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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le Ale Apr 20. 2019

나를 보내지 마 Never Let Me Go

가즈오 이시구로의 SF 

캐시와 루스, 그리고 토미는 기숙학교 헤일셤의 친구들이다. 소설 나를 보내지마는 이들 세 친구들의 우정과 사랑 이야기가 중심이다. 여느 성장소설과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는 이야기는 서서히 숨겨진 베일을 벗어가며 비밀스럽고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평범한 소년 소녀들의 우정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인 듯했던 전개는, 이들의 정체가 자연스럽고 담담하게 드러나며 슬픈 결말로 다가간다.


소설 후반부에 가서야 드러나는 전모는, 이들이 장기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클론이고, 이들은 영혼을 가진 생명이 아닌 장기 적출을 위한 소모품이라는 사실이다. 이들 클론이 소모품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인식은, 그렇게 믿어야만 죄의식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인식이다. 클론이 사실은 인간과 하등 다를 바 없는 감정을 가진 인격체이지만, 그것은 이들의 장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진실이다. 그래서 클론들은 철저하게 장기 이식용 동물로 취급받고 있다.


헤일셤 기숙학교는 그런 사회적 인식에 반기를 든 일련의 운동가들이 설립한 학교이다. 클론들도 제대로 된 환경이 주어진다면 인간과 똑같은 감정과 지능을 갖고 있는, 인간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만들고 운영한 기관이었다. 캐시, 루스, 그리고 토미는 헤일셤 기숙학교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 여느 청소년들과 다름없는 성장기를 보낸다. 하지만 선생들이 학생들에게 보이는 어색한 태도와 떠도는 소문, 그리고 어느 정도 스스로의 자각으로 학생들은 어렴풋이나마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짐작은 하고 있다.


명확하게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학생들은 결국 자신들이 장기를 적출당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이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이 슬픈 운명은 어김없이 이들 세명의 친구들에게도 찾아온다. 간병인으로 일하고 있는 캐시는, 루스가 두 번의 장기 적출 끝에 죽음을 맞는 것을 지켜봐야 한다. 그리고 연인으로 발전한 토미가 네 번의 장기 적출 끝에 역시 사망하는 것을 지켜본다. 이 과정에서 이들 세명이 겪고 느끼는 감정들이 차분하게 그려진다. 너무 차분하고 담담하게 그려지기에 더욱 처연하다.


자신의 존재가 장기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해 누구도 격하게 저항하거나 운명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실낱같은 희망, 즉 정말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을 입증한 헤일셤 출신들에게는 장기 기증이 유보된다는 떠도는 소문에 희망을 걸어보지만, 결국 헛된 소문일 뿐, 정해진 운명을 벗어날 길은 없다. 그런 가능성이 헤일셤 출신에게만 허락된다는 소문으로 인해, 헤일셤 출신들은 다른 클론들에게서 특별한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이는 헤일셤이 특별한 기숙학교였기에, 즉 다른 클론들과는 다르게 헤일셤 출신들은 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는 점에서 그런 소문이 난 것일 뿐, 결국 모든 클론은 정해진 운명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그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기에 이들의 사랑과 우정은 더욱 안타까운 감정을 자아낸다.


이 작품을 SF로 분류하는 것은 맞지만 전통적 개념의 SF라기보다는 오히려 성장소설과 인간 본성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하는 작품이다. 클론이라는 설정이 사용되었지만 과학적 사실에 기반하였다기보다는 우리 존재에 대한 성찰을 담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소설이 진행되면 가슴 시린 사랑이야기가 펼쳐지고, 같이 성장해가는 친구들 사이의 우정과 갈등에 관한 이야기가 처연하게 그려진다. 여느 성장 소설과 크게 다를 바 없었을 내용이지만, 클론이라는 존재가 이야기를 더할 나위 없이 처연하게 만든다. 본질적으로 "차별"에 대해 말하고자 한 것으로 이해하지만, 이야기의 구성과 전개는 그런 사회적 메시지를 크게 부각시키지 않는다. 그럼에도 깊은 울림을 전하고 있고, 소설을 덮고 나서도 한동안 마치 인식의 깊은 심연에서부터 떠오르는 듯한 메시지를 계속 생각하게 된다.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201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영국 작가이다. SF작가는 아니고, "남아있는 나날"과 같은 작품으로 지극히 영국적인 배경과 전통을 살린 작품을 집필했는데, 천재는 타고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해주는 작가이다.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영국에서 성장한 영국인이기에 작품에서 일본색은 찾아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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