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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le Ale May 29. 2017

꾸찌 터널과 베트남 전쟁

부부가 함께한 동남아 배낭여행 10

하노이 어느 호텔 로비에서 이스라엘에서 온 의사를 만난 적이 있다. 이 친구가 베트남을 찾은 이유는, 지구 상에서 유일무이하게 서구 열강과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한 나라에 직접 와서 그 승리의 비결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싶어서라고 했다.


베트남의 근현대사는 전쟁의 연속이었다. 오랫동안 베트남을 식민 지배했던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스스로 자력으로 식민지에서 벗어났고, 프랑스군이 물러나고 난 후, 미국과 치열하고 지루한 전쟁 끝에 또 미국을 몰아내고 남북통일을 이루어냈다. 서구 열강과의 전쟁뿐 아니라 같은 사회주의 형제였던 중국과의 전쟁도 있었고, 역시 승리를 거두었다. 당대에 힘 깨나 쓴다는 나라들과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한, 놀라운 저력의 나라가 베트남이다.


요즘 우리에게는 베트남 신부가 증가하며 "며느리 나라"로 인식되고 있기도 하고 그 어두운 면이 부각되고 있기도 하지만, 연배가 있는 사람들에게 베트남의 이미지는 "전쟁"과 떼려야 뗄 수가 없다. 연배가 있다고 해도 베트남 전쟁을 주로 TV나 매스미디어를 통한 이미지로 소비하고 기억하는 사람의 기억과, 직접 정글을 누볐던 참전용사들이 기억하는 이미지는 또 다르겠지만.


내 기억 속에 남아서 각인된 베트남의 이미지는 어릴 적 TV 뉴스에서 비치던 급박한 사이공 철수의 장면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아래 사진은 베트남, 혹은 사이공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이다.



그리고 세월이 더 많이 흐른 후에, 디어 헌터, 플래툰, 지옥의 묵시록, 풀 메탈 재킷 등으로 이어지는 베트남전 전쟁영화로 재현된 이미지들이, 과거의 희미한 기억과 오버랩되어 내게 남아있는 베트남의 이미지를 구성하고 있다. 기록물로 남겨진 이미지들과 픽션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들이 흐릿해져 가는 기억에 덧씌워져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베트남 이미지를 구성한 것인데, 직접 찾아간 베트남은 그런 나의 왜곡된 편견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어찌 되었건, 21세기에 찾은 사이공에서 내 기억 속 전쟁의 이미지와 전쟁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 활기차고 역동적이고 화려한 도시에서 전쟁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면 물론 그것은 착각이겠다. 연말을 맞아 화려하게 점등한 네온사인 사이를 걸으며, 사이공 비어에 취하며 열대의 열기를 식히다 보면, 이곳이 아시아에서 아마도 가장 아픈 현대사를 간직한 곳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망각하게 된다.


사이공을 찾은 관광객이 빼놓지 않고 들리는 곳이 베트남전 당시의 상황을 약간이나마 맛볼 수 있는 꾸찌 터널이다. 도심 곳곳에 흔한 여행사에서 꾸찌 터널 관광을 신청하면, 아침에 호텔로 픽업을 온다. 투어 상품을 신청하고, 약간은 흥분된 기분으로 관광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은 이미 서양 여행객들로 가득 찼고, 마침 맨 앞에 남아있는 좌석에 우리 부부가 운 좋게 앉았다.


우리 투어의 가이드는 스스로를 "미스터 빈"이라 불러달라고 하는 나이 지긋한 분이다. 버스가 꾸찌 터널로 이동하면서 미스터 빈은 단단히 작정한 듯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우리가 꾸찌 터널 관광가이드로 미스터 빈을 만난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가이드로서 더 이상 적합한 인물을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미스터 빈은 베트남전 참전용사다. 이 기구한 운명의 사내는, 필리핀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미군 소속 정보장교로 복무했다고 하고 훈련을 미국에서 받았다고 하는데, 정규 미군은 아닐 터이고 아마도 남베트남군 소속 장교로 미군부대로 파견 나왔거나, 미국의 용병이었다고 추측된다. 전쟁통에 부모님을 잃었고, 미스 사이공 출신인 애인도 잃었다고 한다. 전쟁 중이던 시절에 그는 아마도 상당한 특권을 누렸을 것이다. 베트남이 통일되면서, 미스터 빈은 탈출하지 못하고 베트남에 남아서 긴 옥살이를 했다. 남베트남 장교이건 아니건, 미군과 긴밀하게 협조했을 그가 겪었을 고초는 상상하기 어렵다. 통일 베트남에서 그는 전쟁범죄자였을 터이고, 삶은 정말 신산하고 고단했을 것이다.


그러니 꾸찌 터널을 미스터 빈처럼 생생하게 설명하고 그 분위기를 전해줄 가이드는 아마도 드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투어가이드로 그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그가 말해주는 베트남 전쟁의 실상은, 정말 생생하고 흥미진진했다.


꾸찌 터널, 이 터널을 보고 나면, 왜 세계 최강이라는 미군이 막대한 자원과 인력을 동원하고도 패전할 수밖에 없었는지 저절로 이해하게 된다. 베트남에 왔으면 반드시 들러봐야 할 곳이다.



어른 한 명 지나가기도 빠듯한 좁은 땅굴이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미군의 공습을 피해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만든 것인데, 이 복잡하고 긴 터널을 순전히 손으로 뚫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관광객을 위해 넓혀놨다는 데도 좁고 답답한데, 원래 터널은 얼마나 더 답답했을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불과 100여 미터 정도만을 체험하는데도, 굉장히 답답하고 괴롭다. 폐쇄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미리 경고하는데, 들어가 보면 이 경고가 충분히 이해된다.


이 터널은 작은 체구의 베트남 사람이 지나다니기에 빠듯한 크기이다. 그러니 덩치가 큰 미군들은 절대 접근할 수 없는 터널인 셈이다. 마치 개미굴처럼 복잡하게 얽혀있고, 부족하지만 나름대로 편의시설도 갖추어져 있을 정도로 그 규모도 방대하다. 이런 터널 속에서 버티며 전쟁을 수행한 사람들의 결의가 어떠했을지는 자명한 일이다. 고장 100여 미터를 체험하는데도 숨이 막히고 답답해서 무서울 지경인데, 그곳에서 거주하며 전쟁을 수행했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다.



터널 인근에는 전쟁 당시 여러 생활상을 재현해 놓았다. 불발탄을 톱으로 썰어서 열어 탄약을 재활용하는 장면에서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자칫 불꽃이라도 튀면 폭발할 수도 있는 상황이고, 실제로 사고로 죽은 사람들도 많았으리라. 목숨 걸고 하는 행위이다. 설명을 하면서 미스터 빈은 연신 그것은 "미친 짓"이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미친 듯이 목숨 걸고 싸웠기에 미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 아니겠는가. 그런 각오를 가진 사람들과 싸워서 이기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베트남인들이 얼마나 강인한 민족인지 경외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망설이다가 미스터 빈에게 전쟁 당시 혹시 한국군에 대한 기억이 있냐고 물어봤는데, 실수를 했다. 날카로운 눈매로 당시 한국군의 실수에 얽힌 얘기를 들려줬다. 잘못된 정보를 한국군이 흘려주는 바람에, 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고 한다. 쓸데없는 질문을 했다.


미스터 빈은 베트남 현대사에 있어서 아픈 전쟁의 기억과 상흔을 모두 갖고 있는 화석 같은 존재이다. 미군과 함께 남베트남을 위해 싸웠고, 패전 후 전범으로 복역했으며, 지금은 통일 베트남에서 외국 관광객들에게 과거 전쟁의 흔적을 설명해주는 가이드. 베트남의 아픈 역사를 관통하는 인물이고 역사의 산 증인이다. 여기에서 베트남의 저력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데, 전쟁범죄라고 해도 죗값을 치른 후에는 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을 미스터 빈의 케이스에서 볼 수 있다.


꾸찌 터널 관광을 마지막으로 사이공에서의 여정을 모두 마쳤다. 배낭을 메고 돌아다니긴 했지만, 일정을 미리 어느 정도 정하고, 숙소도 미리 예약을 하고 갔기에 완전한 자유여행이라고 하기는 어렵겠다. 딱히 정해진 것 없이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는 것도 재미있는 여행이겠지만, 혼자라면 몰라도 부부가 같이 움직일 때는 어느 정도 계획과 준비를 하고 떠나야 한다. 그래서 일정을 미리 정하고 숙소를 예약하고 떠났고, 교통편에 대한 정보도 미리 알아봤다. 씨엠립에서 프놈펜으로 가는 버스 정보와, 프놈펜에서 배를 타고 호찌민까지 가는 교통편이 있다는 것도 미리 알아보았다. 현지에 도착하여 표를 끊었지만, 준비는 어느 정도 미리 해 놓은 셈이다. 일정과 숙소를 정해놨으므로 현지에서 크게 당황할 일은 없었다. 부부가 같이한 첫 번째 배낭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후 우리는 종종 배낭여행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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