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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le Ale Dec 17. 2017

하노이와 호치민

동남아 부부 배낭여행 16

베트남의 중심 도시는 하노이와 호찌민이다. 북부의 하노이는 홍하 델타 지역에 자리 잡고 있고, 남부의 호찌민은 메콩델타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수도는 하노이이지만, 인구나 경제로 보면 과거 남베트남의 수도였던 사이공이 개명한 호치민이 더 큰 도시이다. 하지만 하노이는 아주 오래전부터 베트남의 수도였고, 프랑스 식민통치 시절에도 수도였기에 역사적으로 보면 하노이가 베트남의 중심도시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물론 베트남 전쟁에서 하노이의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의 사이공에 승리해서 통일을 했으니, 사이공보다는 하노이가 베트남의 중심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런 역사의식에는 물론 문제가 많다. 베트남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간의 차이가 꽤 심하고, 역사적으로도 생각해야 할 부분이 많다. 그러니 어느 도시가 베트남의 중심이라 하기에는, 외부인의 시각으로는 많이 부족하니 단언은 하지 말자.


호안끼엠 호수


베트남은 북부와 남부가 역사적으로도 상당한 차이가 있는데, 지금 현재 베트남의 기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하노이가 속한 북부지역은 중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북부 베트남은 오랜 기간 중국과 조공관계를 맺었던 유교 문화권이고 한자 문화권이다. 하지만 중부 베트남은 힌두교 문화권인 참파 왕국이 거의 천년 간 지배하기도 했고, 남부 베트남은 캄보디아의 변방 정도로 여겨졌었다. 18세기에 들어서서야 베트남은 남부지역의 메콩델타 지역을 영토로 복속시켰다.


띠라서 그 이후에 중부와 남부 지역에 북부 베트남인들이 이주해오면서 원주민인 참파인, 크메르인과 섞이게 되는데, 그 역사가 그리 길지 않기에 이 세 지역의 문화가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9세기까지도 북부 홍하 델타와 남부 메콩 델타의 농민 간에는 원활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로 언어와 문화의 차이가 컸었다.


18세기에 베트남이 남쪽까지 세를 확장해서 점령했다고 하지만, 이 또한 남북 간의 갈등이 심한 시절이었다. 16세기에 당시 북부 베트남의 남쪽 끝이었던 중부지방에서 반란 정권이 수립된다. 응우옌 정권이라 불리는 이 집단은 북부의 중앙정부와 대립하면서 남쪽으로 세를 확장해서 18세기까지 메콩델타 지역을 장악했는데, 이 기간 동안 북부 베트남과 남부 베트남은 치열한 전쟁을 치르게 된다. 그러니 대략 200여 년가량 내전을 치렀던 것이다. 감정의 골이 깊을 수밖에 없다.


베트남이 통일 국가를 이루게 된 시초는 18세기 말, 중부 지역 빈딘의 떠이선 출신 삼 형제가 응우옌 정권을 무너뜨리고 북으로 진격해 홍하 델타를 장악하며 시작되었다. 떠이선은 북쪽의 중국을 격퇴시키고, 남쪽의 태국군도 물리치고 베트남 통일을 이루었는데, 이때가 1788년이었다. 그러나 남부 사이공에서는 또 다른 정권, 쟈딘 정권이 수립되었고, 15년간의 내전을 거쳐 남부 사람이 주체가 된 세력이 떠이선을 물리치고 19세기 초에 새로운 왕조를 수립했다. 이 왕조가 현재의 베트남 전체를 통괄하는 최초의 통일 왕조 응우옌 왕조이다. 응우옌 왕조의 국호가 비엣남이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통일 베트남의 역사는 상당히 최근의 일이다.


1802년에 응우옌 왕조가 베트남을 통일했지만, 1859년에 프랑스가 사이공을 중심으로 식민지배를 시작했으니, 실질적으로 통일 베트남의 역사는 고작해야 57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프랑스 식민지배 시절 독립을 위한 저항이 계속되었고,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프랑스가 물러가고 1945년에 호치민이 하노이에서 베트남 민주공화국 수립을 선언하며 봉건시대를 끝내고 공화정이 들어서지만, 이후 다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으로 갈라져 치열한 전쟁을 벌이게 된다. 모두들 알다시피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수하고 북베트남이 사이공을 접수하고 통일을 이룬 것이 1975년이다.


따라서 남북 간의 대립은 역사적으로 굉장히 복잡한 관계를 갖고 있다. 짧았던 통일 왕조시대를 거쳐 또다시 남북 간의 긴 내전을 겪었으니, 이런 역사가 남북 간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전쟁이 종식된 1975년 이후를 진정한 통일 시대로 본다면 베트남 통일의 역사는 매우 일천하다. 여행자의 입장에서 그런 차이를 느끼기는 어렵지만, 베트남의 역사에 대한 짧은 지식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베트남 여행이 조금 더 알차게 다가올 것이다.


사이공 인민청사 앞에 위치한, 아이를 안고 있는 호치민동상은 최근에 손을 들고 있는 동상으로 바뀌었다.


하노이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두말할 것도 없이 호치민이다. 과거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은 그의 이름을 따서 통일 이후 호치민으로 개명을 했다. 그러니 베트남에서 호치민을 떠올리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20세기 가장 유명한 혁명가를 꼽으라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체 게바라를 꼽지 않을까. 별 달린 베레모를 쓴 체 게바라의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티셔츠에 새겨진 팝컬처의 아이콘으로 소비되고 있지만, 불꽃같은 삶을 드라마틱하게 살고 간 체 게바라가 위대한 혁명가라는 사실에 토를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20세기 위대한 혁명가로 호치민을 꼽고 싶다.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탐독한 이 겸손한 혁명가는, 오늘날의 베트남이 있게 만든 장본인이고, 지금도 베트남 국민들에게 호 아저씨로 불리며 한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인근 국가에서도 호찌민의 초상을 걸어놓고 있는 집을 볼 수 있으니 그가 얼마나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깊은 굴곡을 지닌 유서 깊은 도시, 하노이 역에 도착한 것은 이른 아침이었다. 라오까이에서 야간 침대열차를 타고 새벽녘에 하노이에 내려 미리 예약해 놓은 호텔로 택시를 타고 갔는데, 베트남 택시가 악명이 높은 지라 걱정을 했다. 여행지에 대한 선입견은 직접 경험을 통해 크게 수정되는 일이 많다. 베트남 택시에 대한 악명을 익히 들었지만 정작 나는 호치민과 하노이를 여행하는 도중에 택시 문제를 겪은 적이 없다.


이런 골목에 위치한 호텔 문 앞까지는 택시가 들어가지 못한다


택시는 정확하게 내가 예약한 호텔에 우리를 내려 주었다. 정확하게 내려주었다는 표현은, 우리가 묵을 숙소가 위치한 호텔로 들어가는 골목 앞에 내려주었다는 말이다. 하노이의 호텔은 좁은 골목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아서 택시가 호텔 문 앞까지 데려다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파에서 미리 검색을 하고 예약을 한 호텔인데, 저렴한 가격에 시설이 깔끔해서 매우 만족스러운 호텔이었다.


사파에 머무를 때도 비가 왔는데, 하노이에 머무를 때도 자주 비가 왔다. 비 오는 거리의 정취가 하노이의 좁은 골목들과 어우러져 이국의 분위기를 더욱 진하게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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