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제의 미덕인가 의미 없는 고집인가?
달링턴 경의 충직한 집사였던 늙은 스티븐스에게 남아 있는 나날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남아있는 나날, " 제목만 보면 노집사 스티븐스에게 남아 있는 나날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이야기, 즉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사람이 앞으로 남은 날들을 어떻게 살아갈지에 관한 지혜로운 이야기가 연상된다.
그러나 제목이 주는 뉘앙스와는 달리, 주된 줄거리는 스티븐스의 과거 회고담이다. 그에게 남아있는 날은 중요하지도 않고 별 의미도 없어 보인다. 고작 유머를 즐기는 새 주인에 맞춰서, 자신도 유머 감각을 길러야겠다는 시시한 목표가 그에게 남아있는 나날의 전부라면, 사실 남아있는 것은 없다.
자신만의 원칙에 갇혀 살아온 한 사람이 변화해버린 환경에 내던져진 채, 자신이 살아온 길을 돌아보며 느끼는 회한과 씁쓸함이 소설의 내용이다. 따라서 "남아있는 나날"은 어울리지 않는 제목이다. 원제 The Remains of the Day도 남아있는 나날이라는 의미보다는 차라리 그날의 찌꺼기, 그날의 잔영, 혹은 그 시대의 잔영 정도의 의미가 강하다.
스티븐스에게 집사란 천직이자 의미이고 보람이다. 집사로서 최고의 반열에 올랐다고 스스로 자부한다. 그에게 위대한 집사의 자격은 품격이다.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회고담을 통한 풍부한 예시를 통해 집사가 가져야 하는 덕목인 품격이 무엇인지 세세히 설명하고 그 경지에 올라온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집사의 품격은 여러 가지로 정의되지만, 충성을 바칠 자격이 있는 주인을 만났을 때 기꺼이 모든 것을 희생하며 주인을 모시는 것, 그러니까 일단 주군을 정하면 무조건적인 충성을 바치는 것이 집사의 품격 중 하나이다. 그래서 스티븐스는 그런 자격을 갖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달링턴 경을 모시고 충성을 다한다.
그러나 신사임에는 틀림없지만 시대를 읽는 통찰력이 부족했던 달링턴 경은 나치 히틀러에게 이용당하고 결국 재판까지 받고 명예가 실추된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끝까지 달링턴 경의 선의를 믿는다. 집사의 품격이란, 한번 충성을 맹세했으면 주군에게 절대 충성하고 복종하는 것이기에, 주군의 잘못된 판단을 바로잡는 충고나 조언은 집사의 몫이 아니다. 따라서 스티븐스는 달링턴 경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한 적도 없고, 이의를 갖지도 않는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유대인 하녀를 달링턴 경이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해고하지만, 켄턴 양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티븐스는 담담히 주인의 명령을 이행한다. 달링턴 경의 명예가 실추되었을 때도, 그것은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우긴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사실 달링턴 경이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받는 것이 결코 부당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거듭해서 달링턴 경에 대한 자신의 충심을 강조하지만, 달링턴 경이 죽고 달링턴 홀을 구매한 미국 부자에게 패키지로 같이 팔린 그는 달링턴 경의 집사였었다는 사실을 몇 번에 걸쳐 부인한다.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처럼. 전 주인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 집사의 도리이기에 굳이 달링턴 경의 집사였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는 것이라는 변명에도 불구하고, 사실 스티븐스는 달링턴 경과의 관계를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결국 스티븐스는 위선자에 불과하다. 스스로 집사의 품격을 지켰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이 정해놓은 기준이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애써 부인하고 변명으로 일관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논쟁에서 신사들의 논거를 뒷받침하는 증거로서 모욕을 당했음에도 애써 집사의 품격을 지킨 것이라 합리화한다. 민중이 무지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로서 불려 나가 모욕을 당했음에도 애써 이를 부인하고 자기 합리화를 하는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감정을 억제하고 직무에 충실하는 것이 집사의 품격 중 하나라는 흔들리지 않는 그의 믿음은 총무 켄턴 양이 자신에게 보이는 관심을 애써 무시하고 켄턴 양에 대한 자신의 감정조차 부인하고 변명으로 일관한다. 그 결과 켄턴 양은 결혼을 하고 떠나버린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 뒤늦게 켄턴 양이 이혼했다고 판단하고 그녀와의 관계를 복원하는 희망을 가져보지만, 이 또한 덧없는 희망이었을 뿐이다. 켄턴 양을 만난 그 마지막 순간에도 스티븐스는 자신의 감정을 속이고, 스스로 품격을 지켰다고 자기 합리화를 한다. 집사의 품격을 위해 사랑을 희생한 것이 아니라고, 켄턴 양과는 끝까지 직업적인 관계를 유지했다고 애써 자신을 속이고 있다. 자신이 처음으로 여행을 떠난 이유가, 사실을 켄턴 양과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감정을 다시 살려보려는 희망에서 비롯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티븐스는 끝까지 그런 자신의 감정을 속이고 어디까지나 직업적인 관점에서 유능한 일손을 충당하기 위한 만남이라고 자기 합리화를 한다.
스티븐스는 정신없이 바뀌는 세상에서 기본에 충실한 절제의 덕목을 갖춘 위대한 집사인가 혹은 자신의 감정조차 속인 비참한 위선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전적으로 읽는 사람들의 몫이다. 저자가 의도했던 바는 감히 추측하건대 후자가 아닐까 싶다. 내가 느낀 스티븐스에 대한 저자의 묘사는, 물론 품격 있는 집사의 모습을 묘사했지만 보다 더 위선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더 나아가서 변화하는 세상의 가치에 고집스레 저항하는 영국 사회의 위선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집사 스티븐스는 영국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읽힐 수 있는 부분이다. 절제와 품격이라는 외피 속에 철저하게 감정을 숨기는 것을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위선에 대한 비판. 자신의 본분이라고 선을 그어 놓고, 그 틀 안에서 안주하며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는 비겁함.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음에도 끝까지 위선을 인정하지 않는 안쓰러운 고집. 몰락해버린 귀족이 과거 영화의 부스러기를 잡고 놓지 않는 안쓰러움이랄까.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대영제국의 초라한 현실을 애써 부정하며, 배를 곯아도 고집스레 품격을 지키는 자신을 애써 합리화하는, 그런 영국 사회를 스티븐스와 그가 모셨던 달링턴 경이 상징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스티븐스의 새 주인 페더레이가 미국인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켄턴 양을 떠나보낸 스티븐스는 이제 자신의 새로운 주인인 미국인 페더레이의 유머에 맞춰 자신도 여태껏 해본 적 없는 유머 감각을 기르겠다고 다짐한다. 이것은 결코 새로운 희망이나 밝은 미래에 대한 어떤 기대도 아니다. 회한 가득한, 그러나 결코 그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늙은 제국의 쓸쓸한 퇴장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