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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채 Mar 01. 2024

_어느 만우절의 엇갈림


  결국 당신은 아샤를 다시 만났다.

  그곳에서의 첫 여정을 마치고 돌아와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이제야 받았다는 것인지, 일찍이 받았는데 이제야 연락한다는 것인지 모르지만, 아샤는 엽서를 받았다며 언제 한번 보자고 기별했다. 다만 당신은 곧 떠나야 하고,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럴 게 아니라 말이 나온 김에 바로 만나자고 했다.


  해질 무렵 만난 둘은 밤늦도록 이곳저곳을 걸으며 그곳을 추억했다. 자연스레 아샤의 그곳에 관하여 들을 수 있었다.

  “그땐 정말 어떡해야 할지 깜깜하더라.”

  아샤는 예고한 대로 북쪽으로 향했다. 기차에서 버스로 갈아타며 산맥을 통과하던 중이었는데, 구불구불 가파른 언덕을 오르던 버스가 그만 전복되고 말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숨이 끓어져 널브러진 짐승처럼 버스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주위는 아무도 살지 않는 황량한 곳이었고, 날은 빠르게 어두워져 갔다. 하지만 아무도 조치를 취하러 나타나는 사람이 없었다. 갈아탈 교통편에 대한 소식도 없었다. 이미 시간이 늦어 무엇이든 다음 날이나 가능할 거라는 답만 돌아왔다.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당황한 건 아샤뿐인 듯했다. 유일한 이방인이었던 아샤와 달리 그곳 사람들은 별 일 아니라는 듯, 잠시 그 자리에서 기다리더니 오늘은 별 수 없다는 최후 통보를 받자마자 하나둘 뿔뿔이 흩어져 어딘가로 사라져 갔다.

  아샤는 아연실색하며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산적이 나타나도 이상할 게 없는 곳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아까부터 몇몇의 눈길이 이방인인 자신에게 쏠린 것 같아 불안했는데, 누군가 나쁜 마음을 먹고 자신을 어디론가 데려간다 한들 아무도 모를 듯했다. 게다가 산간지대인 까닭에 해가 빨리 저물고 기온도 뚝 떨어져 그 자리에서 가만히 버티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였다.

  “큰일 났네. 그래서?”

  “다행히 누가 그러더라. 자기 마을이 거기서 멀지 않으니까 같이 가자고.”

  버스의 옆자리에 타고 있던 아주머니였다. 아샤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이대로 혼자 어두운 길가에 남거나 또 다른 누군가를 따라가는 것보단 나았다.

  “휴…….”

  “그러게. 한참 걸어가니까 마을이 나오더라. 그렇게 거기서 하룻밤 신세 졌는데, 얼마나 감사한지.”

  “은인이네.”

  “응.”

  “다행이다.”

  “다행이지.”

  “그래서?”

  “도움을 받아 다음날 인근 도시로 나올 수 있었어.”

  어쩐지 용두사미의 싱거운 결말이었다. 하지만 무사히 돌아왔으니까 그런 이야기도 해줄 수 있는 것이었다. 아샤는 거꾸로 당신에게 물었다.

  “너, 혹시 여행운이라고 알아?”

  “여행운?”

  “응, 여행의 운(運).”

  그때 아샤는 깨달았다고 한다. 그걸로 그곳에서 자신의 운은 다 써버렸다는 것을. 그래서 더는 그곳에 머물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게 순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당신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찌감치 그곳에서 돌아온 아샤는 더 이상 그곳에 대해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다시 그곳에 갈 마음은 없었다. 사실 이 이야기를 꺼낸 것도 처음인데, 당신에 대한 기억 또한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

  “그러다가 네가 보낸 엽서를 받은 거야.”

  묻어둔 채 잊고 있던 타임캡슐을 꺼내 본 것처럼, 엽서는 말도 안 되는 긴 시간이 걸려 비로소 도착했던 것이다.

  “정말 오래 걸렸구나.”

  “응. 그래도 정말 보내 줄 거라고는 기대 안 했는데…… 얼마나 반가운지.”

  그 말과 거의 동시에, 당신은 엽서 말미에 썼던 내용이 새삼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런 당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듯, 아샤가 화제를 돌렸다. 발이 아프다고, 어딘가 좀 들어가자고 했다.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다가, 두 사람은 적당한 찻집으로 들어갔다. 막차 시간을 확인하고 차를 한 잔씩 주문했다. 슬슬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게 둘 사이의 거리가 다시 조금씩 멀어지려 할 때, 아샤가 당신에게 물었다.

  “다시 그곳에 간다고?”

  “응.”

  피하고 싶은 화두지만, 당신은 체념하며 답했다. 깨어나기 싫은 꿈을 꾸는 사이 애써 무시하던 알람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언제?”

  “곧, 만우절에.”

  “하필……”

  아샤는 좀 아쉬운 눈치였다. 말수가 줄고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만우절이라 거짓말 취급을 받는다며 당신이 그 상황을 넘겨보려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살릴 수 없는 침묵이었다. 그러다가 아샤가 불쑥 그렇게 말해 버렸다.

  “꼭 지금 가야 돼? 그러니까 내 말은…… 좀 미루면 안 되는 거야?”

  이번에는 당신이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잠시 망설인 당신은 끝내 그렇게 답했다.

  “갈 건 가야지.”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지만, 당신은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간혹 그때 다른 대답을 했다면 어땠을까 싶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미뤄서 그 순간은 모면해도 결국은 가야했을 테니까. 이제 와서 ‘만약’이란 부질없다.

  밤은 깊었고 잔은 비었으며 막차 시간이 가까웠다. 아샤가 당신에게 말했다.

  “그만 일어날까?”


  그것이 그곳이 아닌 곳에서 당신과 아샤가 만난 첫 기억이다. 이미 두 사람에게 있어 운명의 타이밍이란 그렇듯 조금은 어긋나 있었다. 얼마 후, 당신은 거짓말처럼 그곳으로 떠났다.

  그럼에도 당신은 미련을 놓지 못했던 것 같다. 냉정히 떠났으면서, 때때로 엽서를 썼다. 장문의 엽서를 쓰는 버릇은 여전해 편지처럼 길어지곤 했고, 때문에 부치지 않을 수 있어 스스로의 모순을 비켜갈 수 있었다. 보내지 않는 한 괜찮았다.

  다만 그런 사이에 당신의 감정은 홀로 깊어져만 갔다. 그곳과 희망(아샤)이 더 이상 같지 않다는 것이야말로 만우절의 농담 같았다. 균형감을 상실한 감정은 한쪽으로만 비대해져 갔고, 결국 부풀어 오른 풍선마냥 터지고 말았다.

  당신은 끝내 엽서를 보내 버렸다. 계속해서 몇 통을 더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아샤의 답장을 받았다.


  그만, 엽서 보내지 말아줘.


  한 문장에 불과한 답장엔 복식 호흡과 같은 깊은 한숨이 배어 있는 것 같았다. 답장을 내려놓으며, 당신은 자책했다. 자기만의 감정에 치우쳐 굳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다는 건 엽서를 보낸 순간 당신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보다 원치 않은 엽서를 받았을 상대의 감정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것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엽서를 보내는 일 따윈 하지 말았어야 했다. 떠났으면서 구차하게 질척거리며 상대를 괴롭히고 있었다. 아샤의 답장을 다시 봉투 안으로 접어 넣는 당신은, 오늘도 만우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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