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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채 Feb 23. 2024

_재회의 자물쇠


  며칠이 지나자 슬슬 한발 더 깊숙이 그곳 안으로 발걸음을 내딛을 용기가 났다. 내친 김에 당신은 다음날 바로 짐을 꾸려 가장 가까운 기차역으로 향했다.

  인산인해를 이루는 역사는 외국인 예약 창구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시간표를 확인한 뒤 복잡한 예매 용지를 채우며 순번을 기다리는데, 스쳐가는 실루엣에 당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아샤였다.

  “여기서 다시 만나네?”

  이번엔 당신이 용기를 내어 다가갔다.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라고 했지만, 당신은 이미 굵은 볼펜으로 우연한 만남을 필연으로 고쳐 쓰려 하고 있었다. 실은 지난 며칠간 줄곧 그 순간만을 기다려온 것 같았다. 겉으론 이대로 어쩔 수 없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재회를 계속 상상해왔던 것이다. 발 길이 닿는 곳마다 혹 아샤가 있을 것 같아 두리번거렸었고, 덕분에 모든 곳들이 더욱 낭만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리고 상상은 현실이 되었다. 각자의 기차표를 예약하고 목적지로 떠나기까지 또 조금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은 함께 구시가지의 낡은 영화관으로 향했다. 어릴 적에나 본 듯한 구식 영화관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당신은 머리 위로 넘어오는 아스라한 영사기의 안개 빛에 도취된 채 아샤의 옆모습을 힐끔거렸다.

  한편으로 당신은 후회하고 있었다. 잘못된 티켓을 예약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혹 길동무가 필요하지 않을까. 널뛰는 심장 박동 소리와 함께, 행선지를 변경해 같은 곳으로 가고 싶다는 말이 튀어나오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언제부터 알았다고 그런 얘길 꺼낼까 싶었다. 너무나도 서툰 제안인 것 같았고, 자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감정은 홀로 깊어져만 갔다. 그런 일이 진짜 일어나길 바라다 못해 어느새 할 말을 떠올리기까지 했다.

  “같이 가면 안 될까? 여행의 묘미는 사람과의 만남에 있다고 하잖아. 비록 우린 스쳐가는 여행자들이고 아직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없지만, 지금 이렇게 다시 만난 데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같은 가면 좋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물론 그건 상상 속의 대사일 뿐이었다. 그걸 내뱉지 말아야할 이유는 당신의 대사 속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둘은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스쳐가는 사이였다.


  영화를 보고 간단한 식사를 마친 뒤 두 사람은 다시 기차역으로 향했다. 아샤의 출발 시간이 조금 더 빨랐다. 당신은 역으로 가는 내내 폭주하는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그러는 사이 생각보다 빨리 역에 도착했고, 얼마 기다리지 않아 열차가 들어왔다. 연착이 일상인 곳인데 하필 이럴 땐 제때 도착했다.

  어느덧 해가 기울어 플랫폼 위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사선으로 길게 누워 있었다. 당신은 얼굴을 숙인 채 아샤의 그림자만을 밟고 서 있었다. 그렇다고 그림자를 붙잡아 둘 순 없는 노릇이었다.

  열차가 잠시 정차한 틈에 당신은 아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아쉬움에 마지막까지 배웅하려는 것이었지만, 혹 그대로 기차가 떠나 버려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움직여라, 움직여라, 제발 움직여라…….’

  그러는 사이, 열차의 행과 열을 더듬어 자리를 찾은 아샤가 말했다.

  “아이고, 자물쇠를 깜빡했네…….”

  그 말에 당신은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마침 여분이 있던 터라 잠시 있어 보라며 배낭을 뒤졌고, 가진 것 중에 가장 굵고 절대로 끊어지지 않을 것 같은 자물쇠를 꺼내 아샤에게 건넸다.

  “이거.”

  그 자물쇠가 둘의 인연을 묶어 놓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 꼭 돌려줄게.”

  이제 열차는 발차 시각을 알리고 있었다. 당신은 그만 플랫폼으로 내려서야 했다. 뭔가 미진한 마음에 아샤가 있을 차창을 찾아보았다. 답답하게도 얼른 찾아내지 못하다가, 열차가 조금씩 미끄러질 때쯤에야 비로소 아샤의 옆모습이 그려진 창을 발견했다.

  왜 이토록 빨리 마음이 깊어진 걸까. 당신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열차는 그런 감정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듯 금방 속도를 올리며 멀찍이 떠나갔다. 멀어지는 열차를 바라보며 당신은 생각했다.

  ‘인연이라면 또 만날 거야.’

  꼭 돌려준다고 했고, 그러려면 반드시 만나야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곳에서 아샤와 마주치는 우연은 다시 반복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말했다. 여행에서의 만남은 여행의 기억 속에 묻어둬야 한다고. 다만 그곳으로 가는 길, 옆자리를 비춘 실내등, 떨어진 땅콩 봉지, 경유지에서의 동행, 수첩에 적힌 주소, 기차역에서의 재회, 오래된 영화관, 두꺼운 자물쇠…… 그냥 잊기엔 너무 많은 운명의 오브제들이 이미 당신 마음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후로 자물쇠에 묶인 건 당신이었다. 그곳은 온통 아샤였고, 다시 만날지 모른다는 기대와 아쉬움, 희망과 절망이 공존했다.

  아샤는 그곳 말로 ‘희망’을 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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