샤, 따르는 건 당신. 사이사이 동의를 구하는 몇 마디 대화만 오갈 뿐 당신은 묵묵히 아샤의 길을 따랐다.

  “과묵한 편이네?”

  숙소로 돌아와 근처 레스토랑에서 병맥주를 부딪치는데 아샤가 말했다.

  “자기만의 세계가 있는 것 같아.”

  다니는 내내 혼자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했던 모습이 그렇게 보인 모양이었다.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당신은 굳이 정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까운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다음날, 환승 시간에 맞춰 돌아간 두 사람은 미리 좌석을 지정하지 않아 서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더 지나 마침내 그곳에 도착했다.

  입국 심사를 마치고 짐을 찾아 나온 당신은 잠시 대합실 벤치에 앉았다. 여장을 챙긴다는 건 핑계였고, 아직 나오지 않은 아샤를 기다렸다. 여기서부터 각자의 길을 갈 테니, 작별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아샤도 곧 당신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옆자리에 앉아 왼손을 종이처럼 내밀어 보이더니 그 위로 펜처럼 오른손을 굴리는 시늉을 하며 물었다.

  “뭐 적을 것 있어?”

  당신은 꼭꼭 싸 둔 배낭을 뒤져 수첩과 볼펜을 꺼냈다. 그걸 건네받은 아샤는 맨 마지막 페이지를 펼치더니 그곳에 뭔가를 적으며 말했다.

  “여기 내 주소. 넌 남쪽으로 간다고 했지? 나도 꼭 가보고 싶더라. 혹시 가능하면, 거기서 엽서 보내줄래?”

  아샤는 당신과 반대 방향으로 간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은 당신도 갑자기 그쪽으로 따라가고 싶어졌지만, 줏대 없는 생각이라 그만두었다.

  두 사람은 무거운 배낭을 각자의 어깨에 짊어지고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삼발이 택시를 불러 먼저 아샤의 배낭부터 실었다. 아샤는 지인이 있어 일단 거기로 간다고 했다. 그런 다음 상황을 봐서 북쪽으로 출발할 것이라고 했다. 이제부터 더는 동행이 필요 없었다. 가벼운 악수를 끝으로 둘은 작별을 고했다.

  아샤가 탄 삼발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문득 그런 기분이 들었다. 막 그곳에 도착했지만, 이미 하나의 여정을 마친 기분. 다만 손바닥 위로 아직 진한 여운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쩐지 이것이 끝은 아닐 것 같았다.


  한동안 당신은 큰 이동 없이 워밍업 같은 시간을 보냈다. 앞으로 오래 머물 것이니 서두를 필요 없었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 그곳에 적응해 나갔다. 게다가 당장은 주위를 둘러보기만 해도 벅찬 느낌이었다. 발이 닿는 곳마다 눈이 커지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만큼 그곳의 첫인상은 강렬했다.

  누군가 그곳을 신비하고 이국적이라고 했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뭔가 성에 차는 표현이라고 하기엔 부족했다. 그곳은 세상 만물이 사방으로 생동하고 있었다. 세상을 망라한 듯 다양함이 주위에 넘실거렸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귀에 들리는 것, 코와 혀를 자극하는 모든 것이 그랬다.

  한편, 그래서 낡은 곳이기도 했다. 그처럼 충분히 낡지 않고서 다양한 것을 모두 담고 있기는 어려워 보였다. 연식을 알 수 없는, 유구한 세월을 머금은 유산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그 또한 그곳의 전모는 아니었다. 역사의 숫자들을 엿가락처럼 늘려 어제와 오늘이 공존하고 있었다. 오래되었다, 새롭다는 것보다 그 조화에 압도되어 감탄사를 연발했다.

  문득 세상을 너무 모르고 살아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곳에서 당신은 생각보다 더 왜소했다. 깊이를 알 수 없다는 말의 뜻을 체감했다. 하지만 그런 무지라면 반가웠다. 당신의 무지를 깨닫는 건 결코 나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알아가고 싶다는 욕구가 커졌다. 어렴풋하게나마 길이 보이는 느낌이었고, 난생처음으로 무언가를 추구해 보고 싶어졌다.

  그렇듯 당신은 불확실한 미래 앞에 비로소 몸을 일으켜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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