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쓰기 63일차
좋지 않은 관습들이 있어요.
부모의 권위.
교사의 권위.
상명하복.
의도는 좋아요. 윗사람을 공경하고, 상급자를 존중하고 말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가장 잘못된 가정이라고 한다면, 윗사람, 상급자가 절대적으로 옳다는 가정이에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조직의 리더가 리더의 그릇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가 있어요. 부모이지만,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부모의 지혜를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어요.
교사라고 하지만, 교사에 대한 사명감이 아니라 단순한 직업으로만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있지요.
배움의 기회가 많아지면서, 옳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어요. 문제는, 그런 관점을 지금의 환경에 적용하다 보니 기존의 사고관을 가진 기성세대의 옳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반감을 갖게 되고, 비판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지요.
보통은 그렇게 생각해요.
왜 그렇게 하지? 생각을 그렇게밖에 하지 못하는가?
나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내가 나중에 그 자리에 있게 되면 나는 그렇지 않을 것 같아.
문제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언젠가 그 자리에 머물게 되면 나 또한 그렇게 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지요.
기억은 참 아이러니해요.
“난 그것을 기억하지 않을 거야.”
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그것에 대한 기억은 더 선명하게 변하지요.
같은 원리라고 생각해요.
“난 그 사람처럼 하지 않을 거야.”
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내가 인지한 좋지 않은 태도와 행동, 대응 방법이 내 기억에 선명하게 자리 잡게 되지요.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내가 평온한 순간, 내가 나의 환경에 대한 주도권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안정된 상황에서는 어느 정도 내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소위 과거 내게 반감을 줬던 그 사람의 행동이 내게서 표출되지 않을 수도 있어요. 문제는 위기 상황이지요. 나의 이성과 감정이, 나의 환경이 내가 조절할 수 없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그 모습을 연출하게 되는 거예요.
내 기억의 깊은 곳에서는 과거 내게 상처 줬던 그들의 행동 방식이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것이 깊게 자리하게 된 원인은 “나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라는 다짐 때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아이러니지요.
수학 선생님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학창 시절 제가 만난 선생님들 덕분이었어요.
당시 제가 만났던 선생님들은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학생들과 소통하지 않았고, 혼자 이야기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나마 좋은 선생님은 몽둥이를 들었지만, 보통의 경우는 욕설과 손찌검을 했었지요.
그렇게밖에 수업을 할 수 없을까? 에 대한 비판의식이 저로 하여금 수학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지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앞에서 언급한 이야기와 모순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거예요.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가자면, 기존의 선생님들에 대한 반감이 저 또한 그런 선생님으로 만들었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적어도 제가 생각하기에 저는 그런 선생님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지도했던 아이들과 종종 연락을 주고받고 있고, 교직의 길을 걸어가는 아이들과도 많은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고민하니까 말이지요.
적어도 저는 교직생활동안 과거 제가 봤던 선생님들에게서 봤던 ”억지로 수학을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때우는 “교사의 모습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수업시간이 그렇게나 빨리 흘러가곤 했으니까요.
저는 무엇이 달랐을까요?
사업을 하는 사촌동생이 있어요.
친동생이 몇 해 전 그 사촌동생의 사업장에서 일을 했었지요. 저와 동생, 사촌동생 모두 어린 시절 정말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거든요.
친동생과 사촌동생은 함께 일을 하다가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어요.
저는 둘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지 않았지요. 호기심을 핑계로 누군가를 비판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자연스러운지 모르겠지만, 동생도 그러했어요.
사촌동생과 다른 길을 선택하고 비판적인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요. 그렇다고 제가 동생과 소통이 없었던 것은 아니에요.
시간이 많이 지나고 집안 행사로 사촌동생을 만났어요. 동생의 안부를 묻고, 본인에 대한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닌가 물어보더라고요. 당황했지요. 그런 일이 있었나? 하고 말이에요. 그런데 없었어요.
순간적으로 왜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했지요. 제가 묻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을 것이지만, 동생은 왜 이야기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깨달았어요.
동생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지나간 시간에 대해서, 관계에 대해서 원망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는 것을요. 우리는 앞으로 무엇을 하는 게 좋을까, 무엇을 배우고, 어떤 안목을 얻어야 할 것인가 대해서 고민하고 함께 이야기했었거든요.
학창 시절, 수업을 들으면서 저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 정도 시간에서 아이들의 집중력이 떨어지는구나. 이 정도에서 분위기 전환이 있으면 좋겠다. 이건 저 방법보다는 이런 방법의 설명이 있으면 좋겠다. 이걸 왜 공부해야 할까? 내가 교사가 된다면 나는 어떻게 설명할까? 나는 어떤 논리로 아이들을 설득할까?
비판하기보다는 내가 만약 그 상황에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했었어요.
아마, 그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자연스럽게 제 생각의 기저에는 비판하던 그들의 모습이 아니라, 그들이 했던 것 대신에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대안이 자리 잡게 되었지요.
제가 있었던 학교는 구성원의 변동이 그렇게 크지 않은 사립학교였어요.
좋게 보면 오랜 시간 서로를 지켜보는 관계이지만, 나쁘게 보면 너무 오랜 시간 서로를 지켜보는 관계지요.
시간이 많이 지나서 젊은 시절 권위주의 가득한 선배교사를 보고 비판하던 선생님들이 이제 어느덧 학교를 움직이는데 중요한 일을 담당하는 직급이 되었어요.
그런데 안타까운 건 과거 비판하던 그들의 모습이 지금 그 자리에 가서는 그때 비판받던 그 모습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듣게 되었지요.
참 안타까웠어요.
과거 권위주의에 가득한 무리가 떠나면 세상은 조금 더 바뀐다고 생각했는데, 인식은 비슷하고 구성원만 바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곤 왜 바뀌지 못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오늘의 글을 쓰게 되었지요.
같은 책을 읽어도, 같은 영화를 봐도 받아들이는 대사와 느낌은 모두가 달라요.
같은 상황을 살아도 누군가는 그것을 통해서 성장하고, 누군가는 여전히 변하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과연 그 차이는 무엇일까 하고 말이지요.
아마 지식의 습득과 지혜의 습득에 대한 차이가 아닐까 생각해 봤어요. 누군가는 경험을 통해서 지식을 쌓고, 누군가는 경험을 통해서 지혜를 쌓지요.
지식을 쌓는 사람은 수용된 정보 속에서 자신의 모습은 없어요. “나”는 그곳에서 빠지고 지식과 지식의 연결만 있지요. 지혜를 쌓는 사람은 수용된 정보 속에서 지식을 연결하고 그것에 “나”를 연결해요. 그것이 내 삶에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에 대해서 생각하지요. 때문에 지혜가 있는 사람은 지식과 깨달음을 겸비한 경우가 많다고 생각해요.
나는 그렇게 살지 않을 거야.
내 선배처럼, 내 상사처럼, 내 부모처럼.
혹여 조금이라도 그런 생각이 있다면, 지혜를 쌓으세요.
내가 비판하는 그들의 언행을 보고 그곳에 “나”를 연결하여 반성하고 더 좋은 모습을 만들기 위해서 비판만 내면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비판을 개선할 수 있는 대안을 내면화하면 좋겠어요.
아마,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런 어른들이 많아지는 과정이 반복되면, 언제부턴가는 나는 그들처럼 살아갈 거야.라고 생각하는 다음 세대가 조금씩 나오지 않을까요?